왕따당한 ‘영혼의 노숙자’들
  • 이오성 기자
  • 호수 93
  • 승인 2009.06.22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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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 남성을 연구한 결과가 발표됐다. 사회생활에 치이고,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40대 남성의 현주소는 안쓰럽기만 하다. 그들은 어디에서 삶의 해법을 찾아야 할까.
   
ⓒ전문수
지난 6월16일 대학로 한 카페에서 열린 대화마당에는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오른쪽 마이크 든 이)와 정유성 교수(정혜신씨 옆) 등이 참석했다.
한국 사회에서 40대 남성은 누구인가. 사회의 중추로서 한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동맥인가. 혹은 일본 만화 <시마과장>의 등장인물처럼 한때 사회변혁에 앞장서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왕년의 투사인가. 그도 아니면 먹고사는 일에 치여 꿈도 희망도 잃어버린 지리멸렬한 일상의 주인공인가.

남성 문제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정유성 교수(서강대·교육문화학)가 6월16일 ‘생활 인권 대화마당 알지(知)’(인권재단 주최)에서 한국의 40대 남성 연구 보고서를 발표했다. 40대 남성 20명을 면접조사한 이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의 40대 남성은 가정과 직장 등 모든 생활 세계에서 가장 어두운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위기의 남자들’이다. 정 교수는 지금 40대가 겉으로는 사회와 가정의 주춧돌이지만, 속으로는 ‘가부장제 아래서 골병들 정도로 죽어라 하고 일했더니 가족으로부터 왕따당한 영혼의 노숙자’라고 지적했다.

가부장제 혐오하지만 자유롭지 못해

아버지 생활비 부담률이 95%에 이르고, 대학생 44%는 아버지에게 원하는 게 돈뿐이라고 답하면서도 자녀는 아버지를 상담자나 가까운 벗으로 대하지는 않는다. 남성의 구실을 강조하는 사회구조 속에서 40대 남성 사망률 세계 1위라는 불명예도 안았다. 2007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연령대별 자살률에서 40~50대 자살자가 4000명(전체 33%)으로 가장 높았다. 40대 남성의 자살 비율은 40대 여성보다 2.2배나 높았다. 이런 현실은 40대 당사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전에는 아버지가 집안의 기둥이었다. 그런데 요즘은 그런 게 전혀 없는 것 같다. 그저 돈 벌어오는 기계라고 생각하는 게 전반적인 세태다… (전에는) 하다못해 형식적인 예의라도 갖춰서 균형을 잡았는데, 요즘은 그것도 유지되지 않으니 더욱 쓸쓸한 것 같다.”(44세 공무원)

몇 가지 장면이 떠오른다. 귀여운 딸을 껴안으려다 “징그럽다”라는 핀잔을 듣고 “이제 무슨 낙으로 사나”라며 실의에 빠지는 아빠(인터넷 전용선 텔레비전 CF), 혹은 집에서 홀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외국에 유학 간 자녀의 동영상을 보다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기러기 아빠(영화 <우아한 세계>)의

   
모습이다. ‘중년 남성의 위기’야 이미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지만, 정 교수의 연구 결과가 새삼 눈길을 끄는 건 ‘88만원 세대’ 등 세대 담론이 몰아치는 가운데에서도 40대를 위한 논의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40대는 이른바 ‘산업 주력’ 세대다. 한 나라 경제 활동의 주축이 되는 연령대가 40대라는 이야기다. 인구 비율로도 860만명으로 30대(840만명)보다 더 많다. 이런 추세는 2030년까지 이어질 거라고 한다. 그들은 이른바 ‘낀 세대’이기도 하다. 지독한 가부장제 아래에서 성장해 민주화 투쟁을 거치면서 머리로는 가부장제를 혐오하지만, 실제로는 어떻게 평등하고 조화로운 아버지 상을 실천해야 하는지 막막한 세대이며, 끝내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기를 발견하고 연민에 젖는 오이디푸스들이다.

‘나’를 찾는 ‘돌봄과 보살핌’ 필요

‘386’으로 상징되는 사회 변혁의 적자이면서도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 속절없이 무너진 첫 세대이기도 하다. 88만원 세대와 비교하면 소득 수준이 높지만,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말처럼 고용 안정성은 그리 높지 않다. 자녀 교육비 등 생활 지출은 급격히 늘어나는 연령대다. 그러면서도 ‘40대가 철밥통을 움켜쥐고 있어서 20대가 취업을 못한다’는 식의 누명을 써야 하는 세대다. “우리가 이른바 낀 세대일 텐데, 아래 세대와는 큰 문제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위 세대하고는 문제가 많다. 그들의 권위적인 커뮤니케이션 스타일이 가장 힘들다… 현장감 없는 윗사람들과 소통이 정말 어렵다.”(47세 한 연구소장)

이들이 정말 난처해하는 것이 가정 생활, 그중에서도 자녀와의 관계다.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만나 외계인 아이를 낳았다’는 항간의 우스갯소리처럼 어느 날 훌쩍 커버린 자녀와의 관계에서 적잖은 힘겨움을 토로한다. “자녀와 대화가 안 돼서 죽겠다”라거나 “아이가 어머니 편만 드는 통에 나는 집안에서 완전 왕따다”라는 토로가 끝없이 이어진다. 이날 대화마당에 함께 참석한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씨가 “아버지의 92%가 ‘자녀가 어려운 일을 겪을 때 나와 상담할 것이다’라고 생각한 반면, 자녀는 4.6%만이 그렇게 생각했다”라고 답하자, 40대 참석자들은 모두 외마디 탄성을 질렀다.

우종민 교수(인제대 서울백병원·신경정신과)는 지난 4월 펴낸 <남자 심리학>에서 우리 사회 중년 남성들이 ‘자폐증’과 ‘탈진증후군’에 빠져 있다고 진단한다. 그들은 술에 취하지 않으면 마음을 열지 못하는 자폐증과,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으려 기력을 너무 소모한 탈진 상태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일은 잘하면서도 다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읽어내는 데는 서투르다. 우 교수는 ‘과도한 책임감, 가정에서의 소외, 동료들의 퇴직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로 정신과를 찾는 중년 남성이 부쩍 늘었다’라고 지적했다.
 
‘자승자박’이라며 탓할 일이 아니다. 위기의 40대는 어디에서 해법을 찾아야 할까. 정유성 교수는 40대로 하여금 ‘나’를 찾게 하는 ‘돌봄과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예컨대 명상 프로그램이나 인문학 강좌 등이 그것이다. ‘아버지로서 나’를 찾기 위해 ‘아버지 학교’에 참여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 교수는 특히 ‘아내 해방 주간’ 휴가 프로그램을 실천할 것을 권한다. 휴가지에서 식사 준비부터 아이들 돌보기까지 죄다 떠맡은 남성들이 처음에는 볼멘소리를 하다가도 2박3일이 지나고는 가족이 하는 일을 돌아보고 짚어볼 수 있었다며 좋아하더라고 전했다. 이제 곧 휴가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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