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대선에선 ‘진보는 분배를 중시하고 보수는 성장을 중시한다’는 전통적인 인식이 깨졌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성장을 외치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복지 확대를 약속한다. 성장과 분배, 차세대 첨단산업 육성과 복지지출 확대 등에서 전선이 명확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후보 간 차이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유권자들은 해당 후보가 평소 각종 경제문제에 어떤 ‘관점’과 ‘기조’를 피력해왔는지 꼼꼼하게 따질 필요가 있다. 후보들은 당선만을 위해 자신의 평소 관점 및 기조에 어긋나는 공약을 막 던질 수 있다. 이런 경우, 공약을 이행할 세부 지침을 제시하지 못한다. 심지어 각 공약들이 서로 모순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장밋빛 미래를 그리는 수사(修辭) 너머로 대선후보들이 그리는 종합적인 설계도를 면밀하게 따져보자.

■ 기본 과제, 저성장과 팬데믹 후유증

먼저 각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당장 해결에 나서야 하는 과제를 얼마나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한국 경제는 흔히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고 진단받는다. 2011년에 3.7%였던 연간 경제성장률은 코로나19 팬데믹 직전 해인 2019년까지 최저 2.2%에서 최고 3.2% 사이를 오갔다. 한국만 그런 것은 아니다. 2010년대 재정위기를 겪은 유로존 지역의 연간 성장률은 -0.84%(2012년)에서 2.6%(2017년) 사이에 머물렀다. 첨단기업이 몰려 있어 그나마 사정이 나았다는 미국도 3% 성장률을 기록하기 어려웠다. 저성장 상태에서 높은 실업률이 지속되면서 일부 국가에선 디플레이션(저성장으로 물가가 떨어지고, 물가 하락이 다시 경기를 침체시키는 현상)이 우려되었다. 여기까지가 팬데믹 직전까지 펼쳐진 전개다.

이런 기본 환경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며 더욱 악화됐다. 핵심은 ‘불평등의 심화’다. 한국은행은 2020년 12월에 발표한 ‘코로나19 위기 이후의 성장 불균형 평가’ 보고서(BOK 이슈노트)에서 “국가 간 방역관리와 재정 여력 차이로 팬데믹 충격이 국가 간 성장 불균형을 만들어냈다”라고 평가했다.

1월11일 ‘신경제 비전 선포식’에서 경제 공약을 밝힌 이재명 민주당 대선후보. ⓒ국회사진취재단

각국은 팬데믹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금리 인하(혹은 저금리 유지) 등의 방식으로 유동성을 크게 늘려 경기부양에 나섰다. 이에 따라 돈을 빌릴 여력이 있는 계층은 자산(주식·부동산) 시장에 투자해 더 부유해지는 반면 코로나19로 침체된 부문에 종사하는 집단은 더 가난해지는 현상이 나타났다. 한국은행 역시 “보건 위기에 취약한 대면 업종과 저소득층에 매출·고용 충격이 집중되고 실물-금융 간 괴리가 나타난다”라고 지적한다.

팬데믹 기간에 IT 관련 상품을 많이 수출하고 방역 성과도 좋았던 한국은 국가 간 경쟁에서 상대적 이득을 보았다. 그러나 국내 경제주체들 사이에서는 ‘간극’이 커졌다. 유권자들은 국가 경제성장의 추진력을 키우는 동시에 극심해진 불평등을 해소하는 다면적인 접근과 전략을 대선후보에게 요구하고 있다. 모든 대선후보의 전략과 방향성이 비슷해진 이유다. 성장 비전과 양극화 해소 방안을 함께 제시하라고 시대가 후보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양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이재명·윤석열 두 후보는 적어도 이 시대적 요구를 크게 부인하지는 않는다. 이재명 후보는 지난해 11월2일 민주당 대선 선거대책위원회 출범식에서 ‘전환적 공정성장’을 1호 대선 공약으로 제시했다. 전환적 공정성장이란 ‘전환성장’과 ‘공정성장’이라는 두 가지 전략을 합친 말이다. ‘전환성장’은 4차 산업혁명(디지털 대전환), 미·중 패권 경쟁, 기후위기, 코로나19 팬데믹과 같은 ‘글로벌 대전환기’에서 위기를 기회로 만들자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 같은 ‘전환기’에는 자신의 능력(기술 등)이 필요하지 않게 되거나 새로운 능력을 습득하는 데 실패해서 낙오하는 이들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이들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시스템이 또 다른 축인 공정성장의 영역이다.

최근 민주당 선대위 내부에서는 ‘전환적 공정성장’이라는 개념이 다소 모호하다는 고민이 흘러나온다. 이 때문에 이재명 캠프가 선언적 지표로 내세운 것이 지난 1월11일에 발표한 ‘신경제 비전’이다. 여기서 강조하는 수치는 ‘1·5·5’다. 각각 수출 1조 달러, 국민소득 5만 달러, G5 시대(세계 5대 경제대국)를 의미한다.

이 같은 지표가 비현실적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현재 3만 달러 수준인 1인당 국민소득이 5만 달러로 커진다는 것은, 한국 경제의 규모가 지금의 1.4배로 확대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매년 5% 이상의 경제성장률을 8년 이상 지속해야 성취할 수 있는 공약이다. 또한 경제 규모가 G5 수준이 되려면 영국, 프랑스, 인도 등을 뛰어넘어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2021년 명목 GDP에 따르면 영국 2조8300억 달러, 프랑스 2조7800억 달러, 인도 2조7200억 달러인 반면, 한국은 1조8200억 달러 수준이다. 단순 비교하면 경제 규모가 1.56배로 커져야 가능한 목표치다.

이재명 후보는 이 같은 지표(1·5·5)를 반드시 임기 내에 성취하겠다는 건 아니라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가 나아가야 할 중장기적 목표 설정이고, 이를 위해 꾸준히 우상향하는 기반을 자신의 임기 동안 만들겠다는 의미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지난해 12월26일 ‘성장-복지-일자리’ 정책 공약을 발표했다.ⓒ국회사진취재단

그러나 선언적 지표에 의지하는 캠페인은 2007년 이명박 당시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발표했던 7·4·7 공약(7%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과 흡사하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당시 이명박 후보의 ‘7·4·7’에 대해 상당히 비판적이었다.

윤석열 후보는 자신의 경제 공약 밑그림을 ‘행복경제’로 지칭하고 있다. 개별 경제주체가 행복해지기 위한 최우선 과제로 일자리를 내세우며 민간에서 양질의 일자리가 늘어날 수 있도록 경제정책 방향을 설정하겠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26일 이 같은 구상을 밝히는 자리에서 윤 후보는 “규모만 키우는 성장경제에서 삶의 질을 높이는 행복경제로 혁신하겠다. 성장과 복지, 일자리 선순환 구조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보수 측은 대체로 공급 측면(구체적으로는 기업)의 환경을 개선해서 기업 운영을 활성화하면 ‘경제성장률 상승→일자리 증가→재정 확충에 따른 복지 혜택 증가’의 선순환이 가능해진다고 주장해왔다. ‘공급 측면의 조건 개선’ 중 가장 중요한 내용이 바로 노동시장 규제를 철폐하거나 완화하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윤석열 후보는 보수 측의 경제성장 틀은 물론 자신의 관점(“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과도 다소 어긋난 주장을 하고 있는 셈이다. 반대로 이재명 후보는 보수 측이 강조해온 공급 측면의 환경개선과 경제 규모 확장을 강하게 내미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거대 양당의 경제철학이 서로 뒤바뀌었다기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중도층 표심을 확보하기 위해 비슷해진 결과라고 보는 게 합당하다.

■ 겉과 속은 이렇게 다르다

총론은 비슷해 보이지만, 각론에서 두 후보는 ‘정부 중심 인프라 투자 확대’와 ‘민간 중심 시장경제 중시’로 나뉜다.

이재명 후보는 성장을 위한 기본적인 전제로 정부의 대규모 투자를 내세웠다. 첨단산업에 대한 투자를 민간에 맡겨두기보다 정부가 적극 나서겠다는 것이다. 이재명 후보와 가까운 한 인사는 “전환적 공정성장 구상도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자서전인 〈온 아워 웨이(On Our Way)〉에서 영향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대표적인 예시가 이 후보의 세부 공약 중 하나인 ‘에너지 고속도로’다. 에너지 고속도로란, 태양광·풍력 발전이 가능한 전국 각지에서 주민이 참여할 수 있는 작은 규모로 신재생에너지를 생산해 도시로 판매하는 시스템이다. 수많은 지역이 참여한다면 각 단위의 생산량은 작지만 전국적으로는 엄청난 규모의 신재생에너지가 만들어져 거래될 수 있다. 여기서 나오는 수익금은 참여 주민들에게 연금 형태로 배분한다고 한다.

2018년 12월26일 문재인 대통령이 국민경제자문회의에서 소득주도성장 등에 관해 말했다.ⓒ연합뉴스

이런 시스템이 가능해지려면 각 지역에 에너지 생산설비(태양광·풍력)가 갖춰져야 하는 한편 이를 도시로 보낼 수 있는 전력망, 에너지를 거래하는 플랫폼 등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를 과거 박정희 정부가 깔아 운송·유통망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빗대어 ‘에너지 고속도로’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에너지 고속도로는, 정부가 이런 인프라에 대규모로 투자하겠다는 공약이다. 여기서 정부투자는 일종의 마중물로 민간의 시장 참여를 유도하는 역할이다. 신재생에너지처럼 대규모 투자가 필요하고 성패가 불확실한 부문엔 민간 부문이 적극적으로 투자하기 어렵다. 그래서 정부의 선도적 투자로 깔아준 판에 민간이 ‘장사’를 할 수 있도록 해서 재생에너지 같은 신산업이 자리를 잡게 하겠다는 아이디어다.

각 지역의 주민이 에너지를 시장에 공급한다는 아이디어 자체는 거대하고 기발하다. 그동안 에너지 시장은 사실상 한국전력이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명 캠프는, 한국전력의 시장독점을 유지하면 글로벌 차원의 화두인 에너지 산업 혁신 및 신재생에너지 부문의 발전을 촉진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 이런 공약을 내놓은 것으로 보인다. 전기 에너지를 민간에서 사고팔게 한다는 것부터 도발적인 아이디어다. 진보 진영에서는 전통적으로 물이나 전력 같은 필수 공공재의 민영화를 반대해왔는데, 이런 기조와 상당 부분 대비된다. 이재명 후보는 이 같은 산업 인프라 투자가 없으면 한국 경제가 추가적인 성장 동력을 얻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판을 까는 데’ 정부의 재정을 아낌없이 투입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반면 윤석열 후보는 시장 우선주의를 정책 전반에 내세운다. ‘행복경제’라는 밑그림에도 ‘일자리는 민간이 만들고, 국가는 규제를 완화해 민간의 자유로운 일자리 창출을 돕는다’는 인식이 담겨 있다. ‘행복’의 핵심 전제가 일자리라고 지적한 것도 이 때문이다.

특히 윤석열 후보의 공약에는 ‘반(反)소득주도성장’이라는 관점이 깔려 있다. 윤 후보의 경제 브레인으로 꼽히는 김소영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가 지난해 11월에 공동 저술한 〈혁신의 시작〉에서 언급한 내용을 살펴보자. 이 책엔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8명이 차기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제언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여기서 김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지금은 정부 주도 물량공세 정책을 펴서 저성장 구조를 탈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지적한다. 이 지적은 이재명 후보의 성장전략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비판이다.

특히 김소영 교수는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을 피력한다. “(소득주도성장은) 노동소득 증가 효과조차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최저임금을 급격히 올리면서 상대적으로 해고된 인원이 더 많다. 중소기업과 자영업자도 타격을 입었다. 소득분배에도 실패하고 노동소득도 안 올라가고 경제성장에도 실패했다.”

이 관점은 윤석열 후보와 상당 부분 일치한다. 윤 후보는 지난해 12월22일 “소득이 성장하는 게 성장이라고 하는데, 소득이 성장을 이끈다는 말은 말이 안 된다. 엉터리 경제이론을 국민 생활에 적용해버리면 피해 입은 사람이 많이 나온다”라고 말했다.

김소영 교수를 비롯해 소득주도성장을 비판하는 이들은 성장은 성장대로, 분배는 분배대로 따로 정책을 집행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득주도성장은 오히려 분배정책을 통해 성장을 이루려 했기 때문에 성장은 성장대로, 분배는 분배대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석열 후보가 경제정책을 이야기할 때마다 ‘경제적 약자에 대한 복지정책’을 짝지어 발표하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윤석열 후보가 ‘성장-복지’를 쌍으로 내민다면, 이재명 후보는 성장의 짝으로 ‘공정’을 내세운다. 이때 말하는 공정은 능력주의보다는 ‘불평등 완화’에 가깝다. 위에서 언급한 〈혁신의 시작〉에는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의 글도 함께 실려 있다. 주 교수는 이재명 선대위에서 경제 분야 핵심 인물 중 하나로 꼽힌다. 주 교수는 “개인의 노력만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정도로 계층 장벽이 높은 사회에서 약자들은 자신의 역량을 키우려는 노력을 포기하게 된다. 다수의 약자들이 참여할 수 없는 특권층의 기득권 생태계 속에서 혁신은 일어나기 어렵다”라고 지적한다. 혁신을 담보하기 위해서라도 공정한 사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는데, 이는 이재명 후보가 설명하는 ‘공정경제’의 측면과 맞닿는다.

코로나19 영향으로 대면 업종과 저소득층에 매출·고용 충격이 집중되었다. 위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로 한산해진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일대.ⓒ시사IN 신선영

그렇다면 이재명 후보의 성장전략은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의 맥을 이어간다고 봐야 할까? 이재명 후보 측은 ‘소주성(소득주도성장)과는 다르다’는 기조를 강조한다. 이재명 선대위에서 전환적공정성장위원장을 맡고 있는 하준경 한양대 교수는 1월24일 “2016년 박근혜 정부 때까지만 해도 수요가 매우 부족하고, 경기침체가 심했다. 이때는 (소득주도성장이) 상당히 타당성 있었던 것 같지만, 수요만 가지고는 장기 지속 성장을 하기 쉽지 않다는 게 많은 경제학자들의 생각인 것 같다”라고 평했다.

소득주도성장은 최저임금 상승 등의 수단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구매력을 높여 경제의 총수요를 증대시키려 한다. 이렇게 총수요가 확장되면 ‘공급 측면’도 개선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예컨대 기업이 늘어난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고용을 늘리고, 설비를 확장하며, 기술을 혁신하는 선순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반면 이재명 선대위 측은 전환적 공정성장 전략에서 내세우는 정부지출과 투자가 ‘총수요 확대’보다는 ‘공급 측면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설명한다. 인프라 투자를 통해 기업이 활동할 수 있는 폭을 넓혀주고 그것이 새로운 산업의 마중물이 되기 때문이다. 하준경 교수는 이날 “지금 시대는 산업정책 경쟁의 시대다. 미국·유럽·일본 등이 디지털 전환에 투자하고 있다. 신산업 성장 초기에는 노력을 해도 성과가 작다. 원점(성장 시작 단계) 근처에서는 민간에서 노력을 해도 성과가 잘 안 나온다. 태동기에는 정부가 지원을 해줘야 한다”라며 정부 주도 투자의 필요를 강조했다.

■ 정부지출은 줄어들지 않는다

후보들의 기본 철학을 살펴보면 이재명 후보는 ‘큰 정부’를, 윤석열 후보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윤석열 후보가 성장과 쌍으로 언급하는 ‘복지지출’ 역시 만만한 규모가 아니다. 윤 후보는 출마 직후 “경제는 시장이 이끄는, 시장을 무시하지 않는 경제가 되어야 한다(지난해 8월2일)”라는 관점을 드러낸 바 있다. 정치적으로 다소 미숙한 발언을 남기던 시기에 “부정식품이라도 없는 사람은 더 싸게 먹을 수 있게 해야 한다(지난해 7월18일)”라는 발언을 한 것도 스스로의 시장 중시 관점을 강조하는 와중에 튀어나온 실언이다.

그러나 막상 대선 레이스에 돌입한 이후엔, 윤석열 후보 역시 종전에 견지하던 시장 중시 관점에서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기초생활보장 생계급여 확대, 긴급복지지원제도를 국민안심지원제도로 확대, 전기요금 인상 백지화, 코로나 피해 손실보상 50조원 등 윤 후보가 제시하는 각종 복지 공약에 필요한 자원도 결코 ‘작은 정부’라고 말하기 어려운 수준이다.

윤석열 후보는 경제성장·산업 공약을 발표할 때마다 토목 공약을 함께 내세우고 있다. 더더욱 ‘작은 정부’와 거리가 먼 행보다. 지난해 12월26일 첫 경제정책을 발표한 날에도 윤석열 후보는 오송·오창·대덕·세종·익산을 잇는 ‘중원 신산업 벨트’를 구축해 바이오·나노·에너지·식품 기술 단지를 조성하겠다고 주장했다. 경제성장·복지 공약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충청-호남에 걸친 ‘국가 주도’ 산업단지 조성 공약을 함께 제시한 것이다.

일자리 문제는 대선 공약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 아래는 경남 거제에 있는 한 조선소 모습.ⓒ시사IN 조남진

일자리를 만들 것으로 예상되는 산업단지 조성 공약을 지역마다 내밀면서 해당 지역의 표심을 잡겠다는 의도이지만, 이 같은 접근엔 두 가지 불안 요소가 있다.

첫째, 과연 기업들이 윤 후보가 원하는 대로 해당 입지를 활용할까? 첨단산업일수록 많은 인구와 유통망, 연구자, 시설, 금융 등이 집적된 대도시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양질의 일자리가 수도권으로 쏠리는 이유다. 입지와 시설만 갖춘다고 첨단산업이 지방으로 자연스럽게 배분되지는 않는다. 둘째, 이런 입지 공약이 늘어날수록 애초 윤 후보의 기조와는 달리 지역마다 국가재정 투입의 규모가 커진다. 아무리 봐도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후보가 내놓을 만한 공약이 아니다.

■ 누가 되든 ‘그 방향’으로 갈 수밖에

문재인 정부는 출범 당시부터 외친 ‘혁신 성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생산인구 감소와 고용창출력 약화 같은 우리 경제의 구조적 문제 해결을 위한 돌파구로 혁신 성장이 필요하다(기획재정부 혁신성장포털에 기재된 내용).”

이 비전이 다음 정부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진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국 사회는 혁신적인 기업을 키우고, 연구·기술 분야에 투자해야 한다는 것에 크게 거부감을 갖지 않는다. 미국 경제 미디어 ‘블룸버그’가 전 세계 60여 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하는 ‘블룸버그 혁신평가’에서도 한국은 2021년 종합 1위(연구개발 집중도 2위, 제조업 부가가치 2위 등)를 기록했다. 어느 정치인도 기술집약적인 생산성 향상이 필요하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는 시대다.

혁신성장은 문재인 정부의 전유물이 아니라, 21세기 전 세계가 지향하는 일종의 방향성이다. 그러나 누구나 접근 가능한 방향성도 아니다. 후기 산업국가 가운데 혁신성장을 만족스럽게 추진하는 국가는 많지 않다. 가령 그간 우리가 ‘선진국’이라 불렀던 프랑스, 이탈리아 등이 한국보다 기술·산업의 혁신성이 뛰어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개별 정치인이 이 방향성을 이탈하거나 역행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생산성 혁신의 이면에 발생하는 ‘불평등’은 다분히 정치의 역할을 필요로 한다. 개별 정치인의 결단이나 사회적 대타협을 요구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 유권자들이 혁신성장을 외치는 후보들에게 요구하는 잣대는 대충 다음과 같다.

첫째, 해당 후보가 지금 한국에서 진행 중인 혁신성장의 과정을 얼마나 잘 이해하고 있는가? 그는 혁신성장을 더욱 추동하기 위해 어떤 정책 수단을 동원하려 하는가?

둘째, 해당 후보는 혁신성장의 그늘에서 나타나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방안을 제시하는가?

유권자는 후보들의 관련 공약들을 비교하고, 덧대어보고, 논쟁을 붙여야 한다. 각자의 경제성장 및 산업변화에 대한 이해도와 세부 설계안도 꼼꼼하게 살펴야 한다. 그러나 대선 정국은 경제와 산업에 대한 논쟁보다 더 자극적인 정치 현안에 매몰되기 십상이다. 경제 전문 미디어인 ‘삼프로TV’의 대선후보자 대담 영상이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은 것은, 유권자들이 각 대선후보의 ‘수사’ 너머에 깔린 생각과 철학을 알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을 이야기할 수는 있다. 다만 현실 경제의 각종 딜레마에 얽힌 구체적 질문들을 접하기 전까지만 그렇다. 유권자는 후보들에게 더 많은 논쟁과 심도 깊은 토론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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