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나는 유리가 싫다. 몇 달 전 일이다. 아파트에서 산책하다가 바닥에 쓰러진 새를 하마터면 밟을 뻔했다. 손으로 쥐기도 미안한 아주 작은 새끼 새였다. 희미하게 숨을 쉬고 있어서 안고 동물병원으로 달려가는데 도중에 정신을 차린 새가 놀라 날아가버렸다. 곤두박질치듯 날아가는 새를 보며 제대로 집이나 찾아갔을지, 목숨을 건지기는 했을지,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새 아파트로 이사 온 뒤 죽은 새를 네 마리나 보았다. 새가 나동그라진 자리 위엔 어김없이 유리 가림막이 있었다. 화단을 빙 둘러친 투명한 유리가 새들을 죽인 원인이었다. 사람들은 있는지 없는지 잘 알지도 못하는 유리막 때문에 새들은 머리가 깨져 죽고 있었다. 새끼 새를 놓친 며칠 뒤엔 잘 자란 까마귀가 내 앞에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도대체 이게 뭔가. 죄 없는 생명을 죽이는 유리 하나를 어쩌지 못하는 내가 한심해서 한참을 울었다.

유리가 무서운 것은 투명해서다. 안팎의 경계를 지우는 투명함 덕에 안락한 내부의 시선은 바깥의 자유를 누린다.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치고 머리가 깨지고 몸이 찢기는 밖의 사정은 그저 풍경의 일부, 자신과는 무관한,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세상 풍경일 뿐이다. 현대는 유리를 사랑한다. 유리로 고층빌딩을 세우고 유리로 경계를 치고, 조용한 유리 안에서 말간 얼굴로 바깥세상을 구경한다. 그 유리 때문에 생명이 죽어가는 줄 모르고, 혹은 모른 체하며 풍요를 구가한다. 이것은 하루 이틀 사이의 일이 아니다. 유리천장의 존재는 일찍이 보고되었으므로. 그런데도 유리는 깨지긴커녕 천장부터 벽까지 점점 더 존재를 넓혀왔으니 이 시대가 유리를 사랑하는 것은 의도적이라 해야 마땅하다. 현대는 유리의 가시성으로 죽음을 비가시화하는 세상이 분명하다. 그 세상에서 새들보다 먼저 보이지 않는 사선(死線)에 선 것은 여자였다.

70kg 40세 남성보다 더 작고 늙고 약한 사람

이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영국의 저널리스트 캐럴라인 크리아도 페레스가 쓴 〈보이지 않는 여자들〉을 보라. 2019년 영국왕립협회 과학서적상을 수상하고 각종 매체에서 올해의 책, 올해의 경제경영서로 꼽힌 이 책에서 저자는 남성을 디폴트값(기본값)으로 삼는 사회에서 인구의 반인 여성이 어떻게 배제당하는지 1330여 개나 되는 참고자료를 통해 낱낱이 증명한다.

그에 따르면 정치제도·세금·도시계획·산업안전·노동·의료·기술·재해복구 등 인간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는 남성을 기준으로 설계되고 운영된다. 가령 사무실 표준온도는 체중 70㎏, 40세 남성의 기초대사량을 기준으로 하며, 산업재해에 관한 연구에서 표준으로 삼는 것은 25~30세의 70㎏ 남성이고, 자동차 충돌시험엔 177㎝, 76㎏의 남성 근골격을 가진 인형이 사용되며(간혹 쓰는 여성 인형은 여기서 크기만 줄인 것이다), 의학에서 인체를 대표하는 것도 남성이고, 피아노 건반도 스마트폰도 남성을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그래서 여성들은 불편을 겪는다. 불편만이 아니라 불만과 불안에 시달리다 심지어 목숨까지 위협받는다. 이를테면 남성을 기준으로 한 자동차 설계는 여성에게 멀미를 유발할 뿐 아니라 사고가 났을 때 중상 입을 확률을 남자보다 47%, 숨질 확률을 17%나 높인다. 사람을 살리는 의료 분야도 다르지 않다. 남성을 표준으로 한 의학 연구는 남성과 증상이 다른 여성의 심장마비 진단을 놓치기 일쑤이고, 남성 신체를 기준으로 한 제세동기 사용법은 여성의 생명을 위태롭게 한다. 심지어 인도보다 차로를 우선으로 하는 겨울철 제설 작업조차 여성을 위험에 빠트린다. 인도를 사용하는 인구는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많은데, 보행자가 미끄러운 눈길에 넘어져 다칠 확률은 운전자의 3배나 되고 부상의 정도도 더 심하기 때문이다.

남성이 작정하고 여성을 배제하거나 괴롭혀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니다. 그냥 남성이 인간 사회의 기본값이어서다. 남성이 곧 인간을 뜻하는 인류 사회의 오랜 전통이 불합리한 현실을 당연시하는 무지와 무념의 세상을 만든 것이다. 그 세상에서 여성 구조대원은 몸에 맞지 않는 남성용 안전장비와 씨름하다 목숨을 잃고, 쓰나미로 피해 입은 난민을 돕겠다고 나선 활동가들은 연료 없이 식재료만 주거나 부엌 없는 집을 지어준다. 이 황당한 사태에 고의나 저의는 없다. 단지 인류의 반을 생각하지 않아서, 여성에게 묻지 않고 여성의 말을 듣지 않아서 생긴 일일 뿐이다.

먹고살기도 힘든데 젠더니 성인지 감수성이 웬 말이며 여성가족부가 무슨 소용이냐고들 한다. 다들 힘든데 여성만을 위한 정책을 주장한다면 볼멘소리가 나올 만하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면 성인지 감수성이란 한쪽으로 기울어진 세상을 바로잡는 정의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상이 제대로 돌아가면 모두에게 이익이란 것도 알게 된다. 단적인 예로 제설 작업에 젠더 관점을 도입해 인도의 눈을 먼저 치우면 도로 관리 비용의 두 배인 보행자 사고 비용을 줄일 수 있고, 풀타임으로 일하는 여성 고용이 늘면 세수가 늘고 사회보장비는 감소해 GDP가 증가한다. 세금제도 또한 젠더적 관점에서 개혁하면 소비세 같은 간접세 비중이 줄어 조세 형평성을 높인다. 경제만 나아지는 게 아니라 정치적 안정에도 도움이 된다. 평화협상 과정에 여성이 참여했을 때 그 협정이 더 오래 유지되더라는 게 그 증거다.

남성을 기본값으로 하는 세상에서 무탈하게 살아온 사람은 (남성이든 여성이든) 자신이 세상을 안다고 생각한다. 안다는 오만은 편견을 낳고 편견은 차별을 낳고 차별은 지옥 같은 세상을 만든다. 이 악순환을 끊는 첫걸음으로, 70㎏의 젊고 건강한 남성이 기준이 아니라 더 작고 늙고 약한 사람이 표준인 사회를 상상해보라. 그 사회에서 수많은 사람이 누릴 평화를 상상해보라. 이제는 그런 세상, 그런 정치를 꿈꿀 때도 되지 않았나.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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