팬데믹 3년 차, 가족과의 접촉을 최소화하고 비교적 조용하게 보내는 명절에 익숙해진 것 같다. 그럼에도 주말 낀 명절 연휴 5일은 무척 긴 시간이다. 그 시간을 달래줄 ‘방구석 콘텐츠’를 소개한다. 대중문화, 음악, 게임 분야 평론가들과 〈시사IN〉 문화팀이 한국과 미국의 드라마를 비롯해 자연·음악 다큐멘터리, 영화, 웹툰, 게임 등 다양한 취향의 즐길 거리를 준비했다.

7년간 7개 시즌이 만들어진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스〉.ⓒNetflix 제공

여기 ‘싸우는 가족들’ 모였다


〈길모어 걸스〉 〈미스 리틀 선샤인〉

〈시사IN〉에 ‘반려인의 오후’를 연재하는 정우열 작가는 얼마 전 보내온 글에서 명절에 친척 어른을 울린 경험에 대해 말했다. 작가의 채식 생활이 화두에 오르며 발생한 비극이었는데 글을 읽으며 주제나 울리는 상대가 다를 뿐 다른 가정에서도 반복되는 풍경이 아닐까 생각했다. 1. 사람들이 모이고 2. 세대가 다양하며 3. 유구한 집안의 속사정을 공유하고 있다. 술까지 더해지면 싸움이 발생할 완벽한 조건이 아닐까. 명절 콘텐츠로 ‘싸우는 가족들’이 빠질 수 없다.

미국 드라마 〈길모어 걸스〉에도 여러 가족이 등장한다. 일단 길모어 가족. 명문가의 외동딸로 16세에 싱글맘이 된 뒤 독립해 살아가는 로렐라이와 그의 명석한 10대 딸 로리의 삶이 스타즈 할로 마을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매일같이 들르는 루크의 카페, 일터인 모텔, 마을 교차로와 집을 오가며 두 사람은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대체로 별것 아닌 주제들로 채워지지만 이 드라마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이 바로 마을을 가로지르며 나누는 풍부한 대화다.

로렐라이는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를 구사해 주변의 공기를 자기 편으로 만든다. 자학에 가까운 유머든, 넋을 잃고 웃게 만드는 유머든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타이밍이 더없이 적절하다. 다만 모녀의 대화는 간혹 다툼으로 이어지는데, 서로를 깊이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가장 아플 만한 곳도 잘 알고 있어서 치명적이다. 자주 싸우지만 불안하지 않다. 금세 화해할 테니까. 예외가 있다면 로렐라이가 본가의 부모와 싸울 때다. 이때는 조마조마하다. 10대에 임신한 딸이 스스로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하는 부모와 그런 부모를 견딜 수 없어 독립한 딸의 관계는… 짐작한 대로다.

로리의 ‘절친’인 레인 킴의 한국계 가족도 흥미롭다. 그의 어머니는 늘 화가 나 있는 것 같은 인상이고, 건강식에 집착하며, 록을 악마의 음악이라고 여긴다. “한국인에겐 (남편감으로) 의사가 최고야”라는 대사에선 실소가 나왔는데, 그런 식의 정형화에도 너그러워질 수 있는 건 그 미간 찌푸린 엄마가 시즌을 거듭하며 변해가기 때문이다. ‘길모어 세계’에서는 10대 소녀도, 어른도 모두 성장한다. 2000년에 시작해 7년간 7개 시즌이 만들어진 이 드라마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인생 드라마’다. 2016년에는 마지막 시즌으로부터 9년 뒤의 이야기를 그린 〈길모어 걸스:한 해의 스케치〉가 나와 반가운 얼굴의 근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가족영화로 꼽는 〈미스 리틀 선샤인〉도 빼놓을 수 없다. 극 중 가족은 루저의 집합체다. 파산 직전의 아버지, 마약중독자 할아버지, 전투기 조종사라는 꿈을 이룰 때까지 묵언을 선언한 오빠, 애인에게 차인 후 자살을 시도했다 살아난 성소수자 삼촌, 배가 나왔지만 미인대회에 관심을 보이는 올리브. 어린이 미인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올리브와 가족들이 고물 버스를 타고 여행길에 오르며 겪는 이야기다. 패배자의 얼굴을 한 가족들이 장거리 버스 여행에서 가장 손쉽게 시도할 수 있는 건 당연히, 싸움이다.

유튜브 영화 소개 페이지에 올라오는 요약본 말고 처음부터 끝까지 보길 권한다. 긴 호흡으로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를 따라가야만 얻게 되는 ‘빛나는 순간’이 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대회의 참가자들은 어른 대회에서처럼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실패하기 싫다며 두려워하는 올리브에게 할아버지는 말한다. “진짜 실패자는 지는 게 두려워서 시도조차 안 하는 사람이야.” 뻔한 말 같지만 영화 속에 담기면 그렇지 않다. 이 지면에서 소개하는 콘텐츠 중 가장 러닝타임이 짧다. 연휴의 마지막 날 밤이라면, 아직 이 한 편은 가능하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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