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타프(왼쪽)가 지질학과에 입학했을 때만 해도, 지도를 만드는 것은 남자들의 일로 취급받았다.ⓒWikipedia

“여자가 배에 오르면 부정을 타서 안 돼.” 마리 타프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여자가 배를 타면 바다의 신을 노하게 한다거나 부정을 탄다는 이야기는 전 세계적으로 흔한 미신이었다. 하지만 대서양 바닥의 지형을 조사해 지도를 만들어낸 해양지질학자가, 그저 성별 때문에 탐사선에 탈 수 없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지도 제작자인 마리 타프는 1953년 북대서양을 세로로 길게 가로지르는 거대한 해저산맥이 존재하며 그 가운데에 해양지진을 비롯한 활발한 지질 활동이 일어나는 깊은 열곡(두 단층 사이에 생긴 골짜기)이 있음을 발견했다. 마리의 발견은 그때까지 비주류였던 대륙이동설의 증거가 되었고 판구조론의 기반이 되었다. 그럼에도 마리 타프는 여자라는 이유로 탐사선을 탈 수 없었다. 마리가 마침내 탐사선에 오른 것은 1968년, 라몬 연구소에서 해고된 뒤의 일이었다.

1920년 7월30일, 마리 타프는 미국 농무부 토양국의 측량기사인 윌리엄 타프의 딸로 태어났다. 마리는 젊었을 때 교사였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교사를 지망했고 오하이오 대학에서 영어와 음악, 그리고 부전공 네 개를 이수했다.

당시 지도를 만드는 것은 남자들의 일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변했다.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한 뒤 많은 젊은 남자들이 군대에 입대한 것이다. 대학 교육을 받은 젊은 남자가 부족해지자 대학에서는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다. 미시간 대학 지질학과는 학위 취득 후 석유산업체에서 일할 것을 조건으로 여성의 입학을 허가했는데 마리 타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마리는 열심히 공부했지만 석유회사의 지질학자로 일하는 것은 만족스럽지 않았다. 여성 지질학자들의 업무는 어디까지나 사무실에서의 잡일로 국한되었고 현장에 가거나 전문적인 일을 배울 수는 없었다. 마리는 일단 석유회사에 다니면서 털사 대학 수학과에 등록해 학사학위를 추가로 받았다.

이후 마리는 미국 자연사박물관과 컬럼비아 대학을 거쳐 라몬 지질학연구소의 마리우스 어윙을 도와 지도 제작에 나섰다. 2차 세계대전 중 어윙은 해군용 음파탐지기를 이용하여 24시간 수심을 측정하는 방법을 개발하고 이 음파 기록을 10만 분의 1 축척으로 그리는 표준 시스템을 만들었다. 라몬 연구소에 들어간 마리 타프와 헤스터 하링이 젊은 학자인 브루스 히젠과 함께 맡은 일은, 어윙의 탐사선이나 미 해군의 기록 등을 바탕으로 실제 해저지형의 윤곽을 그려내는 것이었다.

이 일은 쉽지 않았다. 배는 예정대로 최단거리를 따라 직선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때로는 날씨 때문에, 때로는 보급품 때문에 이동경로가 마구 꼬이기 일쑤였다. 마리는 인내심을 갖고 이 기록들을 배열하고 조합해 마침내 북대서양에서 거의 평행하게 놓인 여섯 개의 횡단 프로필을 만들어냈다.

과연 북대서양 한복판에는 산맥이 있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마리는 해저산맥의 한가운데에 깊은 열곡들이 파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리는 지구 깊숙한 곳에서 새로운 물질들이 형성되어 열곡을 따라 밀며 올라오고, 이 힘으로 대서양 한가운데의 해저산맥을 양쪽으로 나누고 밀어낸다고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대륙이동설을 뒷받침할 가설이 만들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륙이동설은 주류의 학설이 아니었다. 마리와 함께 일하던 브루스 히젠 역시 1950년대 카레이가 주장한 확장 지구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 히젠은 마리의 가설을 듣고 바로 무시했다. 하지만 히젠은 곧 해저지진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마리의 가설이 옳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해저지진이 일어난 진앙지가 마리가 발견한 열곡과 겹쳐졌던 것이다. 마리와 히젠은 아직 해저 지도를 그리지 않은 곳에서의 해저지진 진앙지를 찾은 뒤 이 인근 해역의 해저지형을 탐사했다. 그리고 곧 동아프리카의 해저 열곡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리 타프의 해저지형도.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Lamont-Doherty 지구천문대

마리는 다시, 1925년 독일에서 탐사한 남대서양의 데이터나 미 해군 원정대가 동태평양을 오간 데이터를 바탕으로 이와 같은 열곡들이 전 세계 바다에 분포하며, 이것이 지진의 진앙지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마침내 1956년, 브루스 히젠은 전 지구에 걸쳐 열곡이 나타난 해양 산맥들이 존재하며 이들 해저 열곡을 따라 해양지진이 일어난다는 것을 발표했다. 하지만 당시의 지질학자들, 특히 어윙 박사는 여전히 대륙이동설을 믿지 않았다.

마리는 어떻게든 해저 열곡의 사진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랑스의 생태학자이자 해양 사진작가인 자크 쿠스토가 그 일을 도왔다. 쿠스토는 영화 촬영용 카메라를 매단 썰매를 해저산맥으로 내려보냈다. 1959년, 뉴욕에서 열린 제1차 국제 해양회의에서 마리가 발견한 저 해저 열곡이 마침내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뒤늦게 인정받은 마리 타프의 업적

마리 타프와 브루스 히젠의 작업 결과물인 북대서양 지리 지도는 1957년에 출판되었다. 하지만 이 무렵 대서양 해저산맥과 열곡들에 대한 연구자로서 공로를 인정받은 사람은 히젠이었다. 마리 타프라는 이름은 1963년까지 발표된 판구조론 관련 논문에 등장하지 않았다. 게다가 냉전 시기였던지라 미국 정부는 해양 지도를 소련에서 잠수함 작전에 사용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지도 출판을 금지했다.

개인적인 어려움도 있었다. 라몬 연구소의 어윙 박사는 브루스 히젠과 갈등을 빚으면서 히젠이 탐사선에 타거나 라몬 연구소의 데이터에 접근하는 것을 막고 분풀이하듯 마리를 해고했다. 하지만 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히젠의 연구를 도우며 지도 제작을 계속했다. 내셔널지오그래픽 협회는 마리에게 인도양의 해저 지도를 의뢰했고, 마리와 히젠은 풍경화가인 하인리히 베란과 함께 인도양의 해저지형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지도를 만들었다. 이후 해군 연구실의 지원을 받아 전 세계 해저를 보여주는 지도 제작에 나섰다. 마침내 1977년, 마리 타프는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세계의 해저〉라는 제목으로 해저 지도를 출판했다. 그의 오랜 연구 동반자인 브루스 히젠이 탐험선에서 심장마비를 일으켜 세상을 떠나고 몇 달 뒤의 일이었다.

이후 마리 타프는 브루스 히젠의 뒤를 이어 컬럼비아 대학에서 교수가 되었고 이후 이 시기의 수많은 여성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뒤늦게 업적을 인정받고 정당한 명예를 누리게 된다. 1996년 마리 타프는 여성 지리학자 협회의 공로상을 받았으며 1997년에는 미국 의회 도서관으로부터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지도 제작자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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