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켈 그림

팬데믹으로 발이 묶인 사람은 갈 수 없는 나라들로 냉장고는 잘도 수출되었다. 미국, 캐나다처럼 익숙한 국가부터 에스토니아 같은 낯선 국가까지 목적지도 다양했다. 냉장고 생산공장의 노동자인 김연주씨(가명·29)로서는 가본 적 없고, 가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는 나라들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시작되고 얼마 후 물량이 늘어나며 탄력근무제가 시행됐다. 애초 8시간이었던 근무는 10~12시간까지 늘어났다. 팬데믹으로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어진 사람들이 인테리어를 새로 하거나 가전제품을 바꾸면서 물량이 늘었다고 들었다. 김연주씨는 컨베이어벨트로 쉼 없이 들이닥치는 냉장고에 바코드를 찍으며 코로나19로 집 안에 머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컨베이어벨트가 멈추지 않으면 사람도 멈추지 못했다. 컨베이어벨트는 2시간에 한 번씩 10분간만 멈췄다. 중간에 화장실에 가고 싶으면 조장이나 반장에게 전화를 해야 했다. 그마저도 여자 화장실은 네 칸뿐이었다. 세 번째 칸은 김연주씨가 일했던 2년 내내 고장 나 있었다. 여성 노동자 대부분은 방광염과 질염을 달고 살았다. “나가기 전에 화장실 한번 고쳐보려고 여기저기 얘기했는데, 결국 못 고쳤어요.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려요. 21세기 대기업 공장이 이런 상황이라는 게 믿어지세요? 1980년대 이야기 같죠?”

김연주씨가 일했던 공장은 1~8호봉이 동일한 임금을 받고 9호봉부터 임금이 오르지만, 9호봉을 받는 여성들은 드물었다. 공장은 육아휴직으로 떠난 여성들이 돌아올 자리를 남겨두지 않았다. “결혼하고 애 낳으면 다 나가는” 정규직 ‘여자 아이들’은 대개가 열아홉 아니면 스무 살이었다. 대부분 여상을 졸업했다. 대졸 계약직이던 김연주씨는 2년 동안 2~3개월 단위로 열 번쯤 계약서를 썼다. 기간제법에 따라 채용 후 2년이 지나면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해야 했다. 그 이유로 열한 번째 계약서는 쓰지 못했다.

김연주씨는 최근 또 다른 계약직으로 일터를 옮겼다. 이번에는 물류센터다. 공장보다 임금은 낮고 노동강도는 높았다. 하루 절반 이상을 선 채로 컨베이어벨트 위 물건을 ‘쳐내면서’ 잔업과 특근으로 쌓아 올린 월급은 각종 청년정책 지원 기준을 초과하기 일쑤였다. 정책 대상자가 되려면 “막 바닥을 기어 다니는, 막 이렇게 기생충처럼 살아야”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김연주씨는 말했다.

한국 노동시장은 ‘1차 노동시장’과 ‘2차 노동시장’으로 나뉜다. 위는 한 구직 박람회 모습. ⓒ연합뉴스

노동시장에서 성별은 또 다른 ‘페널티’

한국 노동시장은 임금이 높고 고용 안정성이 높은 대기업·정규직 위주의 ‘1차 노동시장’과 그렇지 못한 중소기업·비정규직 위주의 ‘2차 노동시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1차 노동시장에 속한 노동자는 전체 임금노동자의 약 10%에 불과하지만, 노동조건 차이는 매우 크다. 1차 노동시장에 속한 노동자의 평균임금은 2차 노동시장에 속한 노동자에 비해 약 1.7배 높고, 평균 근속연수도 2배 이상 길다(통계청, 2018). 이 수치가 ‘평균’임을 감안하면 현실에서 체감하는 차이는 더 클 가능성이 높다.

청년 고용률이 낮고, 이들의 첫 일자리 이직률이 높은 원인도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학교 문을 나서는 대다수 청년들을 기다리는 건 거대하고 불안정한 2차 노동시장이다. 통계청이 2021년 12월10일 발표한 ‘한국의 사회동향’에 따르면, 이 연도에 청년들의 첫 일자리가 계약직인 비율은 47.1%였다. 대부분의 청년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는 2차 노동시장에 있지만, 김연주씨 사례처럼 이들이 맞닥뜨린 노동조건은 좀처럼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여성에게 성별은 또 다른 ‘페널티’로 작용한다.

한국노동연구원이 2019~2020년에 걸쳐 진행한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청년층 일자리(안주엽·오선정·최세림)’ 연구에서도 성별은 주요 검토 사항 중 하나였다. 연구 결과 노동시장 진입 이전의 인적자본 요인을 통제한 뒤에도 1차 노동시장에 속할 확률은 남성이 20%포인트 높게 나왔는데, 연구자들은 이를 ‘설명되지 않는 격차’로 판단했다. 통계적 이유를 찾지 못했다는 의미로, 짐작해볼 수 있을 뿐이다. “직간접적인 채용 성차별, 기타 관측되지 않는 성별 특성 차이가 중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1차 노동시장에 어렵게 진입했더라도 여성은 남성에 비해 ‘이탈’할 확률이 약 1.8배 높았다. 이러한 차이는 필연적으로 임금 차이로 이어진다. 연구자들은 청년을 뭉뚱그리는 대신, 성별을 고려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시사IN〉과 한국리서치는 2021년 7월30일부터 8월2일까지 나흘 동안 20대 여성의 젠더, 정치, 사회적 개방성과 연대 의식 등을 묻는 대규모 웹조사를 진행했다. 20대 여성 70.9%가 “남녀 임금격차는 여성에게 불공정하다”라고 답했다. “여성은 가부장제와 성차별 때문에 남성보다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다”라고 응답한 이들도 73.7%였다(〈시사IN〉 제728호 “약자는 아니지만 우리는 차별받고 있다” 기사 참조).

노동시장에서 경험하는 차별은 한 시점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전 생애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특히 OECD가 관련 통계를 작성해 발표한 이래 한 번도 1위 자리에서 내려온 적 없는 한국의 성별 임금격차는 여러 의미에서 ‘문제적’이다. 한국 성별 임금격차는 2019년 기준 32.5%로, OECD 평균 12.5%와 비교하면 2.5배가 넘는다. 여성가족부가 2021년 9월 2149개 상장기업의 성별 임금격차를 조사한 결과는 그보다 높은 35.9%에 달했다. 이른바 ‘좋은 일자리’에서도 격차가 컸다.

근속연수와 임금은 높은 상관관계를 보인다. 그 때문에 성별 임금격차를 일으키는 ‘범인’으로 가장 자주 지목되는 것이 고용단절이다. 20대 후반까지 높아지던 여성 경제활동 참가율은 임신-출산-육아가 이어지는 30대 중후반에 급락했다가 50대 들어 다시 높아지고 이후 하락세를 그린다. 이런 연령대별 고용률을 그래프로 그리면 M자형 곡선이 나오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모양이라 ‘한국형 곡선’이라고도 불린다. 여성 고용률을 대졸 이상 고학력층으로 떼어보면 이번에도 여타 선진국에서는 보기 힘든 L자형 곡선이 그려진다. 한번 일자리를 떠나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의미다. 고용단절 이후 얻을 수 있는 일자리가 그만큼 제한적이고 열악한 것으로 분석된다.

0명대 합계출산율은 이런 상황에 대한 ‘조용한 대응’이다. 이는 한국여성노동자회가 2021년 8월30일부터 9월24일까지 ‘1990년대생’ ‘여성’ ‘노동자’ 대상으로 진행한 실태조사 결과에도 드러난다. 실태조사 총 응답자는 6188명이었으며 이 중 유효 응답자는 4774명이었다. 분석 대상은 2차 노동시장에 속했거나, 속한 적 있는 이들로 추렸다. 이들이 실제로 ‘다수’이기 때문이다. 전체 질문 문항이 50개가 넘었고 노동 이력, 고용형태 등을 다 써야 하는 복잡한 설문이었음을 고려하면 유효 응답자 수가 이례적으로 많다. 홍수경 서울여성노동자회 심리정서지원단장은 “뉴스와 드라마에서 나오는 이야기 어디에도 ‘내 이야기가 없다’는 절망과 열망이 반영된 것”으로 짐작했다.

2021년 11월16일 발표된 한국여성노동자회의 실태조사 결과를 보면 여성 고용단절의 원인을 임신·출산·육아로만 한정 지을 수 없음이 드러난다. 조사에 응한 이들 중 45%가 이직을 경험했는데, 이유로 계약기간 만료(30.3%)에 이어 해고(7.9%)가 그다음으로 많았다. 노동시간, 작업환경, 임금 등 노동조건 불만족 및 성차별적인 조직문화, 전문성을 키우기 힘든 구조 등을 이유로 자발적으로 퇴사를 경험한 이들 역시 87%에 달했다. 이는 ‘모성보호’에만 치중한 그동안의 고용단절 대책이 왜 해결책이 되지 못했는지를 역설한다. 불안정한 고용환경 전반의 문제가 고용단절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여성 청년들도 꿈을 꾼다. 여성 청년에게도 미래가 필요하다. 하지만 여성 청년의 문제는 청년이 아닌 ‘여성’ 문제로 뭉뚱그려진다. 장지연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인구 고령화에 대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잖아요. 정년 연장 이슈는 세대 갈등의 주요 이슈고요. 그런데 그게 주로 누구의 싸움인지 잘 보세요. 50대 남성과 20대 남성의 싸움이더라고요. 우리 사회는 이 두 그룹의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면 청년 노동정책에 ‘여성’ 청년의 문제와 자리는 어디 있죠?”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오른쪽)는 임금공시제를 평등의 ‘입구’를 여는 제도라고 말했다. ⓒ시사IN 이명익

성별 임금격차 가리는 ‘임금의 불투명성’

‘향후 10년 내에 누구와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주의 깊게 볼 필요가 있다. 답변은 임금수준에 따라 두드러지게 차이를 보였다. 임금이 높을수록 법적 배우자 또는 자녀와 살고 싶다는 비율이 높았고, 임금이 낮을수록 ‘반려동물 또는 혼자 살고 싶다’는 비율이 높아졌다. 이승윤 교수(중앙대 사회복지학과, 청년정책조정위원회 부위원장)는 “경제적 기반이 약하고 미래에 대한 불안정성이 높을 경우 가족 구성에 대한 희망이 있어도 구조적인 이유로 비혼이 권유된 것이 아닌지 고민해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정상가족’은 한국 사회에서 이미 계급적·신분적 상황을 드러내는 지표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이승윤 교수는 여성 청년 내부에서도 발견되는 계층화와 계급구조를 앞으로 구체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도 말했다. ‘성별을 구분해 대응할 경우 잃게 되는 동력은 없을지’에 대해 고민하는 일은 전체 청년 노동자들의 더 나은 노동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도 중요한 질문이다.

실태조사에 참여한 이들이 지적한 문제 중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임금의 불투명성이다. 실제 현장에서 성별 임금격차는 체감하기 어렵다. 통계로 실태를 가늠할 뿐이다. 여전히 많은 사업장에서 임금이 ‘비밀’이기 때문이다. 임금공시제가 성별 임금격차를 줄이는 대책으로 논의되는 이유다.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는 임금공시제를 평등의 ‘입구’를 여는 제도라고 말했다. “각자 받는 임금이 투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통계상으로는 30% 이상 차이가 나고 있어요. 임금공시제는 차별을 인지할 수 있는 입구를 여는 제도입니다. 격차가 있다는 걸 드러내는 거죠. 격차가 다 차별은 아니잖아요. 차별적 요소를 분석하고, 그걸 제거하는 일까지 가는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임금공시제 도입을 비롯해 성별 임금격차 해소를 위한 아이슬란드의 고민과 실천은 하나의 힌트가 될 수 있다. 지난 40년간 이들에게 성평등은 ‘성장’의 다른 말이었다. 특히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서 젠더 정책이 강화됐다. 이는 아이슬란드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통과한 방법이기도 했다(오로라보다 눈에 띄는 이 나라의 ‘성평등’ 기사 참조). 김현미 연세대 교수(문화인류학)는 〈페미니스트 라이프스타일〉(반비, 2021)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핵심은 미래를 아무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까닭은 현재에 어떤 공동체가 구성되느냐에 따라서 미래의 성격과 모습이 달라진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더 나은 미래를 가질 자격이 있다.

기자명 이은기·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yieu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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