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기적의 도서관’에서 아이들이 책을 읽고 있다. ⓒ시사IN 자료

사례 하나. 2020년 8월, 광복절이 토요일이라서 월요일이 대체공휴일로 정해졌다. ‘사흘 연휴’라는 뉴스가 나오자 ‘사흘’이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올랐다. 3일인데 왜 사(4)흘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례 둘. 고2 수업 시간, 교사가 영화 〈기생충〉의 가제가 ‘데칼코마니’였다는 걸 설명하며 ‘가제’의 의미를 묻자 학생들이 ‘랍스터’라고 답했다. 중학교 영어 시간에 베이비시터(baby sitter)와 캐셔(cashier)의 의미가 각각 보모, 출납원이라는 걸 설명하다 사실상 국어 시간(‘보모’와 ‘출납원’의 의미를 풀이하는)이 되었다. 2021년 방영된 EBS 〈당신의 문해력〉에 등장하는 장면이다.

사례 셋. 2022년 수능 국어 영역에 헤겔의 변증법이 등장했다. “직관의 외면성 및 예술의 객관성의 본질은 무엇보다도 감각적 지각성이다” 따위의 내용이 담긴 지문의 난이도가 화제였다. 올해 국어 만점자는 28명에 그쳤다.

세 가지 사례에서 공통적으로 추출되는 키워드는 무엇일까? ‘문해력’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요즘 아이들의 문해력이 심각하다’는 얘기가 심심치 않게 들린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사용한 ‘무운을 빈다’는 말의 무운을 ‘운이 없는 것’으로 해석하는 현상을 두고 한자 의무교육 중단의 폐해라고 지적한 신문도 있었다. 글자를 읽지 못하는 문맹률은 낮지만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을 뜻하는 문해력이 심각한 위기라는 진단이 나왔다. 우려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부의 기초체력이 되는 초기 문해력을 초등 저학년 때 완성하지 않으면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 격차가 커지고 결국 개인의 건강, 미래 소득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게 요즘 ‘문해력 담론’의 서사다. 공부 머리의 핵심인 문해력이 인생 전반의 경쟁력이자 ‘권력’이 되었다.

공통적으로 조기 개입, 읽기 교육의 강화를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에 대한 부담은 팬데믹 시기, 가뜩이나 움츠러든 공교육이 아니라 가정과 사교육 시장으로 기운다. 불안한 학부모들은 관련 서적을 구입하고 문해력 향상 독서 목록을 챙긴다. 한 과학 학원은 수업 전 독서 시간을 별도로 둔다며 문해력 마케팅에 나섰다. 국어든 수학이든 과학이든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해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즘 아이들은 정말 문해력이 떨어진 걸까. 조금 다른 시각도 있다. 김성우 리터러시 연구자와 엄기호 문화 연구자는 공동 저작인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에서 요즘 아이들이 늘 접하는 게 동영상과 이미지인데 (시험 등) 평가 체제의 근간은 텍스트라는 걸 지적하며 문해력 저하라는 진단이 성인 중심의 시각이라고 설명했다(그냥 성인이 아니라 글 중심으로 사고하는 86세대라고 부연한다). 위기라는 시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글의 세계에 속한 사람에게 이 변동은 위기일 테지만 변화의 과정에서 본다면 위기가 아니라 변동이 맞겠다.’ 앞의 사례에도 반전이 있다. 수능 평가원장 출신 교수가 올해 국어 영역을 풀고 3등급을 받아 화제가 됐다. 문제 푸는 과정을 영상에 담아 유튜브에 올렸다는 점도 의미심장하다. 헤겔이 와도 못 풀 것 같다고 말하는 현직 교수의 난감한 성적표도 성인 문해력 저하 현상일까?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만난 이유는, 그가 문해력 열풍을 주도한 EBS 〈당신의 문해력〉에 전문가 패널로 출연했을 뿐 아니라 곧 방송될 〈성인을 위한 문해력 수업〉에도 자문하는 등 대중과 밀접하게 소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양대 대학원 러닝사이언스학과 리터러시 전공 교수이기도 한 그는 미국에서 15년간 읽기와 리터러시를 연구했다.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예비 영어 교사를 가르쳤고, 미국 고등학교 현장에서 지역 사회(삶)와 연계된 리터러시 실험을 했다. 최근 〈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를 출간한 그는 읽고 쓰기가 (개인 삶의 경쟁력에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

조 교수는 문해력 대신 리터러시라는 표현을 쓴다. 리터러시란, ‘정확한 낱글자 읽기가 복잡다단한 세상 읽기로 전환되는 과정에 기여하는, 매우 정밀하고 섬세한 지적·정서적·사회적 의미 구성 과정과 실천의 스펙트럼을 포괄’하는 의미다. ‘세상을 바꾸는 리터러시’를 위해서는 읽고 쓰는 사람이 새로운 역량과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하는 그가 자주 사용한 단어는 공동체였다. 리터러시는 ‘사흘’의 의미를 모르는 아이들이 아니라 공동체가 함께 안아야 할 숙제다.

조병영 한양대 국어교육과 교수(위)는 ‘읽고 쓰기가 우리 사회를 바꿀 수 있다’고 말한다.ⓒ시사IN 신선영

최근 문해력 저하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많다.

어휘력이 약하고, 긴 글을 못 읽고 맥락 파악을 잘 못하는 현상이 보이고 있는데 직접적으로 그 사실을 뒷받침할 수 있는 데이터는 없다. 징후들은 있다. 왜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지 따져봐야 하는데, 나는 일단 아이들의 문해력이 떨어졌다고 얘기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읽고 쓰는 경험에서 세대 간 격차가 상당히 커진 것은 맞는 것 같다. 예전보다 세상이 빨리 변하기 때문에 모든 분야에서 격차가 커졌다. 고대 문자가 발견된 게 약 5000년 전이고 활자 인쇄술을 쓴 게 500~600년 전이다. 디지털 기술이 삶에 들어오게 된 지는 불과 50여 년밖에 안 된다. 학생들이 읽고 쓰는 텍스트의 종류와 맥락도 상당히 달라졌다. 기본적인 리터러시 환경이 달라진 셈이다. 그런데 학교 공간에서 다루는 텍스트는 잘 바뀌지 않는다. 잘 바뀌지 않는 학교 공간에 어울리지 않는 어휘들을 아이들이 쓰고 있다. 언어의 재료가 어휘인데 의사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데 필요한 언어의 재료가 달라져버린 것이다. 학생들이 공부에 필요한 용어는 잘 몰라도 게임 용어는 굉장히 잘 안다. 그중에는 어려운 말도 많다. 그러나 어른의 관점, 전통적인 학교의 관점에서만 보면 어휘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리터러시 환경의 변화를 체감할 때는?

교사를 상대로 연수할 때 교실에서 책 한 권 읽는 과제를 내주기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길고 어려워서 학생들이 싫어한다는 것이다. 아주 전통적인 개념, 즉 글을 읽고 이해하고 의미를 파악하는 좁은 범위로 문해력을 이해하면 지금의 현상은 너무 문제적이다. 해결책이 별로 없다. 의미를 넓힐 필요가 있다.

그래서 문해력이 아니라 리터러시인가?

2020년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문해력이 대중과 미디어의 관심을 많이 받는 때였다. 그 시점에 쓰이는 문해력이라는 단어의 개념이 너무 좁다고 생각했다. 문해력에 관심을 가진 분들은 주로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청소년들의 부모이다. 결국 한국 환경에서는 논의가 선행학습이나 사교육으로 이어진다. 엄마가 스트레스를 받으며 집에서 체계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하는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상에 주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리터러시는 문해력과 같은 말이긴 하지만 스펙트럼이 훨씬 넓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상징기호인 문자를 깨치는 것부터 시작해 비판적으로 사회적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까지 포괄한다. 학교 성적이나 개인의 역량에 국한하는 주제가 아니다. 아이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을 공동체 단위에서 했으면 하는 의도에서 리터러시란 용어를 사용한다.

수능에서도 어떤 징후를 느꼈나?

수능이 너무 어려워졌다. 그걸 갖고 문해력이 없다고 하면 안 된다. 애초 수능은 문해력 측정 시험이 아니다. 언어를 가지고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측정해야 하는 시험이다. 70% 이상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점수를 받아야 하는 시험인 거다. 나머지 30%에서 변별력을 가져야 하는데, 지금은 지문으로 기본 정보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들어놓아 공부 잘하는 학생만을 위한 시험이 되었다. 요즘 고교 중간고사나 기말고사 등도 읽고 문제를 푼다기보다 교과서를 외워 정답 하나를 찾게 만드는 시험이다. 해석이나 판단의 여지도 없다. 교사가 좋은 수업을 하려고 긴 글을 가져와서 읽히면 아이들이 왜 이렇게 긴 글을 읽어야 하냐고 반응한다. 악순환인 것 같다.

문해력을 설명할 때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PISA·피사)가 자주 언급된다. OECD 회원국 등 80여 개 나라의 만 15세 학생을 대상으로 읽기·수학·과학 능력을 평가하는 제도다. 2018년 평가가 가장 최근 것이다. 조병영 교수는 지난 20여 년, 한국의 읽기 성취도가 지속적으로 저하되어왔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피사는 점수에 따라 읽기 수준을 여섯 개로 나누는데 1에서 6으로 숫자가 높아질수록 고차원적 읽기를 수행한다는 의미다. 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은 상위권 학생들의 비율이 정체되어 있고 하위권 학생들의 비율이 큰 폭으로 증가해왔다(오른쪽 〈그림〉 참조). 수준 1 또는 그 이하에 놓인 아이들이 2000년 5.7%에서 2018년 15.1%로 증가했다. 아이들 간 리터러시 격차가 급격히 벌어졌다는 의미다. 지난해 12월31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발표한 ‘OECD 국제 학업성취도 평가 연구보고서’를 보면 한국 학생들은 여러 다른 저자가 쓴 복합적 유형의 자료를 읽고 그걸 평가해 자신의 의견을 내거나 실생활의 문제 상황에 적용하는 문항에 취약했다.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른 자녀의 학습 격차도 크다는 분석이 나왔다.

한국 학생들의 리터러시 격차에 주목했는데.

한국은 여전히 잘 읽는 나라에 속하지만 점수가 유의미하게 떨어져왔다. 잘 못 읽는 아이들 수가 많아졌다. 글을 읽고 정보만 파악하거나 그보다 이해를 못하는 아이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의미다. 미국 연구를 보면 계층, 부모의 교육수준과 관계가 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학생들의 문해력이 떨어진다고 얘기할 때 ‘요즘 애들이 못 읽어’라고만 얘기하는 건 생산적인 관점이 아니다. 실제로는 나이 든 어르신이 제일 못 읽는다. 문해력이 떨어지는 문제보다 아이들이 읽을 필요성을 못 느끼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학교 시험이나 취업을 위한 테스트가 아닌 이상 읽기에 대한 필요성을 잘 못 느낀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문제다.

읽기 성취도가 저하되는 원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첫 번째 원인은 학교에 있다. 어느 순간부터 읽지를 않는다. 읽기 자체보다 교과서의 글을 떼는 게 목적이 되는 거다. 아이들이 문제의식을 가지고 읽는 기회 자체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기회가 없으면 배울 수 없다. 기본이나 기본 이하 학습자들의 경우엔 특별한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들 몸이 똑같이 자라지 않듯 읽기도 마찬가지다. 어떤 아이에게는 그런 기회가 많고 지원도 많다. 그러면 계속해서 더 많은 기회를 찾아나가며 성장하는 반면, 어떤 아이들에겐 기회 자체가 없다. 격차가 났을 때 도와줄 수 있는 곳이 학교인데 지금은 별로 관심이 없다.

격차를 줄이려는 노력이 있다면?

문해력 전담 교사들이 있긴 하다. 주로 지방 교육청에서 관심을 가진다.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다중언어 학습자라고 부르는데 현재 다문화 자녀(출생아 기준) 비율이 6% 정도다. 지방의 경우 한 교실에 20%인 곳도 있다. 굉장히 많은 수다. 가정에서부터 읽기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동일한 수업 방식을 고수할 수 없다. 가정에서 차이가 났을 때 그걸 학교에서 빠른 시간 안에 진단하고 개입해 보충해야 한다. 영재교육은 신경을 많이 쓰는 데 비해 학습부진과 관련된 영역은 신경을 덜 쓴다. 들인 수고에 비해 티가 안 나고 잘 안 바뀌는 분야다. 학습자에 대한 관점이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중심이다. 읽기 능력의 저하는 어느 날 갑자기 벌어진 일은 아니다. 교육 주체들의 책무성이 약하고 그게 누적되다가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 같다.

PISA 평가에 한국 학생들이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디지털 정보 판별 능력도 세계 수준에 비해 많이 뒤처진다고 나온 점도 의외였다.

다른 나라에 비해 그렇다는 것도 흥미롭고 문제적이라고 봤다. 디지털 강국이라고 하지만 기술이나 인프라 측면에서 그렇다는 거다. 잘 읽는가는 다른 문제다. 디지털 공간 자체가 진실성을 담보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필터링되는 정보가 아니기 때문에 각별하게 비판적인 읽기 능력이 요구된다. 어떤 게 사실이고 의견인지, 어떤 것이 진실에 가까운 것인지, 각각의 정보를 연결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한데, 이를 가르치기가 어렵다. 인터넷 정보를 확인할 때 누가 썼는지, 출처는 어딘지, 그가 어떤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지 체크하라고 가르쳐줄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는가와는 별개다. 그걸 배울 수 있는 게 삶의 공간인데 삶의 공간과 학교 공간이 분리되어 있다. 입시 중심이라 실생활에 필요한 걸 못 배운다.

실생활에서의 배움이라는 것은?

보통 디지털 공간에서 지식을 다룰 때 논쟁적인 주제가 많다. 학교는 그런 얘기를 하지 않는 공간이다. 대학교 1학년 남학생을 상담하는데 여러분에게 가장 중요한 이슈가 뭐냐고 물었더니 쭈뼛쭈뼛하며 ‘젠더’라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이야기를 하느냐고 했더니 싸움이 되기 때문에 여자 친구들에게는 절대 이야기하지 않는다더라. 첨예한 이슈를 다룰 때 진짜 뉴스, 가짜 뉴스를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해 생활과 연결되는 배움이 되면 좋은데 그게 안 되고 있다. 읽기 점수가 높을수록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는 점수도 높은 게 정상인데 우리나라는 그 상관관계가 멀다.

문해력 향상을 위해 디지털 기기와 멀어져야 한다는 진단이 많은데, 다른 접근을 하는 것 같다.

종이 매체를 잘 읽는 능력은 디지털 시대에 좋은 독자가 될 수 있는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디지털 공간에서는 주어진 걸 읽지 않고 찾아서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읽으면서 계속 읽기의 목적을 환기하고 이 정보가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점검해야 하기 때문에 비판적 읽기 능력이 빈번하게 요구된다. 클릭의 순간, 자료 다운로드 순간 등이 모두 선택이다. 인쇄 매체를 읽을 때는 선택이 많이 작용하지 않는다. 정보를 비판적·분석적·선택적으로 찾을 수 있는가가 디지털 읽기 능력을 설명한다. 그런 면에서 옛날보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 요즘 세대의 부담이 크다.

미국에서는 리터러시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소송을 걸기도 했다.

거기도 잘 안 되니까 소송이 있었던 것 같다. 미국은 굉장히 큰 사회라 어떤 계층의 사람이 다른 계층의 구성원을 만날 이유가 별로 없다. 그런 의미에서 평화롭다. 미국의 공교육은 지역 세금에 따라 결정된다. ‘그가 누구인가’는 ‘어디에 사는가’로 결정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디트로이트는 자동차 회사가 있던 곳이고 1980년대까지 호황을 누렸지만 자동차 산업의 구조조정으로 파산한 도시다. 학교에 투입할 재정이 열악하니 좋은 교사가 오기 어렵다. ‘읽기와 쓰기는 시민으로서 반드시 갖춰야 하는 기본 능력인데 학교가 도와주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소송을 냈다. 2020년 법원이 학생의 손을 들어주었다. 캘리포니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EBS 프로그램 〈당신의 문해력〉(위)은 문해력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끌어올렸다.ⓒEBS 제공

리터러시 교육에서 한국과 미국은 어떻게 다른가?

독서 연구가 시작된 게 100여 년 전이고 리터러시 논의는 1960~ 70년대부터 있었다. 우리로 치면 국어 수업의 기본이 읽기다. 읽기를 중심으로 그걸 돕기 위한 활동들이 이루어진다. 글자를 못 읽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시간이 있고 실력에 따라 개별화·다양화 수업이 잘 되어 있다. 또 사회 현안에 대해 수업을 한다. 미국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이 인종문제인데 어디까지 다뤄야 할지 고민은 있지만 어쨌든 다룬다. 내 아이가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수업 시간에 총기 사고에 희생된 아이들에 대한 기사와 텍스트를 읽고 그 폭력성에 대해 이야기하더라. 교실에서 마스크 쓰고 침묵시위를 했다. 다양한 인종이 섞여 있는 학교인데 5학년 교실에서 그런 수업이 이루어졌다. 리터러시는 어떻게 읽고 쓰고 대화하고 생각하고 판단하는가에 관련된 것인데, ‘무엇’이 빠지면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그걸 잘 배우려면 다룰 수 있는 주제나 질문의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런 면에서는 미국 사회가 열려 있는 편이다. 물론 갈등도 심하지만 논쟁이 일상화된 문화다. 우리 사회는 싸움이 생길 만한 대화는 피하고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싸운다.

책에서 케이팝 소녀 팬의 사례를 좋은 리터러시로 소개한다.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조지 플로이드가 사망했을 당시, 댈러스시 경찰청이 트위터에 불법 폭력 시위 영상을 제보해달라고 올리자 한 소녀가 ‘자, 영상 여기 있어요’라는 문장과 함께 케이팝 스타의 영상을 올리자 많은 이들이 그 흐름에 동참했다. SNS를 감시의 공간으로 사용한 경찰에 대응해 디지털 공간에서 새롭게 의미를 디자인한 사례로 소개된다.)

전형적으로 요즘 필요한 리터러시다. 긴 걸 깊게 읽는 건 기본적으로 중요하지만, 디지털 공간에서 취한 정보를 자신의 삶의 경험과 연결해 해석하고 행동한 좋은 예라고 생각한다. 대수롭지 않게 볼 수도 있지만 특별하게 보이더라. 만약 학교에서 교육을 한다면 디지털 공간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그 맥락은 뭐며 어떻게 반응하고 공간에 참여할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리터러시가 배움의 목표가 되었으면 한다고 했는데.

읽기, 문해력, 리터러시 등에 사람들이 지금 열광하는데 그 이면에는 문제를 너무 간단하게 보는 측면이 있다. 책 몇 권 읽고 문제집 몇 권 풀어서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좋겠지만 굉장히 긴 시간과 다양한 경험, 노력이 필요하다. 인간의 성장과 더불어 발달하는 능력이고 그 과정 자체가 쉬운 게 아니라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나와 다른 관점이 있다는 걸 알아나가고 그런 순간순간마다 나의 경험과 지식, 관점을 넣어서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리터러시가 공동체적으로 갖춰지면 ‘생각하고 판단할 수 있는’ 공동체가 된다. 리터러시가 성장하는 과정이 배움의 과정인 셈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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