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박사. ⓒ연합뉴스

한국에서 처음으로 우주에 간 사람은 여성인 이소연 박사다. 먼저 우주인으로 선발된 사람은 고산이었지만, 그는 우주비행을 석 달 남기고 중대한 보안 규정을 위반한 사실이 밝혀져 이소연이 그 임무를 대신 하게 되었다. 이소연은 세르게이 볼코프, 올레그 코노넨코와 함께 TMA-12호를 타고 우주로 나가 국제우주정거장과 도킹하고 예정했던 열여덟 가지 과학 실험을 수행했다. 그리고 지구로 돌아오던 길, TMA-11호 소유즈 귀환선이 대기권에 진입할 때 추진선과 제대로 분리되지 않는 사고가 생겼다. 정상 각도보다 가파르게 대기권에 진입한 데다 통신까지 끊어져 노련한 우주비행사들조차 당황한 상황에서 이소연은 과학자로서 바른 의견을 제시해 귀환선의 비상 착륙을 도왔다.

하지만 한국 최초의 우주인이자, 여성으로서는 49번째 우주인인 이소연은 우주에 다녀온 과학자로서 활약할 기회를 제대로 얻지 못했다. 언론은 고산의 잘못을 축소했고,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보안 규정을 위반한 고산을 마치 문익점이라도 되는 양 추켜세우는 한편 엄연한 과학자였던 이소연을 비전문가 취급하며 부당하게 비난했다. 이소연은 결국 미국으로 떠났다.

그렇다면 이소연 이전의, 여성 우주인 마흔여덟 명은 어땠을까? 냉전시대 소비에트연방과 미국이 우주개발 경쟁을 하던 시기, 우주로 갈 기회를 손에 넣었던 여성이 있었다. 바로 최초의 여성 우주비행사이자 소비에트연방에서 여섯 번째, 세계에서 열 번째로 우주에 나갔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였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937년 중앙러시아에서 태어났다. 테레시코바의 아버지는 본래 집단농장의 농부로 테레시코바가 두 살이었을 때, 소비에트가 핀란드를 침공한 ‘겨울전쟁’에서 전사했다. 이후 테레시코바의 어머니는 목화 공장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어머니 혼자 세 아이를 키우다 보니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테레시코바는 열일곱 살까지 학교에 다닌 뒤 타이어 공장과 섬유 공장에서 일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테레시코바는 평범한 젊은 여성 노동자였지만, 그의 꿈은 공장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테레시코바는 기술학교의 통신 과정을 신청해 공부를 계속했다. 또 고공낙하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그는 가족들 몰래 스카이다이빙이나 낙하산 조종 훈련을 받았다.

그 무렵 소비에트연방과 미국은 우주를 향한 기록을 경쟁적으로 쌓아나갔다. 이때까지 앞서나가는 쪽은 1961년 최초의 유인우주선 보스토크 1호를 발사하는 데 성공한 소비에트연방이었다. 그리고 최초의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을 훈련시킨 니콜라이 카마닌은 여성 우주비행사도 미국보다 먼저 우주에 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 번에 다섯 명의 여성 우주비행사를 훈련시키기로 결정한 것도 미국과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였다.

1962년 1월까지 지원자 400여 명이 모였다. 우주비행사를 선발하는 데는 나이나 신장, 체중이나 건강상태 등 엄격한 기준이 있었다. 낙하산 조종도 가능해야 했다. 마침내 테레시코바는 타니아 쿠즈네소바, 잔나 요키나, 이리나 솔로브요바, 발렌티나 포노마료바와 함께 다섯 후보 중 한 사람으로 선발되었다.

발렌티나 테레시코바는 1963년 여성 최초로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Wikipedia

1962년 12월, 카마닌은 훈련을 마친 다섯 사람에게 공군 소위로 임관할 기회를 주었다. 테레시코바를 비롯한 다섯 후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카마닌은 이 다섯 명 중 쿠즈네소바와 요키나를 제외한 세 사람을 최종적으로 추려냈다. 원래 보스토크 5호에는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에는 또 다른 여성 우주비행사 포노마료바가 탑승할 예정이었지만, 계획은 몇 번이나 수정되었다. 결국 보스토크 5호에는 남성 우주비행사인 발레리 비콥스키가, 보스토크 6호에는 테레시코바가 단독 탑승하는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테레시코바의 통신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여기는 갈매기다! 지구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든 것이 순조롭다.” 우주에서 보내온 테레시코바의 통신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총 70시간50분 동안 지구를 48바퀴나 돌고 귀환한 테레시코바를 두고 당시 소비에트연방의 서기장이었던 니키타 흐루쇼프는 “여성은 결코 약하지 않다”라며 그 공적을 치하하고 연방 영웅의 칭호를 주었다. 여성들은 테레시코바의 활약에서 희망을 얻었다. 테레시코바는 모스크바에서 열린 국제여성회의에 참석했고, 그의 호출부호인 ‘갈매기’는 강하고 자유로운 여성의 상징이 되었다.

테레시코바는 군에 남았다. 공군 공학아카데미에 진학하고 공학박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다시 우주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비에트연방은 최초로 우주에 간 여성이라는 이 귀중한 존재를 다시 우주에 내보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았다. 그는 최초로 우주에 간 여성으로, 미국과의 우주개발 경쟁에서 승기를 잡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존재였다. 또한 테레시코바는 엘리트 군인이 아닌 노동자 출신이었고, 그의 아버지는 겨울전쟁 때 전사한 참전군인이었다. 소비에트연방 입장에서 테레시코바의 배경은 무엇보다도 체제 선전에 도움이 됐다.

우주에 다녀온 이듬해인 1963년, 테레시코바는 당국의 권유로 우주비행사인 안드리얀 니콜라예프와 결혼했다. 역사상 최초로 두 사람 모두 우주비행 경험이 있는 부부였다. 이들은 이듬해 딸 엘레나를 낳았다. 하지만 당국의 홍보를 위해 맺어진 결혼생활은 불행했고, 이들은 결국 이혼했다.

테레시코바는 1997년까지 공군에 남았다. 그는 다시 우주에 갈 수는 없었지만, 유리 가가린 우주비행사 훈련센터에서 강사로 활동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국제여성민주연맹의 부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후 소장의 계급을 끝으로 군에서 은퇴한 테레시코바는 국회의원으로 출마했고, 현재 7선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테레시코바가 7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그를 관저로 초대했다. 그때 테레시코바는 더 멀리, 새처럼 자유롭게 가고 싶었던 자신의 오랜 소망을 털어놓았다. “기회가 된다면 저는 다시 우주로, 화성으로 가고 싶습니다. 설령 그것이 돌아올 수 없는 편도 여행이라도 말이지요.”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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