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을 만나면 세상이 즐겁다
  • 이오성·변진경 기자
  • 호수 92
  • 승인 2009.06.15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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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만화가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다. 오프라인 만화 시장은 계속 쇠락하지만, 웹툰 등 새로운 영역에서 뛰어난 작가가 속속 얼굴을 내밀고 있다. <시사IN>이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를 소개한다.
한국 만화가 100주년을 맞았다. 1909년 6월2일 ‘대한민보’ 창간호에 이도영 화백의 만평이 실린 지 꼭 100년이 지났다. 한국 만화는 그동안 심각한 사회적 냉대와 만화왕국 일본과의 경쟁에 맞서며 질과 양에서 모두 성장해왔다. 그러나 100주년을 맞은 한국 만화의 오늘은 초라하다. 1만 부 이상 판매되는 만화는 가뭄에 콩 나듯 하고, 젊은 작가의 등용문이 되었던 만화 잡지 수도 한 손으로 꼽을 만큼 줄었다. 작가의 수익을 앗아간다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그나마 만화 유통의 안전판(?) 구실을 하며 한때 2만 개 이상 성업하던 도서 대여점마저 이제 3000개 이하로 줄어들었다.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들. 맨 왼쪽부터 <노근리 이야기> 박건웅, <오늘까지만 사랑해> 김수박, <짬> 주호민, <내가 결혼할 때까지> 노란구미, <마음의 소리> 조석.
희망은 어디에 있을까. 희망은 만화 시장이 몰락하는 가운데에도 만화를 접할 기회는 시시각각 늘어가는 아이러니한 현실에 있다. 컴퓨터를 켜면 포털 사이트 초기 화면에 늘 인기 작가의 연재 만화가 뜬다. 강풀씨나 강도하씨처럼 페이지뷰가 수천만에 이르는 작가들이 제법 많다. ‘디시인사이드’ 등 젊은 누리꾼이 모이는 인터넷 공간에서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일의 강풀을 꿈꾸는 아마추어 작가들이 부지런히 태블릿 펜을 놀린다. 웹툰이 아니어도 장르별로 마니아층을 형성한 오프라인 작가가 여럿이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웹툰이 누리꾼의 폭발적 인기를 끌면서 다시 한번 사회적 위력을 실감케 했다.

인기 캐릭터 총집합 <도대체 왜?인구단>

너무 많은 작가가 넘쳐나다보니 오히려 취향에 따라 ‘옥석’을 구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다. <시사IN>은 만화 전문가들에게 자문해 ‘주목할 만한 젊은 작가’를 선정해 소개한다. 웹툰뿐 아니라 오프라인 만화 잡지 등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함께 추렸다.

한국 만화 100주년을 유쾌하게 돌이켜보고 싶은 이라면 현용민씨의 <도대체 왜?인구단>을 추천한다. ‘신의 아들’ 최강타는 진짜 병역면제자가 되고, 머털도사는 겨드랑이 털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겨털도사’로 살아가고, 까치는 말로는 ‘엄지가 좋아하는 일은 뭐든지 할 수 있어’라면서도 지나는 아가씨에게 한눈을 파는 응큼남이 됐다. 이 밖에도 둘리, 독고탁, 하니, 영심이 등 1980~1990년대 한국 만화 르네상스 시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캐릭터들을 배꼽 잡는 캐릭터로 비틀었다. 이야기 얼개는 이현세의 <공포의 외인구단>에서 따왔지만, ‘왜?인구단’은 축구팀이다. 지나친 희화화로 인해 원작의 감동이 사그라드는 것 아니냐고? 그런 염려를 하기에는 현 작가의 패러디 내공이 가히 ‘지존’급이다.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보시길.

   
 
엉성한 그림, 놀라운 스토리

최소한의 채색도 하지 않고, 펜으로 슥슥 그린 데생 수준의 선, 얼핏 보면 일반인의 습작 노트에나 실릴 것 같은 그림들. 웹툰 작가 ‘마사토끼’의 작품을 처음 본 이라면 누구나 인터넷 브라우저를 닫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거기서 멈춰야 한다. 그 엉성한 선들 사이에 기막힌 스토리가 숨어 있다. 어느 깊은 산속의 산장에서 만난 세 남자. 그들은 재벌 그룹 손녀딸을 유괴하는 데 협력해주면 사례를 하겠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모였다. 하지만 산장에 도착한 순간, 유괴를 제안한 ‘울새’라는 이는 이미 죽었고, 재벌 그룹 손녀딸만 남아 있다. 남은 세 남자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손녀에게 걸린 현상금 100억원을 얻기 위해 서로 치열한 신경전을 펼친다. 지난 3월 출간된 ‘마사토끼’의 작품 <누가 울새를 죽였나?>의 줄거리이다.

평자들의 말마따나 ‘개인 블로그를 통해 선보인 조악한 그림체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는 스토리’ 덕에 누리꾼의 입소문을 타다 오프라인 책으로 엮인 작품이다. 혹자는 ‘천재’라는 상찬도 아끼지 않는다. 그는 이미 지난해 <킬 더 킹>이라는 작품으로 ‘독자만화대상’ 온라인 만화상을 수상했을 만큼 웹에서는 검증된 작가다. ‘만화만 그려서 먹고사는 방법’을 궁리하는 그의 작품은 블로그(http://blog.naver.com/masaruchi)에서 볼 수 있다.

대중 인지도가 높은 작가로는 <마음의 소리>를 그린 조석씨와 <삼봉이발소>의 하일권씨를 들 수 있다. 둘 다 1980년대생인 젊은 작가다. 2006년 9월 네이버 웹툰으로 유명해진 조석의 작품 <마음의 소리>는 오프라인으로 출간돼 이미 10만 권 넘게 팔렸다. 그의 만화는 일상에서 겪는 작가의 경험담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강풀의 초기 작품과 닮았다. 하지만 ‘말발’ 좋은 대사와 뒤통수를 치는 기발한 반전은 조석 특유의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혼자 식당에서 고기 구워먹기 9단계’ 따위를 그려놓은 작품을 읽노라면 아랫배를 움켜쥐게 된다. 조석이 기상천외한 유머 코드로 대중을 사로잡았다면, 하일권은 ‘외모 바이러스’나 ‘미래 시대의 왕따 문제’ 같은 심각한 소재로 독자에게 어필했다(85쪽 인터뷰 참조). 

   
 
역사와 생태 천착하는 작가도 주목

사회성 짙은 작품을 그리는 작가로는 <노근리 이야기>의 박건웅씨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역사’라는 화두를 끈질기게 붙들고 있는 작가다.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를 다룬 〈꽃〉, 그리고 한국전쟁 중 양민 학살을 소재로 삼은 <노근리 이야기>는 무거운 주제인데도 단숨에 읽힌다. 한지에 붓으로 그린 수묵만화라는 점도 독특하다. 유럽에서도 그의 작품이 잇따라 번역 출간됐다. 최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후에는 동료 작가들과 함께 덕수궁 길에 노 전 대통령 대형 초상화를 그려 화제가 되었고, 지난해 촛불집회 때에는 시위 도중 전경들에게 맞아 크게 다치기도 했다. 작품만큼이나 그의 일상도 ‘현실 참여형’인 셈이다.

지난 5월 <식물탐정 완두>를 펴낸 황경택씨는 만화가이자 숲생태 연구가이다. <식물탐정 완두>는 추리 만화 형태의 스토리로 식물의 생태를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한 작품이다. 주인공 강완두는 마을에서 일어나는 의문의 사건을 여러 식물의 특징을 파악함으로써 해결한다. 황씨는 2003년 한겨레신문에 여성 차별 문제를 다룬 <상위시대>를 연재하기도 했다. 작품 활동을 하는 틈틈이 숲 해설에도 나서며 일과 놀이의 접목을 꾀한다.

어린이 만화 쪽에서는 임덕영씨가 단연 두각을 나타낸다. 어린이 만화 학습지와 과학 잡지에 <미션 키트맨> <별난 가족> 등을 연재하는 임씨는 현대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만화 100주년 전시회에서 ‘툰토이’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툰토이란 만화 주인공들을 재미있게 입체화한 캐릭터 인형을 말한다. 어린이에게 어필하는 토종 만화 캐릭터를 찾기 힘든 터라 임덕영씨의 활동이 더욱 눈에 띈다.

   
<대한민국 원주민> 최규석, <미션 키트맨> 임덕영, <도대체 왜?인구단> 현용민. (맨 왼쪽부터)
여성 작가의 활약도 두드러진다. 19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마법 판타지 <Ciel>을 만화 잡지 <이슈>에 5년째 연재 중인 임주연씨는 부드럽고 귀여운 그림체와 독특한 캐릭터로 독자에게 사랑받는다. <Ciel>은 일본 만화잡지 <윙스>에도 동시 연재될 만큼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 살아가는 재일 동포 3세의 일상을 솔직하면서도 담담하게 그려내는 노란구미씨도 주목할 만한 작가다. 2000년 한국에 온 노란구미씨는 미대 재학 중 연습 삼아 그린 만화를 자기 홈페이지(www.koomi.net)에 올렸다가 입소문을 타고 유명 인사가 됐다. 일본인인 줄 알고 살다가 처음 자신의 뿌리를 알고 충격에 빠진 여동생, 한국에 수학여행 왔을 때 ‘반쪽바리’라며 놀림받았던 일 등 가슴 짠한 이야기들을 특유의 유머와 함께 버무려낸다. 최근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내가 결혼할 때까지> 연재를 마쳤다.

도시 생활을 청산하고  숲으로 떠난 친구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린 로드 만화 <아날로그맨>의 김수박씨와 2000년대판 군대 이야기 <짬>의 주호민씨는 이미 언론에도 여러 차례 소개된 작가다. 지난해 말 ‘7080 한국 가요’를 주제로 엮은 <오늘까지만 사랑해>를 출간한 김수박씨는 가슴 따뜻한 이야기를 매우 잘 그려내는 작가 중 한 명이다. 허지웅 <프리미어> 기자는 그를 두고 “내가 아는 한 이 나라에서 사람을,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감정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짊어져야만 하는 현실을 가장 깊고 정직하고 재미나게 그려내는 작가다”라고 소개한다.

‘군대를 소재로 한 만화 중 가장 재미있다’라는 평을 받는 <짬>은 무명의 주호민씨를 일약 전국구 작가로 만든 작품이다. 한국 남성 대다수가 겪은 군대 이야기를 깜짝 놀랄 만큼 생생하게 그려냈다. <짬> 연재 당시에는 ‘군대를 너무 미화한 것 아니냐’라는 비판도 들었지만, 지난해부터 포털 사이트에 연재한 20대 취업 만화 <무한동력>은 무한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88만원 세대’ 젊은이가 겪는 불안한 일상을 있는 그대로 드러냈다. 단순한 그림체를 보고 작가의 실력을 ‘얕봤다가’ 앉은자리에서 끝까지 다 읽었다는 독자가 부지기수다. 감정 과잉이 없이 물 흐르듯 이어가는 스토리가 미덕이다.

윤태호씨는 자세한 설명이 필요치 않은 유명 작가다. 이미 불혹을 넘긴 그가 ‘주목할 만한’ 작가에 꼽힌 것은 최근 포털 사이트에 연재 중인 웹툰 <이끼>의 인기 덕분이다. 농촌마을을 배경으로 한 스릴러물인 <이끼>는 치밀한 스토리와 인상적인 캐릭터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강우석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화하기로 했다. 최규석씨 역시 <공룡 둘리에 대한 슬픈 오마주>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독자의 호평을 받으며 젊은 나이에 ‘거물’로 우뚝 선 작가다. 최근 1987년 6월항쟁을 다룬 <100℃>를 오프라인으로 펴냈다.

물론 여기 소개된 작가가 다는 아니다. <삼국전투기>의 최훈씨, <입시명문 정글고>의 김규삼씨, <내일은 괜찮아>의 김의정씨 등 주목할 만한 작가가 넘쳐난다. <시사IN>이 소개한 작가 중 한 명에 꽂혀 작품을 읽노라면 고구마 줄기 캐듯 자기 취향에 맞는 작품을 줄줄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한국 만화에 관심이 없었던 이라면 뜻밖의 다양성과 풍부함에 ‘행복한 비명’을 지르게 될지도 모른다. 단, 한 가지는 잊지 말자. 지금 이 순간에도 더 나은 작품을 그리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작가의 고단한 노동을. 그들을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준비를 하자.

작가 소개에 도움 준 분들:박인하 청강문화산업대 교수(만화창작과) 서찬휘 만화 평론가 원종우 도서출판 길찾기 대표 정재훈 우리만화연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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