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을 연출한 연상호 감독. ⓒ연합뉴스

연상호 감독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지옥〉으로 ‘연니버스’를 확장한다. 새로운 연상호 월드를 지배하는 것은 인간 심연에 존재하는 공포심. 어느 날 ‘천사’라는 존재가 나타나 인간에게 죽음의 날짜를 고지한다. 그날이 오면 무서운 검은 괴물 ‘사자’가 나타나 ‘시연’을 행하는데, 피고지인을 처참하게 살해하고 고열을 가해 숯덩이로 만든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던 사람들은 실제 시연 장면이 생중계되자 공포에 휩싸인다. ‘나 역시 어떠한 죄를 짓진 않았을까?’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두려워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지옥에 가는 것이 무서운 나머지 스스로 현실의 삶에 지옥도를 펼친 셈이다.

연 감독의 세상은 늘 그랬다. 초자연적 현상이나 오컬트에 기인한 설정 아래 이 세상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연 감독의 시선은 인류의 존망을 흔들 재난에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관 내의 지배계층을 풍자하며 수렁에서 허우적대는 인간의 본성을 겨냥한다. 〈서울역〉에서 애타게 딸을 찾던 인물은 아빠를 사칭한 사창가 포주였으며, 〈부산행〉에서 좀비 무리에 사람을 떠미는 것은 절대다수의 이기심이었다. 〈반도〉의 황폐해진 서울을 지배하는 건 무력시위가 가능한 631부대의 광기였으며, 〈염력〉의 세계에선 용역 인부들과 공권력이 서민을 괴롭혔다.

이번 〈지옥〉에서는 종교단체 새진리회의 ‘정진수 의장’(유아인)이 1부부터 3부까지를 지배한다. 그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의지 아래 천사의 고지와 사자의 시연을 신의 심판으로 규정한다. 일련의 사건들이 죄인을 벌하는 신의 심판이 아니라는 점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일종의 사기극을 펼친다. 일반인들이 종잡을 수 없는 초자연적 현상에 노출될 경우 공포에 빠질 테고, 결국 사회가 붕괴되리라 판단했던 것. 마치 어린 양들을 이끌어가겠다는 목자인 듯이 행동하는 정 의장의 그릇된 의지, 그리고 자신이 느꼈던 공포를 대중에게 돌려주고 싶다는 이기적인 악의가 이 세상을 지옥으로 바꾼다.

4부부터 6부까지의 메시지는 좀 더 명확하다. 사회는 이미 정진수 의장의 의도대로 새롭게 구성됐다. 고지를 받은 사람들은 사회악으로 간주되어 마녀사냥의 화형대에 오르고, 이를 주관하는 새진리회는 전 세계의 추앙을 받는 지배 세력으로 군림한다. 하나 이제 막 태어난 신생아가 천사로부터 죽을 날을 고지받는다. 세상에 뿌린 죄악이 전혀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가 죄인으로 지목됐다. 교리의 근간을 무너뜨릴 존재가 등장하자 새진리회는 자신들의 지배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아기를 해치기로 마음먹는다.

〈지옥〉이 그려내는 이야기는 여러모로 연니버스의 연장선으로 보이지만 사실 시발점에 가깝다. 작품의 뿌리가 연 감독이 2003년 발표한 단편 애니메이션 〈지옥:두 개의 삶〉에서 기원하기 때문이다. 두 개 파트로 제작됐던 이 애니메이션은 웹툰 〈송곳〉의 최규석 작가를 만나 웹툰의 형태로 지금의 서사를 완성했다. 콘티 단계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으로 유명한 감독답게 웹툰을 콘티 삼아 원작 그대로를 영상으로 소환했다. 애니메이션과 실사영화, 각본, 작화까지 모든 것이 가능한 연상호 감독이기에 가능했던 지점이다. 굳이 원작과 크게 다른 대목은 마지막 엔딩. 늘 다음 시즌을 염두에 두는 넷플릭스에 맞춰 또 다른 확장 가능성을 열어두었다고 해석된다.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

박정자는 〈지옥〉에서 천사의 고지를 받은 후 사자에게 시연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생중계하도록 했다. 박정자 역을 맡은 배우 김신록. ⓒ넷플릭스 제공

특이한 건 주인공으로 특정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는 부분. 인물보다는 사건을, 나아가 메시지를 따라가는 작품인 만큼 모든 배우가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몫을 해낼 뿐이다. 다만 인상 깊은 배우를 꼽자면 대중에겐 다소 생소한 얼굴일 김신록. 연 감독의 〈방법〉에서 독특한 개성과 연기로 눈도장을 찍더니, 이번 〈지옥〉에선 서사의 중심으로 발돋움했다. 그가 연기한 ‘박정자’는 천사의 고지를 받은 후 자신이 사자에게 시연당하는 모습을 방송으로 생중계한 인물이다. 그로 인해 사회는 천사와 사자가 실존한다는 것을 알았고, 이는 새진리회가 득세하는 자양분이 됐으며, 마지막 엔딩에 또 다른 실마리를 제시한다.

연니버스의 일부답게 현 사회의 어두운 지점, 나아가 인간의 본성을 조망하기에, 철저한 권선징악의 쾌감을 선사하는 작품은 아니다. 넷플릭스의 화려한 예고편에 리모컨을 누른 시청자들이 예상치 못한 무게에 짓눌림을 호소하는 것도 십분 이해가 된다. 결국 〈지옥〉은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존중으로 귀결된다. 인류는 태초부터 지배 속에 살아왔다. 〈지옥〉을 관통하는 종교관을 빌리자면 하느님의 피조물로 태어나 신의 보살핌 아래 에덴동산에서 삶을 시작했다. 이후 지배 계층은 자신들의 의지 아래 피지배 계층을 선도해왔다. 선정을 베풀고자 하는 정의로운 군주도 있었고, 신의 뜻을 호도하여 권력을 거머쥐었던 종교 지도자도 있었다. 같은 인간을 노예 삼아 노동력을 착취했으며, 현대에는 자본의 논리 아래 수저 색깔을 구분 짓고 있다.

“신이 어떤 놈인지도 잘 모르고 관심도 없다. 확실히 아는 건 여긴 인간들의 세상이다. 인간들의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그렇다. 타인이 개인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자율성의 침해다. 〈지옥〉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택시 기사의 자조 섞인 대사는 이 세상은 인간들의 것이라고, 신의 뜻이 아무리 대단하다 하여도 결국 인간이 알아서 해나갈 수 있음을 고한다. 정의 역시 인간들이 살아가며 만들어낸 도덕적인 관념이다. 굳이 정의로운 세상을 신이 강요할 것도, 신의 목소리를 옮기는 이들이 주장할 것도 아니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알아서 만든다.

기자명 권구현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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