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유예되었던 자유가 하나둘 돌아오고 있다. 이제 밤 10시 이후에도 식당에서 여유 있게 대화를 나눌 수 있고, 인원 제한에 걸려 미뤄뒀던 모임을 잡아 반가운 얼굴들을 마주할 수 있다. 야구장에서 ‘치맥’을 즐기는 즐거움도 오랜만에 누릴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불안이 어른거린다. 신규 확진자와 위중증 환자 숫자에, 돌파 감염 뉴스에, ‘긴급 멈춤’을 선포할지도 모른다는 방역 당국의 메시지에 일상회복의 계단을 밟아 올라가던 시민들의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다. ‘우리, 정말 코로나19와 함께 살 수 있을까?’

위드 코로나의 앞날을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지만, 민간 전문가와 방역 당국의 의견이 비교적 일치하는 지점이 있다. 코로나19 확진자 수는 이전보다 늘어나기 쉬우며 중환자 규모도 커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여러 감염병 시뮬레이션 결과도 이 방향을 가리킨다(‘코로나19 확진자와 중환자, 언제까지 얼마나 늘까?’ 기사 참조). 백신접종 완료율이 80%에 가까워진 상황에서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사회적 거리두기를 지속하고, 고강도 방역 태세를 유지하는 ‘방역 사회’에 멈춰 서야 한다. 늘어난 중환자를 치료할 단단한 의료체계 못지않게, 위드 코로나 시대에 걸맞게 ‘인식의 다이얼’을 조정해야 할 시점이다.

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보건학자로서 ‘위험 인식’과 ‘위험 소통’을 다년간 연구했다. 지난해 1월부터는 코로나19 유행 속 시민들의 인식을 지속적으로 조사해왔다. 팬데믹을 거치면서 한국 사회를 관통해온 시민들의 심리와 인식의 궤적이 유명순 교수 연구팀의 조사에 축적돼 있다. 지난 10월에는 ‘단계적 일상회복’을 앞두고 중앙사고수습본부(보건복지부) 의뢰로 ‘코로나19 대응체제 전환 인식조사’를 수행했다. 이 내용을 바탕으로 11월8일과 12일 이틀에 걸쳐 150분간 이야기를 나누었다. ‘위드 코로나를 하고 싶지만 또 하고 싶지 않은’ 우리의 마음에 대해 물었다.

감염병 위기에서 시민들의 인식, 그리고 그것을 파악하는 작업이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똑같은 코로나19 팬데믹인데 나라마다 대응이 다르다. 왜 그럴까?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보통 사람들의 인식’은 차이를 만들어내는 데에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가 보이는 위험 반응이나 행동은 위험 인식에 영향을 받는다. 감염병뿐만 아니라 현대사회에서 출현하는 위험은 대부분 불확실하고 예측하기 어렵다. 누군가 답을 알아서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시대가 아니다. 정부 당국이나 전문가처럼 소수의 사람들이 정보와 지식을 독점적으로 평가하며 위험의 관리자가 되고, 국민은 이들에게 맡기고 따르는 ‘주인-대리인’식 관점으로는 이 위험을 관리할 수 없다. 특히 코로나19 대응에서는 국민들의 실천이 관건이다. 팬데믹에서 시민들은 위험을 다루는 주체이자 중요한 결정자이다.

유명순 교수 연구팀이 지난 10월 실시한 ‘코로나19 대응체제 전환 인식조사’에는 ‘위드 코로나’ 시대를 앞두고 있는 시민들의 복잡한 심경이 드러난다. 우선 ‘단계적 일상회복’처럼 코로나19 대응 방식에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높다. 코로나19 상황이 앞으로도 1년 넘게 지속될 것이며, ‘위드 코로나’는 사회에 이득이 된다고 판단한다. 코로나19의 치명률이 유행 초기에 비해 낮아졌기 때문에 현재 4차 유행 확진자 숫자는 이전 1~3차 유행의 숫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는 인식도 높아졌다(〈그림 1~4〉 참조).

〈그림 1~8〉 자료:유명순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 ‘코로나19 대응체제 전환 인식조사’

반면 ‘위드 코로나’에 대한 불안 역시 조사에서 확인된다(〈그림 5〉 참조). ‘위드 코로나 전환을 통해 지금보다 일상을 회복할 수 있다면 우리 사회가 하루 평균 몇 명의 확진자를 감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라는 질문에 절반이 넘는 응답자(57.1%)가 이 문항에서 주어진 선택지 가운데 가장 숫자가 낮은 ‘1000명 이상 2000명 미만’을 골랐다(〈그림 6〉 참조). 두 번째로 높은 응답은 ‘2000명 이상 3000명 미만’이다. 1000~2000명대 신규 확진자는 지난 7월부터 10월까지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라는 고강도 방역을 통해 겨우 통제해냈던 유행 규모이다.

‘코로나19 대응체제 전환 인식조사’에는 상반된 두 가지 모습이 드러난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는 인식은 분명하지만 ‘감수할 수 있는 확진자 수’로 대변되는 ‘위험 수용력’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이번 조사 결과를 받고서 국민들이 깜짝 놀랄 만큼 현실적이고 현명하게 상황을 보고 있다고 느꼈다. 단계적 일상회복의 전반적인 취지에 동의하면서도 준비가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판단하는 것이다.

‘위드 코로나로 가면 확진자가 늘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머리로 아는 것과 ‘하루 확진자가 3000명, 5000명, 1만명 나오고 돌아가시는 분도 생길 수 있다’라는 걸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문제이다. 외국과 비교하면 한국 시민들은 그동안 고강도의 사회적 거리두기와 방역 지침을 큰 저항 없이 수용해왔다. 왜 그랬을까? 경제활동이 위축돼도 먹고살 만해서? 학교 문을 닫아도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환경이 되어서? 그게 아니다. 사람을 죽게 해서는 안 된다든지, 병(코로나19)에 걸리게 해서는 안 된다는 ‘가치’가 굉장히 강력하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그 마음이 갑자기 바뀌지 않는 건 당연하다.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받아들이셔야 한다’고 통보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어떤 준비를 해나갈지’ 점검하면서 예상 문제에 대한 이해를 구해야, 앞으로 늘어날지 모를 위험, 예를 들면 신규 환자 수 같은 부분도 수용력이 높아질 것이다.

한국 정부는 지금 국면에 적합한 ‘위험 소통(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있나?

위드 코로나 이전의 정부 메시지는 ‘이걸 하지 말라’는 내용이 많았다. 동시에 ‘진단 프레임’으로 접근했다. ‘확진자가 몇 명이다’ ‘수도권이 전체 확진자의 몇 퍼센트를 차지한다’ ‘지금 이태원 클럽에 다녀간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전파가 확산되고 있다. 확진자가 급증해 위험에 처할 수 있다’ 등등. 문제적 상황과 위험의 크기를 알리는 데에 정부, 전문가 등 한국 사회의 스피커들이 주력해왔다. 그다음으로는 ‘공포 소구’를 많이 썼다. ‘지금 멈추지 않으면 영원히 멈출 수 있습니다’ ‘어느 마스크를 쓰시겠습니까’ 같은 문구들이 여기 해당된다.

위드 코로나에서는 ‘처방 프레임’을 더 많이 써야 한다. 문제 지적이 아니라 개선이나 학습에 대한 얘기를 해줘야 한다. 예를 들어, 의료 인력이라든지 방역 현장을 다룰 때 이제껏 그들의 헌신과 고생에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는 방식으로 반응했지만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상대적으로 소홀했다. 전 세계적인 유행 상황에서 한국은 비교적 코로나19 환자가 적은 편인데 왜 우리 보건의료계는 저렇게 고통 속에 있는지, 무엇을 개선해야 하는지는 별로 언급하지 않았다. 진단을 넘어서 처방을 해줘야 한다. 공공성의 문제, 중환자 관리를 위한 의료인력 훈련, 장기적인 투자 모두 처방의 영역이다. 위드 코로나는 진단만으로는 절대 되지 않는다. 정부나 사회가 그런 준비가 되어 있을지 걱정이 된다.

“병상 사용률이 75%를 넘으면 ‘잠시 멈춤(서킷 브레이커)’을 할 수 있다” “일상회복 2단계 전환 어려울 수 있다” 등 정부에서 나오는 발언들을 보면 여전히 ‘진단 프레임’이다.

‘서킷 브레이커’나 ‘1·2·3단계 단계적 일상회복 계획’을 보면 위험관리를 너무 기술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위험이 커지면 제도적 대책을 제시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하지만 위험관리는 기술적 통제뿐만 아니라 심리·사회적인 것이기도 하다. ‘생명을 보호하는 심리를 이토록 높게 가지고 있던 한국 시민들이 어떻게 코로나의 위험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 이 지점이 비어 있는데 별다른 계획이 없다. 그러면 두 가지 극단적인 심리가 나타날 수 있다. ‘이렇게 다 풀 거면 그전에는 왜 통제를 한 거지?’ 허무와 허탈이다. 다른 방향으로는 ‘이 어마어마한 방역 해이를 어떻게 할 거야?’ 준비된 분노에 불을 댕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위드 코로나를 해도 안전한지 묻는다. 전문가나 정부로부터 확실한 안전을 확인받고 싶어 한다.

안전에는 두 종류가 있다. ‘획일적이고 무결점적인 통제’에서 오는 안전과 ‘자율적인 관리’를 통해 얻는 안전. 지금까지는 ‘하루 확진자를 몇 명까지 수용하겠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다음 조사에서 하고 싶은 질문은 이런 것이다. ‘1. 예전처럼 통제를 하면서 확진자 1000명, 2. 우리 지역에서 위험을 관리할 이런저런 준비를 하고 어느 정도 일상을 살면서 확진자 3000명.’ 의료 인프라가 마련돼 사망자가 크게 늘지 않는다는 조건이 필요하겠지만 이렇게 선택지를 주는 것이다. 앞으로 안전에서 중요한 것은 확진자 수나 중환자 수보다, 그것과 맞물려 돌아가는 조건이라고 생각한다. 위험을 관리해가는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나, 코로나19에 취약한 사회집단을 보호할 수 있다는 동의, 그동안 상실했던 기회의 회복 같은 것들 말이다.

국제 데이터를 통해 인구당 감염 발생 지표를 보면 한국은 고성과를 얻은 국가이다. 그런데 한국 시민들은 왜 힘들어할까? 국민들이 우리의 성과, K방역의 성과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힘들다. ‘코로나19 상황으로 손실된 자원’을 묻는 조사에서 일관되게 가장 높은 응답이 ‘취업, 창업, 교육 등 자기계발 기회(55.2%)’의 상실이다(〈그림 7〉 참조). 두 번째는 ‘일상생활에 대한 흥미 감소’이다. 목표가 계속 지연되고 취소되는 과정에서 의욕이 사라지는 것이다. 삶이라는 게 때로는 소란도 있고 잡음도 생기면서 나를 찾아가는 측면이 있지 않나.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에서는 강력한 수칙이 촘촘하게 개인을 둘러싸고 있었다. 좋은 삶이라는 것이 똑같이 정해져 있었다. 마치 군대처럼 국가적 방역 지휘체계의 한 부분으로 역할과 책임을 다해왔지만 그것이 삶의 변칙성을 지운 측면이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을 논할 때 이러한 무기력에서 벗어나 어떻게 삶의 의욕을 돋울 것인지 꼭 얘기되어야 한다.

2020년 9월의 한 현수막. ‘사회적 거리두기’ 때는 사진 속 문구처럼 ‘공포 소구’를 많이 썼다. ⓒ연합뉴스

‘자율성’이라는 키워드를 상당히 강조한다.

위드 코로나의 핵심을 꼽으라면 시민들의 ‘자기 관여’ ‘주인성’이다. 국가가 시키는 것을 일괄적으로 수행하는 게 아니라 자율이나 자치가 가능해야 일상 속에서 위험관리와 감염관리가 가능하다. 그동안 코로나19 대응을 하며 싹텄던 일체감이나 연대감을 버리자는 뜻은 아니다. 자율성을 갖춘 일상적인 삶으로 적정하게 이동하도록 사회적인 전략 찾기 혹은 사회적 계약 찾기가 수반돼야 한다. 어떻게 이걸 할지가 현재 우리 앞에 놓인 가장 큰 질문이다.

냉정하게 말하면 ‘K방역’과 ‘자율 방역’은 원리상 갈등 관계이자 경쟁 관계이다. K방역은 ‘정부를 따르자’는 위계질서가 분명하고 아주 높은 집단의식의 발현이었다. 방역에서는 무척 효과적이었지만 그 이면이 있다. 경계가 분명하다. 소수의 위반과 일탈에 대해 크게 공분하고, 확진자·밀접접촉자와 다른 시민 사이에 경계선을 확고하게 긋는다. 앞선 조사들에서 ‘코로나19 환자는 감염을 막을 수 있었다’에 10명 중 4명가량이, ‘감염 책임은 환자에게 있다’에 10명 중 3명이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꿔 말하면 코로나19에 걸린 사람은 철저하지 못했던 거고 잘못을 했다는 것이다. K방역을 하며 얻은 긍정적인 경험이 있고 그것을 인정하지만, 단계적 일상회복이나 위드 코로나 단계에서는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막상 현실에서 코로나19와 맞닥뜨리면 자율성을 발휘한다는 게 쉽지 않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최대 조심’ 모드로 가야 하는지, 위드 코로나에 맞춰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하는지 솔직히 골치가 아프다.

정확한 표현이다. 위드 코로나는, 그리고 자율 방역은 ‘골치 아픈’ 것이다. 우리 학교에서 얼마 전에 축제를 열었다. 안전하게 해야 하니까 대학 당국에서는 방역 패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여기에 동의하지 못하는 학생들도 있을 것 아닌가. 학내에서 다소 논란이 일었다. 정부는 직장, 대학 등에서 자체적으로 방역 패스를 도입하는 것과 관련해서는 개입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알아서 선택하고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앞으로 우리가 위드 코로나를 하면서 이런 장면을 계속해서 마주칠 것이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사실 답이 없다. 과거 같으면 정부의 지침이 비어 있을 때 ‘마비’ ‘대혼란’ ‘갈팡질팡’ 같은 단어가 붙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단계적 일상회복으로 넘어오면서 예전보다 일상의 영역이 넓어졌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완화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예기치 않은 여러 문제들이 생길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런 문제에 대한 처분과 판단을 법과 행정력에 위임해왔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지배적 규범이었던 2년 가까운 시간에 한국 시민들은 이를 숙고해볼 기회를 얻거나 참여할 자리가 부족했다. 인식조사에서도 한국에서 자율 방역이 가능할 것으로 보는지 묻는 문항에 동의율이 비교적 낮다(〈그림 8〉 참조). 전문가랍시고 답이 없어서 죄송하지만 더 많은 ‘골치 아픔’에 대해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부도 이런 사례들을 적극적으로 알리고 자율적인 논의의 필요성을 설득해야 한다. 그것이 소통이다.

이제 기존 K방역 인식 체계와 어느 정도 거리두기를 해야 한다면, 앞으로 시민들에게 방역 참여를 어떤 식으로 설득해야 할까?

보건학에서는 ‘효능감(efficacy)’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건강은 기본적으로 자기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약이 있고 기술이 있어도 수술을 받은 사람이 자신을 믿고, 스스로 관리해야만 병에서 이긴다.

방역도 마찬가지다. 마스크 착용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1월 조사에서 한국 사람들은 10명 가운데 6명이 마스크를 쓴다고 답했다. 2월에는 10명 중 8명, 3월부터는 97% 이상으로 올라가서 줄곧 유지된다. 마스크 미착용 시 범칙금 10만원을 매기기 한참 전부터 마스크 착용률이 아주 높았다. 그렇다고 마스크 쓰기의 스트레스가 낮은 편도 아니다. 10명 중에서 6명이 힘들다고 답한다. 이번 10월 인식조사에서도 방역수칙 가운데 마스크 쓰기가 가장 실천이 힘든 것으로 나왔다. 그럼에도 마스크를 쓰는 비결은 도움이 된다는 믿음과 유익하다는 효능감이 높게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미국은 달랐다. 의료인도 아닌데 마스크를 쓰면 약해 보인다는 인식 때문인지 마스크 착용의 효능감이 낮았다.

한국이 그동안 방역 성과를 내온 바탕에는 국민들이 정보에 밝고, 또 서로 남의 눈치를 많이 보는 것도 분명 작용했다. 그런데 그것 이상으로 ‘경험을 통해 체득한 효능감’이 있는 것 같다. 어떤 행동에 ‘방임’이나 ‘해이’라는 식의 부정적 프레임을 씌울 게 아니라 효능감을 강조할 때 ‘자율 방역’이 가능할 거라고 본다. 그동안 무려 2년간 코로나19에 대응한 경험을 쌓아왔는데, 그중에서 효능감이 높았던 정책을 파악하고 왜 그랬는지 분석해보다 보면 자율 방역을 도와줄 실마리를 찾지 않을까.

반대로 언제 효능감이 떨어지고, 신뢰가 약해지고, 분노했을까를 살피는 것도 의미가 있다. 그동안 조사에서 국민의 분노가 상승했을 때가 세 번 있었다. 지난해 2월 대구 신천지발, 5월 이태원 클럽발, 8월 광화문 집단감염이 발생했을 때이다. 개방형 질문으로 분노를 느끼는 이유를 물어봤는데 분류를 해보니까 이렇게 모아졌다. ‘몰상식’ ‘무개념’ ‘무책임’. 이런 사례가 많아지면 자율 방역이 어려워진다고 볼 수 있다. ‘나 혼자 자율 방역 잘하면 뭐 해? 사회가 잘못됐는데’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코로나19 위험에 대한 심리적 저지선이 낮은 편이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위기 징후가 엿보이는데 몰상식·무개념·무책임하다는 인식까지 촉발되면 금세 중앙통제로 회귀하자는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다.

몰상식·무개념·무책임하다고 인식되는 행동을 자제해야 하나? 아니면 그런 행동을 바라보는 인식을 바꿔야 하나?

위험관리가 되는 로드맵을 잘 보여주는 게 자율 방역을 북돋울 거라고 생각한다. 언제 사람들이 쉽게 몰상식·무개념·무책임해지는지 일종의 회로를 그리고, 이를 개인 탓으로 돌리는 게 아니라 그런 위험을 관리하는 정책을 찾아야 한다. 인식의 변화는 이런 정책과 조건이 마련되었을 때 뒤따른다.

집회를 예로 들면 ‘감염 전파의 위험이 높으니 안 된다’가 아니라 안전하게 집회하는 방법을 제시해야 사람들의 인식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인가?

그렇다. 그래야 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단계적 일상회복에서 언론 보도도 달라져야 할 점이 있을까?

정부를 감시하고, 위기상황에서 국민에게 경고가 되는 정보를 전해야겠지만 균형 있게 해야 한다. 사회의 신뢰 자본을 지나치게 해치지 않도록 말이다. 코로나19 기사에서 제일 크게 문제의식을 느꼈던 기조는 일명 ‘다닥다닥’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한국 사회는 ‘밀접·밀폐·밀집’이라는 3밀 환경을 잠재적 집단감염의 진원처럼 걱정했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함께 살기를 선택했고, 일상생활을 누리는 쪽을 선택했으면 주목해야 할 것은 ‘다닥다닥은 위험해’처럼 단편적 진단이 아니라 ‘다닥다닥을 어떻게 개선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이다. 콜센터는 조금이라도 달라졌는지, 지자체에서 인허가를 내줄 때 ‘환기’는 중요한 조건이 아니었는데 바뀐 것이 있는지, 긴급 돌봄이나 복지가 중단되지 않도록 하는 방안은 무엇인지 말이다. 위드 코로나가 뉴노멀(new-normal)이고 새로운 사회적 계약이어야 한다는 건 이런 뜻이다. 언론도 지나치게 진단 프레임에 기울어져 있던 관행을 처방 프레임 쪽으로 돌려야 한다.

2021년 10월17일, 한강 시민공원에서 여유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 11월1일부터 ‘단계적 일상회복 1단계’가 시작되었다. ⓒ시사IN 윤무영

위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어떤 인식이 필요할까?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리스크가 더 급증할 수 있다. 단계적 일상회복 1단계가 시작된 이후 언론은 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나. 결국은 불확실성 속에서 서로를 믿고, 현재 시스템의 관리 역량을 믿고, 얼마나 나아가느냐의 문제다. 정부가 사후 책임을 지나치게 두려워한 나머지 안전한 길로만 가면 일상의 시간은 점점 뒤로 밀린다. 위험 거버넌스에서 자율은 권한 분산(empowerment)을 의미한다. 위험사회를 인정하고 위험관리가 지속 가능하도록 권한과 책임을 나누는 것이다. 단계적 일상회복을 통해 국민들에게 어렵게 돌아온 자유와 권리와 권한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그에 뒤따르는 책임도 져야 한다. 이를 조금씩 받아들여야 한다. 정부는 국민들을 좀 더 믿고 참여와 소통의 문을 열어야 한다. 불확실성 앞에서 우리 모두 좀 더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인터뷰 기사를 마감하던 11월17일, 유명순 교수로부터 메일 한 통이 왔다.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이고 싶다는 청이었다. 이날 국내 신규 확진자는 3000명을 넘어섰다. 위중증 환자 수는 522명으로 코로나19 발생 이후 최고 수치이다. 어쩌면 앞으로 이런 날이 자주 찾아올지 모른다. 유 교수가 메일을 통해 덧붙인 이야기는 코로나19와 살아가기의 ‘골치 아픔’과 불확실성, 그리고 그 앞에서 겸허한 자세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위드 코로나에서는 사회적 거리두기 조치를 완화했으니 방역 긴장감이나 주의력을 높이는 메시지가 중단돼야 한다고 이해되어서는 안 됩니다.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일 때는 긴장이고, 완화일 때 공백이 되는 단순대립 구도는 위험합니다. 일상회복이 진행되는 가운데 크든 작든 위험이 있으면 있는 대로, 보이면 보이는 대로 조속히 그리고 충분히 말해야 합니다. 지금 시점에서는 시민들 내면의 조심성을 일깨우고, 방역을 실천할 구체적인 방안을 스스로 찾도록 하는 소통 전략이 필요합니다. 완화 그 자체가 아니라 완화를 위한 준비의 부족이 위험입니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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