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골이 귀한 스포츠다. 90분 내내 뛰어도 한 골을 만들기 힘들 때가 있고, 한 골만 넣어도 승리할 수 있다. ‘기록의 스포츠’를 논할 때 많은 경우 축구가 소외되는 이유는 이와 무관하지 않다. 결과물이 최고의 가치를 갖는다. 골을 잘 넣는 선수들은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한다. 당장 2021년 고액 연봉자들을 찾아보자. 호날두, 메시, 네이마르, 음바페, 살라… 연봉 랭킹 ‘톱 5’에 드는 선수들 모두 골게터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데 골이 축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0-0으로 끝나는 경기도 재미있고 아름다울 수 있다(물론 드문 경우이긴 하다). 1-0으로 승리한 경기에서 골을 넣은 선수만 팀에 기여했다고 보는 것도 비약이다. 그라운드는 넓고, 그 위에서 뛰는 선수들은 도합 22명이나 되며, 변수도 다양하다. 패스와 패스로 이어지는 게임의 특성상 득점에 개입하는 요소도 많다. 이렇게 숨어 있는 가치를 발견하고 싶을 때, 방법이 있다. 숫자에 현미경을 들이대면 된다. 통계와 분석으로 보는 축구의 세계가 있다.
올 시즌 한국프로축구연맹은 한 달에 한 번씩 흥미로운 데이터를 공개하고 있다. 이름하여 ‘K리그 다이내믹 포인트’. 쉽게 말해 선수 랭킹이다. 득점과 도움이라는 단순 기록 외에 다양한 지표로 활약상을 평가해 선수 순위를 매긴다. 영국 스포츠 전문채널 ‘스카이스포츠’의 ‘EPL 파워랭킹’ 산정 방식을 차용했다. 항목은 득점 지역·득점 방식·키패스·크로스·태클·인터셉트·경합·걷어내기·PK 선방 등 공격에서 수비에 이르기까지 31가지에 이른다. 이 항목에 포지션마다 가중치를 다르게 부여한다. 예컨대 공격수가 넣은 골과 수비수 혹은 골키퍼가 넣은 골의 점수는 다르다. 당연히 후자의 점수가 더 높다.
랭킹을 발표할 때마다 프로축구 판도와 지형의 변화를 확인하는 즐거움이 있다. ‘언성 히어로(숨은 영웅)’를 발견하는 재미도 있다. 11월 초에는 정규리그가 끝난 K리그 2(2부 리그) 시즌 결산 랭킹이 공개되었다. 득점왕 안병준이 1위에 오른 건 예상 가능한 범위였지만 2위 이름이 뜻밖이었다. 안산의 미드필더 이상민이었다. 중하위권에 해당하는 소속 팀 성적(7위)이나 포지션으로 볼 때 좀처럼 두드러질 일 없는 선수이지만 데이터를 통해 그 가치가 재평가됐다. 4골 6도움이라는 공격포인트와 더불어 수비의 지표가 되는 인터셉트·그라운드 경합·공중볼 경합 등에서 많은 점수를 확보한 덕분이었다.
이상민 외에 꼴찌 팀 부천의 박창준, 박진섭(대전), 윌리안(경남), 김현욱(전남) 같은 ‘올라운더’들이 상위에 포진한 것도 의미심장하다. 프로축구연맹의 이종권 홍보팀장은 “포지션상 단순 기록으로는 돋보이기 힘든 선수들이 있다”라면서 “데이터를 활용해 선수 개개인의 활약상이 어떤지 확인할 수 있고 콘텐츠로서 축구의 재미도 찾을 수 있었다”라고 설명한다.
축구 경기에도 ‘시퀀스’가 있다
부가 데이터와 이를 활용한 분석 기법이 흥밋거리로만 소비되는 것은 아니다. 각 클럽과 감독들에게는 선수 평가에 유용한 자료가 된다. 선수단 연봉 산정은 물론 전략을 수립하고 전술을 수정하거나 보완할 때도 좀 더 객관적인 숫자를 활용할 수 있다. 한 프로팀 관계자는 “이 데이터를 100% 의지하거나 신뢰한다는 뜻은 아니”라면서도 “숫자를 보면 경기력이나 팀 공헌도를 확인할 수 있다. 선수 기용 문제를 두고 감독이 감에 의존하거나 편견을 갖지 않고 평가하는 데 도움이 된다”라고 전했다.
개인의 기록이 팀 기록으로 쌓이면 유의미한 공격 작업이나 점유율 분석도 가능해진다. 예컨대 ‘시퀀스(sequence)’가 있다. 시퀀스는 영화나 건축에서 통용되는 개념과 비슷하다.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는다. 그 정의는 스포츠 통계업체마다 대동소이한데, ‘옵타’에 따르면 볼을 소유한 시점부터 상대 방해로 공격 작업이 중단될 때까지 완성도를 하나의 시퀀스로 본다. 그사이 이뤄지는 돌파와 패스, 터치 등의 횟수가 반영되는 방식이다. 시퀀스를 통해 볼을 소유하는 동안 골을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적극적인 작업이 이뤄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볼 소유를 이해하는 지표 중 하나는 히트맵(혹은 터치맵)이다. 붉은색이 짙을수록 볼 터치가 많았다고 보면 된다. 11월11일 열린 2022 카타르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5차전 당시 히트맵을 보자(위 〈그림〉 참조). 한국 대표팀의 붉은색을 추적하면 팀 스타일이 나온다. 수비진에서부터 시작해 중원을 거치는 빌드업과 측면을 주 루트로 활용하는 움직임이 직관적으로 드러난다. 왼 측면의 손흥민, 오른 측면의 황희찬-이용으로 이어지는 직선 플레이가 상대를 압도했다. UAE 대표팀의 경우 골 지역의 붉은색이 가장 도드라진다. 골키퍼가 그만큼 바빴다는 뜻이다. 실제로 이날 한국은 UAE 골문을 향해 자그마치 슛 17개를 날렸다. 그중 하나가 UAE 골망을 흔들었다.
데이터 분석의 활성화로 피지컬 데이터도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됐다. 측정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뛴 거리, 속도, 심박수가 데이터로 산출된다. 뛴 거리는 흔히 활동량과 비슷한 개념으로 통용된다. 뛴 거리가 팀 승률과 직결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뛴 거리가 많을수록 수적 우위를 점할 확률은 높아진다. 뛴 거리 상위에 있는 선수들은 한 경기 평균 11~13㎞ 기록을 낸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많이 뛴다’고 느끼는 수준이다. 현역 시절 박지성이 대표적이다.
최근에는 기대득점(xG, Expected Goals)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말 그대로 골에 대한 기댓값을 뜻한다. 골대로부터의 거리와 각도, 슈팅 시 신체 부위, 슛 직전의 행동, 골키퍼의 위치 선정 등 다양한 요인들을 빅데이터(AI)로 분석한 뒤 득점으로 이어질 확률을 산출한다. 기대득점이 높으면 득점을 기대할 수 있는 장면을 많이 만들어내는 선수라고 이해할 수 있다. 선수 개인뿐만 아니라 팀에도 적용할 수 있는 지표다.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활용하는 분석이기 때문에 아직은 신뢰성에 논란이 있지만, 통계지표의 영역은 계속 확장하고 있다.
축구계에는 여전히 데이터에 관한 보수적인 시선이 존재한다. 세밀한 분석과 다양한 지표가 축구의 본질을 흐린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데이터에서 얻은 통찰로 축구를 보는 시각은 새로워질 수 있다. 그렇게 대하는 그라운드는 이전과 전혀 다른 즐거움을 주는 세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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