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7일 서울 강남역 인근 도로에서 ‘스타벅스 트럭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시위 주도 집단은 소수의 익명 노동자였다. ⓒ연합뉴스

최근 한국 사회를 뜨겁게 달궜던 스타벅스 트럭 시위가 마무리되었다. 다회용 컵 무료 제공 이벤트에서 촉발된 노동자들의 불만이 10월7~8일 트럭 시위로 이어지자 스타벅스코리아는 사과하고, 인력 확충과 굿즈TF 구성 같은 개선책을 내놓았다. ‘사건’은 이렇게 일단락되었지만, 논의해야 할 많은 쟁점은 숙제로 남았다.

이번 트럭 시위는 노동자들이,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시위를 조직했다는 점에서 주체·목적·방법 모든 측면이 그간의 다른 집단행동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큰 차이가 있다. 시위를 주도한 집단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이 아니라 ‘총대 3인’이라고 밝힌 소수의 익명 노동자들이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온라인 공간, 즉 직장인들의 소셜 플랫폼인 블라인드(Blind)에 게시되었고, 온라인의 다른 공간으로 확산했다. 집단행동이라고는 하지만 누구 하나 일터(매장)를 떠나는 방식으로 영업활동을 저해하지도 않았고, 시위의 도구로 활용한 트럭을 직접 몰지도 않았다. 정작 그 집단행동에 이해당사자의 직접 참여는 거의 없었던 셈이다. 투여된 것은 트럭 두 대를 빌리는 데 쓰인 모금액 330만원이었다. 그런데도 회사로부터 개선책을 받아냈다. 그야말로 ‘가성비 최강’이었다. 느슨하고 수평적인 관계망으로 연결된 ‘조직 밖’ 온라인 광장의 파괴적인 위력을 보여주었다.

일부 언론은 ‘민(주)노총의 굴욕’이라는 제목을 달았다. 민주노총이 10월5일 낸 성명서에서 “트럭 시위를 환영한다. 이 시위에 이어 노동조합을 결성할 것을 권한다.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면 민주노총은 언제든지 달려가서 지원하겠다”라고 밝힌 데 대해 트럭 시위 기획자가 “민주노총은 트럭 시위와 교섭을 시도하지 마시라. 우리는 당신들이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노조가 아니다”라고 답한 것을 보도하는 기사에서였다.

다양한 분석이 이어졌다. 적지 않은 수가 ‘세대론’을 중심에 두었다. 이른바 MZ 세대의 순수성 강박, 탈이념, 반정치주의, 비실명, 개인화(각자도생), 집단 정체성 거부, 극효율주의라는 특성을 ‘반노조주의’와 묶었다. 이 세대의 특성은 한 중년 노동조합 활동가 말에서도 확인된다. “(젊은 세대가) 노조에 가입은 하죠, 보험처럼. 그런데 노조에 잘 안 와요. 다들 블라인드로 가지.”

노동조합에 대한 입장과 태도를 단지 ‘그 세대의 특성’만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까? 떼놓고 볼 수 없는 문제이겠지만 오히려 노동조합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 조직인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왜 노동자들은 전통적인 발언 채널인 ‘노동조합’을 통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가?

나는 2017년, 동료들과 함께 국민의식 조사(〈2017년 노사관계 국민의식 조사연구〉, 장홍근 외, 한국노동연구원)를 진행했는데, 질문 중 하나가 “노동조합이 얼마나 필요하다고 생각하는가?”였다. 응답자 1000명 가운데 85.5%가 “필요하다”라고 답했다. 그런데 “노동조합에 가입할 의사가 있는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 비율(조합원 포함)은 38.4%였다. 노조가 필요하다는 응답의 절반 이하 수준으로 떨어졌다. 더 흥미로운 것은 연령별로 응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만 19~29세 답변만 보면, 노조 필요성 지지는 88.6%였고, 노조 가입 의사(조합원 포함)는 37.2%였다. 이는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연령별 차이가 아니라 노조 필요성과 노조 가입 의사 간의 격차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 격차는 왜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그 이유를 노동조합 대표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본다.

2017년 국민의식 조사에서 우리는 또 물었다. “노동조합이 ‘현재 중점을 두고 있는 활동’과 ‘앞으로 중점을 두어야 할 활동’이 무엇이라고 보는가?” 이 두 가지 물음에 대한 응답을 비교하면 ‘조합원의 임금인상 등 근로조건 개선’은 47.4%(현재 중점)에서 21.9%(앞으로 중점)로 절반 이하로 감소했다. 반면 ‘비정규직 등 취약계층 보호’는 11.4%에서 30.1%로, ‘사회보장, 세제 개혁 등 사회제도 개혁’은 6.1%에서 18.4%로 각각 3배가량 증가했다. 이는 노동조합이 특정 집단의 이익만을 대표해서는 곤란하다는 점, 즉 대표성의 확장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런 점에서 민주노총 성명서는 대표의 범위를 ‘조합원’으로 좁힌 듯해 아쉽다. 노동 3권 행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겠지만 노조로 조직되지 않거나 그렇지 못한 노동자들의 ‘대표될 권리’는 제한될 수 있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오히려 스타벅스 한국 진출 22년이 되도록 무노조 경영이 지속될 정도로 노동조합이 매력적인 이해 대표 조직으로 인정되지 못했던 현실에 대한 반성,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스타벅스와 유사한 여타 서비스업종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계획을 천명했으면 어땠을까?

‘조합원’에 한정하면 격차 더 벌어진다

더 본질적으로는 단체협약 적용 범위를 확장할 필요가 있다. 단체협약은 노사가 공동으로 마련하는 임금과 노동조건에 대한 법규범이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사용자(단체)와 함께 ‘입법자’의 지위를 갖는다. 갈수록 확산하는 불평등과 노동시장 이중구조화 문제를 풀기 위해 산업·업종 수준에서 통일적인 임금·노동 조건의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국제노동기구(ILO)는 1944년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라고 했다. 노동조합 대표성을 ‘조합원’에 한정해서 이해한다면, 저임금·불안정 노동자일수록 노조에 가입하기 어려운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 안의 격차가 더 벌어질 수밖에 없다. 전체의 번영은 더 먼 얘기가 된다. 혹자는 무임승차자 문제(노조에 가입하지 않고도 혜택을 받는 문제)나, 사용자들의 비협조와 법 조항의 엄격성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트럭 시위로는 교섭을 할 수 없지만 노동조합은 교섭할 수 있다”라던 성명서와 맥을 같이한다. 현재의 노동법 조항과 그 해석론에 노동조합이 더욱 종속되고 있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트럭 시위는 정말 교섭이 아닌가? 제도는 주체의 행동을 규정짓기도 하지만, 주체는 제도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상호작용의 관계다. 현행 법제하에서도 노조가 변화를 만들 방법은 있다.

노동조합이 ‘이익’ 대표체라는 관점도 재검토해야 한다. 정치학자 비에이라와 런시먼이 지적하듯, 이익에 초점을 두면 단기적으로는 집단의 정체성이 드러나겠지만 애초의 동기나 이유가 사라지면 그 집단은 빠르게 소멸된다(〈대표:역사, 논리, 정치〉 참조). 스타벅스 트럭 시위 기획자가 말하지 않았나. “저희 총대 3인은 10월10일 사내 게시판에 최종 보고를 마치면 즉시 해산될 ‘일회성 총대다’”라고(일부 스타벅스 노동자들은 노조를 조직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지만, 상급 단체에 들어갈 의향은 전혀 없다고 밝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기 ‘이익’ 대표체라기보다 노동 ‘관점’ 대표체일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조합의 힘을 측정하는 방식도 바뀌어야 한다고 본다. ‘조합원 수’보다는 ‘그 단체협약 적용을 받는 노동자 수’가 노동조합의 힘을 측정하는 진정한 기준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자명 이정희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