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의 저편
기리노 나쓰오 지음, 이규원 옮김, 북스피어 펴냄
“당신이 쓴 것은 좋은 소설입니까, 나쁜 소설입니까?”
성애 소설을 쓰던 작가가 문예윤리위원회라는 국가 조직에 의해 바닷가의 격리된 건물에 감금된다. 그곳에서 작가는 외설, 폭력, 범죄 등의 소재로 작품 활동을 하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형편없는 대접을 받으며 생활하게 된다. 문예윤리위원회는 작가들에게 누구나 공감할 만한 ‘좋은 소설’을 쓰라고 윽박지른다.
소설, 영화 등에서 캐릭터의 특정 행위나 대사를 툭 떼어내 ‘이건 남성혐오다’ ‘저건 여성차별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다’라며 논란으로 만드는 것은 요즘 한국 사회에서도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국가·사회가 강요하는 윤리와 ‘표현의 자유’ 간 모순을 일본 문학계의 거장이 도발적으로 그려냈다.
죽는 게 참 어렵습니다
김영화·김호성·나경희·송병기 지음, 시사IN북 펴냄
“나답게 살다가 아는 얼굴들 사이에서 죽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질병이 일시적이라고 여기려 한다. 아픈 몸은 비정상적 상태이고, 고통을 견디면 다시 ‘정상’으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편으로 이 생각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 결국에는 우리 대부분이 질병에 시달리다 죽게 된다. 죽음이 상수라면 병에 든 때부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을 취재해 그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적었다. 질병을 비일상적인 삶의 장애물로 여기는 사회가 개인의 고민을 위축시킨다고 그들은 말한다. 전문가들은 그간 평가절하되어온 ‘돌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죽음이 한층 가까이 스며든 팬데믹 시기 유효한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이주연·이정환 지음, 오마이북 펴냄
“피해자는 죽고 없는 재판정에서 피고인들은 이해받고 감형되어 남은 삶을 영위한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남자친구에 의해 숨진 여성은 108명, 열흘에 한 명꼴로 죽었다. ‘공식 통계’로는 그 절반인 51명이었다. 맞아 죽었고 찔려 죽었고 목 졸려 죽었다. 카테고리가 되어 있지도 않은 판결문을 하나하나 찾아 모아서 분석했다. 108개 판결문에 담긴 사건 내용은 모두 달랐지만 숱하게 등장하는 문장은 한결같았다. ‘피해자가 피고인에게 헤어지자고 말하자 피해자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 저자들은 이 죽음에서 ‘데이트’라는 단어를 걷어낸다. ‘데이트 폭력’이라는 말 대신, 서로 사귀다 상대를 죽였다는 의미를 담아 ‘교제살인’이라고 명명한다.
후보 단일화 게임
황두영 지음, 클 펴냄
“대등한 후보 단일화에서 두 후보는 서로에게 인질범인 동시에 인질이 된다.”
1987년 김대중-김영삼에서 2017년 안철수-홍준표까지, 직선제 개헌 이후 등장한 여섯 번의 ‘후보 단일화 협상’을 분석했다. 후보 단일화는 어떨 때 성공하고, 어떨 때 실패할까.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인 저자는 후보 개인의 기질이나 명분 등이 아닌 오직 게임의 규칙으로 그 성패를 분석한다. ‘대등한 단일화냐’ ‘양보하는 단일화냐’라는 판의 성격에 맞춰 상대 끌어들이기, 협상하기, 보상책 제시하기 따위 카드를 적절히 구사한 후보가 게임의 승자가 됐다.
이번 대선에서도 협상이 등장할까? 유권자들이 현행 양당체제에 만족하지 못하는 한 ‘지겹고 소모적’일지라도 게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저자의 전망이다.
한국의 능력주의
박권일 지음, 이데아 펴냄
“능력주의는 정의를 가장하기 때문에 노골적 부정의인 세습신분제보다 오히려 위험할 수 있다.”
‘개천에서 용 나던 시대는 끝났다.’ 계층 사다리가 무너진 불공정 사회에 대한 자조가 섞인 말이다. 능력이 있으면 ‘저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다는 희망. 이 희망을 빼앗긴 채 생존 투쟁에 시달리는 이들에게 ‘개천의 용’은 시대를 거슬러 다시, 묘한 흥분을 주는 단어가 됐다. 하지만 저자 박권일은 ‘능력주의’의 동력은 부푼 희망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용이 되지 못한 이들의 열패감과 억울함”으로 자라나는 괴물이다.
저자는 능력주의의 가장 큰 문제로 불평등에 대한 무감각을 말한다. 서로 다른 능력을 가졌다면 다른 몫을 갖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사실 능력주의의 민낯은 이것이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기억의 에티카
다카하시 데쓰야 지음, 고은미 옮김, 소명출판 펴냄
“말할 것도 없이 ‘기억’은 결코 과거의 문제가 아니라 항상 현재의 문제이다.”
기억을 둘러싼 싸움은 끊이지 않는다. 한 사건에 대한 서로 다른 해석은 기억의 전장에서 상대를 겨누는 무기가 된다.
그 싸움에서 패배하는 것은 주로 약한 자다. 땅 위의 전쟁에서 패배한 이들은 기억의 전장에서도 자주 유린당한다. 그런 의미에서 ‘기억’은 언제나 윤리의 문제이기도 하다. 약한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무의미’로부터 건져내는 것은 오직 기억의 힘이다.
저자는 ‘기억’의 전장인 역사적 사건들을 중심으로 아렌트, 레비나스 등의 철학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일본인 저자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도 특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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