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의 에드워드 제너가 아이들에게 천연두 백신을 접종하고 있는 그림. 그는 1796년, 논문으로 우두법을 검증하고 발표했다. ⓒWikimedia Commons

1796년, 영국의 에드워드 제너는 농부들에게서 ‘매일 우유를 짜며 우두에 걸린 소에 접촉했던 여성들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제너는 이와 같은 소문을 실험으로 검증하고 논문으로 발표한 뒤 유럽 전역으로 널리 보급한다. 이 우두법은 이전까지 천연두를 예방하기 위해 시행되었던 인두법보다 안전했다. 이후 1872년, 영국 정부는 천연두에 대한 백신접종을 의무화했다. 그로부터 다시 100년이 지난 1980년 천연두는 전 지구상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우두법 이전에, 인두법이 있었다. 천연두를 약하게 앓은 사람의 고름을 이용한 이 접종법은 15세기 명나라 의사 만진의 〈두진심법〉에 처음 기록되었고, 인도를 거쳐 오스만 제국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이 인두법을 영국으로, 다시 유럽으로 전파한 인물이 바로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였다.

메리 피에르폰트는 어린 시절부터 밝고 자유로우며, 일기장에 “흔치 않은 역사를 기록하겠다”라고 적는 야심 있는 소녀였다. 하지만 메리가 여덟 살이 되던 해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딸의 결혼에만 신경 쓸 뿐 교육에는 무관심했다. 어린 메리는 신부 수업이나 시키려는 가정교사를 피해 아버지의 서재에 틀어박혔다.

메리는 저택의 서재에서 혼자 라틴어를 공부하고 수많은 고전을 읽었다. 그리고 토머스 테니슨, 길버트 버넷 같은 주교들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재원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그는 비슷한 또래인 앤 워틀리 몬태규와 유머 감각이 넘치는 편지를 주고받으며 우정을 쌓았다.

하지만 앤과의 우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앤이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메리는 앤의 오빠인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와 위로의 편지를 주고받다가 만나게 되고, 서로 호감을 가졌다. 메리의 아버지가 결혼을 반대했지만 1712년 메리는 에드워드 워틀리 몬태규와 도망쳐서 그와 결혼했다. 이후 메리는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로 불리게 되었다.

에드워드는 결혼하고 2년 뒤 재무부 차관이 되었고, 메리는 런던 사교계에서 앤 공주의 측근인 말보로 공작 부인 사라 처칠이나 왕세자비인 캐롤라인, 장차 수상이 되는 로버트 월폴의 아내 ‘몰리’ 레이디 월폴 등과 교류하며 학식이 높고 재치 있는 여성으로 알려졌다. 특히 ‘안스바흐의 카롤리네’라고 불렸던 캐롤라인 왕세자빈은 라이프니츠나 볼테르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지성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지적인 여성이기도 했다.

우두법이 나오기 전, 영국과 유럽에 인두법을 전파한 레이디 메리 워틀리 몬태규. ⓒ Wikiwand

작은마마 고름 ‘접붙여’ 예방하는 방식

런던에서 여러 명사들과 교류하며 억눌렸던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마음껏 펼치려던 메리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바로 천연두에 걸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2년 전 남동생이 천연두에 걸려 세상을 떠났던지라 메리는 자신이나 아이들이 천연두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다행히 메리는 목숨을 건졌지만 피부는 거칠게 얽은 자국으로 뒤덮였다.

메리는 어떻게 하면 천연두를 예방할 수 있을지 궁리했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 에드워드는 콘스탄티노플 대사 겸 레반트회사의 대표로 임명되었다. 레반트회사는 영국에서 터키와 베네치아의 양모 공급과 직물 무역에서 각종 특혜를 독점적으로 행사하기 위해 만든 투자 회사였다.

메리는 콘스탄티노플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천연두는 우리 영국인들에게는 치명적이고 감염되기 쉬운 질병이지만, 이곳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에게는 그렇지 않아요. 이들은 ‘접붙이기’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있습니다. 무더위가 한풀 꺾이는 9월이 되면, 사람들은 접붙이기가 필요한 이들을 한자리에 모아요. 그러면 노부인들이 천연두 환자의 상처에서 뽑아낸 고름을 호두 껍데기에 담아서 가져옵니다. 큰 바늘로 네다섯 군데 상처를 내고, 작은 바늘로 고름을 떠서 넣습니다. 그리고 호두 껍데기로 상처를 문지르지요.”

메리는 이 시술을 받은 사람이 보통 9일째 되는 날부터 2~3일 정도 앓게 되며 이후 약간 발진이 생기다가 곧 낫는 것을 목격하고,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접붙이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사람들이 말하는 천연두의 바이러스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치사율이 높은 출혈성 천연두였고 다른 하나는 작은마마였다. 천연두의 치사율은 30~35%에 달했고, 출혈성 천연두에 걸리면 대부분 사망했지만 작은마마의 치사율은 1% 정도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작은마마에 걸렸던 사람은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용해, 사람들에게 작은마마의 고름을 ‘접붙이고’ 천연두를 예방했던 것이다.

1718년 메리는 대사관 외과의사인 찰스 메이틀랜드를 대동한 자리에서 자신의 다섯 살 난 아들 에드워드에게 접붙이기를 실시했다. 메리는 영국으로 돌아온 뒤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고 인두법을 실시하려 했지만, 사람들의 거부감은 컸다.

하지만 1721년 영국에 다시 천연두가 유행하기 시작했다. 메리는 메이틀랜드를 불러 자신의 딸에게도 접붙이기를 시술하게 하고, 그 사실을 캐롤라인 왕세자빈에게 알렸다. 사랑하는 아이들, 특히 왕위 계승자인 프레데릭을 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캐롤라인 왕세자빈은 국왕인 조지 1세를 설득하려고 우선 접붙이기의 안전성을 증명했다. 그는 뉴게이트 감옥에서 자원한 죄수 여섯 명에게 접붙이기를 시술하고, 이 시술 후 천연두에 걸리지 않음을 확인했다. 그다음에는 고아 열한 명에게 같은 시술을 했다. 그런 다음에야 캐롤라인 왕세자빈은 아멜리아와 캐롤라인 공주에게 접붙이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1722년의 일이었다.

캐롤라인 왕세자빈의 시도가 성공하며 이후 인두법이라 불리게 된 이 접붙이기는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영국에 이어 1768년에는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대제가 자신과 아들에게 인두법을 시술하게 했다. 최초의 예방접종은 이렇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고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지키려 한 여성들의 손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기자명 전혜진 (SF 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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