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원 작가의 ‘JWY.D.003.19’. 알아보기 힘든 흔적이 글자 이전의 드로잉으로 남겨졌다. ⓒ양지원 제공

생명뿐 아니라 사물도 마치 마음을 가진 것처럼 사람의 손길에 반응한다. 마구 헝클어진 물건을 차곡차곡 정리해두면 사람 손을 곱게 타서 윤기가 난다. 생명이 있는 생물인 사람의 감정과 행동과 습관이 물건에 오래 닿으면, 물건도 생물인 듯 성격이 생겨난다.

말과 글과 글자도 그렇다.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에는 ‘의미’와 ‘소리’와 ‘모양’이 있다. 이 모든 것이 인간의 정신 활동과 신체 활동의 직접적인 산물이라 생명의 속성이 더 강하다. 어떤 문화권에서는 문자의 형상만으로 부적을 만든다. 이렇게 글자의 형상에 주술적인 성격마저 부여하는 데에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나아가 언어는 스스로 의지와 성격을 가진 주체인 듯 행동하기도 한다. 말은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응답을 한다. 한 예를 들자면, 한국어의 호칭 ‘씨’가 그렇다. 오늘날의 ‘씨’는 통상 윗사람에게는 적절치 않아서, 일본어 ‘상(さん)’이나 영어 ‘미즈(Ms)’와 ‘미스터(Mr.)’만 한 존칭이 되지 못한다. 아마도 우리 사회가 ‘~씨’라고 부르는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온 경험이 쌓인 끝에 이렇게 된 것이 아닐까? 간결하고 입에도 잘 붙는 ‘씨’로부터 박탈해온 존중을 회복하자니 말이 길어지고 사물 존칭까지 쓰는 지경이 되었다. 말도 보복을 한다. 언어를 기능과 도구로만 여겨 함부로 무심코 사용하면 언어도 고달프다.

언어와 글자에는 이렇게 단순한 의사소통과 정보교환을 위한 기능을 초월하는 잠재력이 있다. 목적을 위해서만 부수적으로 딸려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충만한 감정과 신비를 품고 있다. 말이 그저 기능적인 도구에 머무르며 마구 다루어지지 않도록 살피는 일을 시(詩)가 해왔다. 그렇게 시가 언어와 글자를 향해 해오던 일을 시각 분야에서는 몇몇 현대미술 작가들이 한다.

양지원 작가는 그림과 글자의 경계를 허물며 좀 더 원초적인 몸짓의 자국을 남긴다. 그 몸짓의 흔적이 언어의 시원으로 다가가서 사람의 마음에 각별한 심상을 일으킨다. 2019년 서울 SeMA창고에서 있었던 개인전 〈모음 Moeum〉의 작품 ‘JWY.D.003.19’ 한 부분을 보자. 바닥에 나뭇가지가 툭 놓여 있고 낙서처럼 의미도 소리도 형상도 잘 알아보기 힘든 흔적이 글자 이전의 드로잉으로 남겨졌다. 음성언어로 체계화하기 이전의 잡음 같은 음향, 의미를 실어나르는 문자언어로 질서 잡히기 이전의 원시적인 몸짓이다.

국동완 작가의 ‘회광반조’. 활자 뒤의 빛이 글자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비춘다. ⓒ국동완 제공

고달팠던 언어가 스스로를 달래도록

양지원은 기능적인 쓰기를 넘어 말과 글자에 원초적인 생명성을, 현대인들이 더 이상 가닿지 못하게 된 시원의 신비를 감지해서 돌려준다. 글자가 자신을 떨면서 울려내는 발화를 영매나 사제처럼 전하는 예술가 양지원의 일을 ‘드로잉-포임(drawing-poem)’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또 다른 현대미술 작가인 국동완은 글자로부터 자신의 마음을 비추어본다. 몸으로 쓰는 글자가 글씨라면, 활자나 폰트는 기계를 위해 디자인된 글자다. 국동완의 작업은 활자에서 출발한다. 국동완은 자신의 드로잉에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이름을 붙였다. 불교에서 온 개념이다. 빛이 활자의 뒤에서 비쳐 들며, 글자 위에 그림을 그리는 작가 자신을 비춘다. 작가의 마음과 손이 빛과 활자에 반응하여 그림을 그려낸다. 마음을 정직하게 반응시키는 이 과정에는 어떤 계획도, 수정도 없다.

도판 속 ‘2020’은 ‘연결’ ‘발생’ ‘유행’ 등과 더불어 팬데믹의 용어다. 이 용어들은 작가와 우리의 마음에 불쑥 들어와 흔적을 새겨놓았다. 국동완의 그림은 활자를 씨앗으로 하지만, 씨앗을 덮으면서 그 씨앗을 품은 과육인 듯 자라난다. 글자는 본시 이 세상과 우리 마음의 복잡한 사건들을 간명한 기호의 체계 속에 압축한다. 그래서 글자의 기능에만 의존해 모든 미묘한 뉘앙스를 완벽하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작가는 그런 글자에게 더 제대로 기능하라고 질책하지도, 그 한계를 한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런 불가피성이 본질이라고 기꺼이 보듬는다.

기능 너머를 살피는 이 예술가들은 고달팠던 언어가 스스로를 달래도록 한다. 시와 예술을 가지지 못한 언어란 상상만 해도 건조하고 쓸쓸하지 않은가? 언어가 인간의 사회에서 다각적이고도 풍요롭게 공존하는 속에는 말과 글자를 살피는 예술가들의 존재가, 있다.

기자명 유지원 (타이포그래퍼·글문화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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