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 히트 타임슬립 로맨스’이자 추리물에 스릴러인 타이완 드라마 〈상견니〉.
ⓒ왓챠 제공

구인구직 매칭 플랫폼 ‘사람인’이 직장인 1705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51.9%가 올해 추석에 귀성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답했다. 지난해 설문에서 57.7%가 귀성을 포기한다고 답했는데, 2년 연속 귀성 포기자들이 절반을 넘었다. 어느 때보다 집에 머물 시간이 많은 추석이다. 〈시사IN〉 기자들이 ‘방콕 정주행’에 적합한 콘텐츠를 추천한다. 타이완 드라마, 자연 다큐멘터리, 스포츠 소재 다큐·드라마, 애니메이션, 웹툰, 게임 등 각자의 취향을 담았다. 랜선을 통해 세상과 감동을 만나는 추석 연휴가 되기를 소망한다.

〈상견니〉
눈을 뜨는 매일 아침은 다시 오지 않는 기회 - 전혜원 기자

“우리가 운명이라면 다시 만나겠지”라는 말을 실제로 들어본 적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남이란 의외로 서로의, 혹은 일방의 부단한 노력과 의지의 산물이어서, 우연이라 믿었던 마주침조차 실은 우연이 아니었음을 뒤늦게 깨닫기도 한다.

여기까지 썼는데 벌써 눈물이 차오른다. 그렇다. 타이완 드라마 〈상견니〉 얘기를 하려 한다. 이른바 ‘메가 히트 타임슬립 로맨스’. 후반부는 매회 입을 틀어막지 않을 수 없는 추리물이자 스릴러다(중간에 잔인한 장면이 있으니 눈을 감거나 스킵하길). 타이완 콘텐츠라곤 〈말할 수 없는 비밀〉밖에 안 본 나도 말 그대로 속수무책이었다. 45분짜리 에피소드 21개를 이틀 만에 다 봤다. 어느 커뮤니티에 올라온 ‘상견니 회차별 심경 변화’는 대략 이렇게 요약된다. ‘1~4화:흔한 연애물이군. 5~7화:오, 재밌어지네. 8~10화:??? 11~12화:???!!! 13~15화:!!!!! 16~20화:ㅅㅂㅅㅂㅅㅂ 21화:ㅠㅠㅠㅠㅠㅠㅠㅠㅠ.’

주변에서 “〈상견니〉 재밌어?”라고 물어보면 답하기가 간단치 않다. “어, 그게… 그러니까… 어흐흑.” 〈상견니〉를 몇 번씩 돌려 보는 등 드라마에 과몰입해 일상생활이 어려워진 사람을 ‘상친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스스로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러울 때, 모든 것에 지치고 심드렁해질 때, 마음이 어두워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을 때 이 드라마를 권한다.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과 상대방을 믿고 어려운 길을 기꺼이 선택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누군가를 구하는 주인공들의 용기가 묘한 위로를 준다. 눈을 뜨는 매일 아침이 세상 다시 오지 않는 기회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운명은 만들어가는 것이니까.

개인적으로 ‘일본 페미니즘의 오늘’이라 표현하고 싶은 노기 아키코 작가의 드라마 〈언내추럴〉 〈MIU 404〉 〈도망치는 건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를 추천할까 고민했다. 역시 인생과 인간관계에 생각이 많은 직장인 여자가 보기 좋은 일본 드라마 〈나기의 휴식〉도 리스트에 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상견니〉를 지나칠 수 없었다. 적어도 〈콘택트〉(2016), 〈인터스텔라〉, 〈너의 이름은〉처럼 ‘시간’을 매개로 한 이야기를 좋아한다면 후회하지 않으리라 장담한다. 〈상견니〉를 봤다면, 편의점에서 파는 타이완 골드메달 맥주에 우육면 컵라면을 먹으며 이 노래를 들어보자. 물론 유선 이어폰으로. ‘쏘이쟌스 장니옌징 비러치라이~.’

(작품 볼 수 있는 OTT:넷플릭스, 웨이브, 왓챠, 티빙, 쿠팡플레이)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가장 튼튼한 울타리가 ‘자연’임을 깨닫게 해주는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 ⓒ넷플릭스

〈나의 문어 선생님〉
다리 수만큼 풍부한 문어의 표현 - 김다은 기자

몇 년 전 횟집 앞에서 기함할 만한 광경을 본 적이 있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바닥에 살아 있는 대방어가 누워 있었다. 주방장으로 보이는 이가 커다란 몽둥이로 대방어의 대가리를 내리쳤다. 퍽, 퍽, 하는 소리가 사방에 울려 퍼졌다. 나는 그 장면을 보고 숨이 멎었다. 기이하고 비현실적이었다. 가을이 되어 ‘대방어’라는 글자가 횟집 앞에 걸릴 때면 나는 여지없이 몽둥이와 방어 ‘대가리’와 (방어와 내가 겪은) 타격에 대해 생각한다.

한때 기이하고 낯선 생물이 초월적 힘을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이 믿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산 채로 ‘탕탕이’가 되거나 길바닥에서 매를 맞는 존재로 전락했지만 말이다. 횟집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를 볼 때면 나는 ‘경외’라는 단어를 인간이 다시 회복할 수 있을지 자주 궁금해졌다.

다큐멘터리 〈나의 문어 선생님〉(2020)은 영화감독 크레이그 포스터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 해변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대서양의 위력을 체감하며 자랐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자연과 멀어졌고 어느덧 극도의 피로와 부담감에 짓눌려 그는 병이 들었다. 고향에 돌아온 감독은 다시 바닷속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숨이 막힐 것처럼 차가운 수온에 익숙해질 무렵 그의 앞에 ‘무언가 배울 것이 있는’ 생물이 등장한다. 문어다.

문어는 조개껍데기와 돌멩이를 긁어모아 자신의 몸을 바위처럼 위장한다. 기민하고 정확하다. 다시마를 망토처럼 휘둘러 천적인 파자마상어를 따돌리거나 우산처럼 몸을 펼쳐 바닷가재를 덮친 뒤 잡아먹는다. 야행성인 문어는 밤이 내려앉은 얕은 물에선 마트에 나온 1인 가구처럼 기분 좋게 포식하기도 한다. 어느 날 문어는 매일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털북숭이 인간(크레이그 포스터)에게 인사를 하기로 한다. 섬세한 빨판을 움직이며 인간의 손가락과 팔을 감싼 문어는 그의 가슴팍에 올라 편안하게 장난을 치며 감독을 ‘야생의 세계’로 초대한다. 문어는 1000개가 넘는 빨판으로 맛과 감각을 느낀다. 몸의 색깔과 무늬를 바꿔가며 의사소통을 한다. 지난달에는 상대를 정확히 겨냥해 진흙이나 조개껍데기를 던질 수 있다는 사실도 발견됐다. 지능이 높다는 증거다. 신경이 온몸에 퍼져 있어서 각각의 다리가 다른 성격을 갖기도 하는데 무엇보다 “문어의 생각을 읽는 어려움은 표현이 너무 풍부하다는 데 있다(〈문어의 영혼〉 사이 몽고메리 지음, 글항아리 펴냄)”.

다큐에서 가장 매혹적인 장면은 잠자듯 감긴 문어의 눈이 천천히 떠지는 클로즈업 신이다. 반달처럼 휘어진 선이 조금씩 벌어지면서 세상을 향해 열린다. 감독은 그 눈을 보며 묻는다. 문어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 누구도 식당 수족관에 갇힌 물고기를 보며 이렇게 묻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이러한 아름다운 질문을 되찾을 수 있을까? 조심스럽고 다정한 상상력을 회복할 수 있을까? 확실한 것은 ‘문어 선생님’을 통해 감독의 훼손된 일부가 재건되었다는 점이다.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늘 그런 식으로 회복된다. 인간이 기댈 수 있는 가장 튼튼한 울타리가 ‘자연’임을 다시금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다.

(작품 볼 수 있는 OTT:넷플릭스)

 

3부 리그로 강등된 축구팀과 이 팀을 응원하는 팬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죽어도 선덜랜드〉. ⓒ넷플릭스

〈죽어도 선덜랜드〉 〈리버풀FC:엔드 오브 스톰〉
‘그깟 공놀이’가 마음을 움직인다 - 차형석 기자

OTT에 접속해 망설이는 편이긴 하지만, ‘뭐 볼까’ 하다가 이내 손이 가는 콘텐츠가 있다. 바로 ‘스포츠 다큐’다. 승부의 세계, 긴장과 환호의 순간은 지켜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들썩인다.

〈죽어도 선덜랜드〉 시즌 1·2가 그중 하나다. 이 다큐멘터리를 처음 볼 때만 해도, 선덜랜드라는 팀의 존재조차 몰랐다. 한때 기성용·지동원 선수가 몸담았던 영국 프로축구팀이라고 하는데, 그들이 뛰는 경기 중계를 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클릭해 시즌1을 후딱 보고, 시즌2를 기다렸다. ‘죽어도 선덜랜드’라고 외칠 정도는 아니지만 선덜랜드의 실제 경기 결과가 핸드폰에 뜨게끔 ‘자동설정’ 해두게 되었다.

이 다큐는 2017년 여름 1부 리그(프리미어리그)에서 2부 리그(챔피언십)로 강등된 선덜랜드 AFC를 조명한다. 인색한 구단주는 다큐 제작으로 인기를 끌어 투자금을 유치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고, 다큐 제작진은 2부 리그에서 1부 리그로 올라가는 ‘감동 스토리’를 예상했으리라.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선덜랜드는 2017/2018 시즌에 최하위를 기록하며 3부 리그(리그원)로 추락했다. 카메라는 경기장의 안과 밖, 선수와 구단 운영진과 팬들의 반응을 촘촘히 기록한다.

이 다큐가 흥미로운 것은, 상업 스포츠의 이면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준다는 점이다. 구단은 1부 리그에 걸맞은 규모로 커졌는데, 2부 리그로 강등되면서 적자에 허덕인다. 팀 내에서 고액 연봉을 받는 선수는 사고를 치거나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팀 공격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선수는 이적 시기가 되자, 속내를 감추고 있다가 결국 다른 팀으로 떠나버린다. 이적 시한이 닥쳐서 구단 운영진은 부족한 예산과 새 선수 충원 사이에서 전전긍긍한다. 유명 선수가 등장하지 않아도, 낯선 구단 사무실 속 풍경은 시선을 잡아끈다.

무엇보다 눈길이 가는 건 선덜랜드의 팬들이다. 선덜랜드는 영국 동북부 지역의 산업도시다. 한때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락해가는 도시. 선덜랜드의 축구는 이 도시의 노동자들에게 큰 위안거리였다. 마을 신부는 미사에서 선덜랜드의 승리를 기원하고, 나이 많은 택시 운전기사는 자신의 팬심과 그 이력을 술회한다. 3부 리그로 떨어졌는데도 3만 관중이 모여든다. 수많은 인파가 경기장으로 걸어가는 광경은 이 도시의 사람들과 축구가 꽤 오랫동안 동행해왔다는 걸 보여준다. 연이은 패배 앞에서 ‘죽어도 선덜랜드’를 외치는 팬들의 모습은 적잖이 감동적이다.

〈죽어도 선덜랜드〉가 패배의 기록이라면, 〈리버풀 FC:엔드 오브 스톰〉은 승리의 기록이다. 30년 만에 1부 리그에서 우승한 리버풀 FC의 2019/2020 시즌을 담았다. 시즌 종료 7경기를 남기고 우승을 확정지었다. 무난한 우승이었지만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폭풍’이 몰아쳤다. 코로나19 팬데믹이었다. 리그 중단과 ‘무관중 경기’. 인류가 대재난을 겪을 때, 축구는 어떤 의미인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카메라는 여러 나라의 리버풀 팬을 비춘다. 중국 우한에서 한 청년은 리버풀 경기를 보며 ‘봉쇄의 시간’을 견딘다. 꼭 리버풀 팬이 아니더라도, 영화의 마지막에 흘러나오는 리버풀 응원가 ‘유 윌 네버 워크 얼론(You will never walk alone)’이 달리 들린다. ‘그깟 공놀이’가 이렇게 마음을 움직일 줄이야.

(작품 볼 수 있는 OTT:〈죽어도 선덜랜드〉/넷플릭스, 〈리버풀 FC:엔드 오브 스톰〉/왓챠)

 

프로레슬러의 세계에 입문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드라마 〈글로우:레슬링 여인천하〉. ⓒ넷플릭스

〈글로우:레슬링 여인천하〉
네가 무엇이고 싶든 그 자체로 존엄하다 - 나경희 기자

지난 3월 제주퀴어문화축제를 조직했던 트랜스젠더 김기홍씨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그의 부고를 담은 기사가 미처 인쇄되기도 전에 변희수 하사의 비극적 소식이 연달아 전해졌다. 성전환 수술을 했다는 이유로 군에서 강제 전역을 당했지만 “기갑의 돌파력으로 그런 차별 없애버리고 살 수 있다”라고 말하던 그였다.

국방부 앞에서 열린 변희수 하사 추모 시위를 취재한 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휴대전화로 포털 뉴스를 들락날락했다. 기사마다 변희수 하사가 ‘진짜 여자가 아니다’라는 댓글이 꽤 많이 달려 있었다. 이 링크 저 링크를 누르며 타고 들어간 곳은 여성주의 책을 만든다는 출판사의 SNS 계정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므로 인정할 수 없다는 글로 도배돼 있었다.

고양이 가면을 쓴 사람이 춤을 추는 영상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트랜스 고양이’가 ‘인간의 몸에 갇혀버린 고양이의 정신적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트랜스젠더가 여자라고? 그럼 난 고양이가 되고 싶으니까 이제부터 나를 고양이라고 불러줘”라는, 전형적인 트랜스젠더 혐오 논리였다. 그 영상을 보고 한 캐릭터가 떠올랐다.

여기 스스로를 늑대라고 생각하는 한 여성 ‘실라’가 있다. 실라는 단 한 번도 늑대 분장을 벗어본 적이 없다. 늑대 얼굴처럼 짙은 화장을 하고, 뮤지컬 〈캣츠〉 배우들이 입고 무대에 등장할 법한 털 달린 옷을 입고 다닌다. 네 발로 걸어 다니거나, 생고기를 먹기도 한다. 처음에는 함께 일하는 동료들도 그를 꺼린다. 하지만 수많은 갈등 끝에 오해가 풀리고, 실라 역시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

실라의 생일날, 동료들은 롤러스케이트장에서 그의 깜짝 생일파티를 준비한다. 동료들의 진심을 안 실라는 스케이트를 신고 신나게 질주한다, 늑대처럼 포효하며. 동료들은 실라의 행복한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며 생일 케이크를 준비한다. 케이크에는 ‘106’이라는 숫자가 꽂혀 있다. “개 나이로 환산한 거야?” “정확히는 늑대 나이지.” “개였으면 87세야.” “우리가 계산했어.” 케이크를 둘러싸고 오가는 동료들의 따뜻한 목소리는 무심한 듯 다정하다.

동료들은 초가 녹기 전에 실라를 부르지만, 그는 이미 스케이트를 타느라 무아지경이다. 동료들은 웃으며 케이크의 촛불을 대신 분다. “실라도 우리의 마음을 알 거야.” 서로를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서로의 인정을 바라지 않고 그 자체로 각자 존엄한 상태. 미드 〈글로우〉는 그 상태를 이렇게 우화적인 방식으로 보여준다.

〈글로우〉는 우여곡절 끝에 프로레슬러의 세계에 입문한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각자의 꿈과 상처를 서로 배려하며 합을 맞춰나가는 과정이 담겨 있다. 그들은 서로를 함부로 평가하지 않고 다름을 인정하되 한 팀으로 움직인다. 1980년대가 배경이지만, 그 속에 녹아 있는 페미니즘 사상은 2017년이다. 현재 시즌3까지 나왔고, 시즌마다 10부로 이뤄져 있다. 한 편 길이가 30분 내외이니, 부담스럽지 않게 볼 수 있다.

(작품 볼 수 있는 OTT:넷플릭스)

 

탈레반 집권 아프간에서 여성이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파르바나:아프가니스탄의 눈물〉. ⓒ넷플릭스

〈파르바나: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생생하게 접하는 아프간 여성의 삶 - 이은기 기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의 수도 카불을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아프간의 여성들이었다. 언젠가 봤던 파르바나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을 여성들이 걱정됐다.

파르바나는 애니메이션 영화 〈파르바나:아프가니스탄의 눈물〉 속 열한 살 아프간 여성이다. 영화는 탈레반 집권기의 아프간을 배경으로 한다. 시기를 명시하진 않았지만 2001년이라 추정된다. 카불 상공을 자주 오가는 미군 정찰기가 전쟁이 임박했음을 알려준다.

파르바나의 아버지 누눌라는 카불 시장에서 단출한 좌판을 꾸려 다섯 식구의 생계를 책임진다. 전쟁에서 오른쪽 다리를 잃은 아버지 곁을 파르바나가 지킨다. 파르바나 가족이 사는 단칸방은 초라하지만, 온기가 맴돈다. 그러나 그것도 ‘성인 남성’인 아버지가 있을 때의 얘기다. 아버지가 금기된 책을 소지했다는 이유로 교도소에 끌려간 이후 파르바나와 엄마 파테나, 언니 소라야, 어린 남동생의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탈레반이 집권한 아프간에서 여성은 남성과 동행하지 않고는 거리에 나설 수 없다. 파테나는 전신 부르카를 입고 누눌라를 구하러 떠났다가 무참하게 폭행당한다. 여성은 돈을 벌 수도, 물건을 살 수도 없다. 꼼짝없이 집에 갇힌 파르바나 가족이 할 수 있는 건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다. 그사이 식량이 다 떨어졌다.

우리의 파르바나는? 머리를 자르고 토피(이슬람교 남성 신도들이 쓰는 동그란 모자)를 쓴 채 집 밖으로 나선다. 이후엔 가족을 지키고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여성은 집 안에만 있으라”는 억압과 맞서 싸우는 파르바나의 ‘영웅 스토리’가 전개된다.

기사로만 접했던 아프간 여성들의 삶을 생생하게 접하고 싶은 이들에게 〈파르바나〉를 추천한다. 카불 시장의 뒷골목, 노을이 짙게 내린 카불, 황량한 바위산 같은 아프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건 덤이다. 내가 파르바나를 만날 수 있었던 것도 SNS 속 낯선 누군가의 추천 덕분이었다. 이 글을 통해 누군가 용기 있는 파르바나의 삶에 닿기를 바란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파르바나는 자신처럼 머리를 자르고 거리에 나와 돈을 버는 또래 여성 ‘샤우지아’를 만난다. 파르바나는 언젠가 바다에 갈 거라는 샤우지아와 20년 뒤 바다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올해가 약속한 바로 그 2021년이다. 야속하게도 탈레반 재집권 이후 현재 아프간 여성들은 또다시 극도로 통제된 삶을 강요받고 있다. 하지만 용기를 내 억압에 저항하는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거리에 나와서 “과거로 후퇴할 수는 없다”라며 여성들의 교육과 일할 기회를 보장하라고 외친다. 총을 든 탈레반의 위협에도 “우리는 함께다. 겁내지 말자”라며 자리를 지킨다. 서른한 살이 된 파르바나와 샤우지아는 어디에서건 만났을 것이다. 아마도 더 용감한 여성이 되어서.

(작품 볼 수 있는 OTT:넷플릭스)

 

가족관계에서 아이들이 겪는 폭력의 단면을 섬세하게 보여주는 웹툰 〈집이 없어〉. ⓒ네이버웹툰

〈집이 없어〉
서로가 서로에게 돌아갈 ‘집’이 된다 - 주하은 기자

집은 공간 그 이상이다. 예컨대 ‘집에 가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집’은 단순히 특정한 공간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집은 관계로 이루어진다. 단골 카페 또는 식당과의 관계, 집 안 물건들과의 친숙한 관계,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갖춰질 때 집은 비로소 집이 된다. 반대로 그 관계들이 끊어진다면 같은 공간이라도 집의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익숙한 주변 상권이 사라지거나 내 물건들이 모두 없어진다면 그곳은 ‘집’이라고 하기 어렵다.

네이버 웹툰 〈집이 없어〉의 주인공들은 집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가족과의 관계에서 결여를 겪는 아이들이다. 각자의 사정은 다양하다. 해준은 교통사고로 홀어머니를 잃었고, 마리는 구타를 일삼는 오빠, 방관하는 홀아버지와 함께 살아야 한다. ‘정상 가족’ 범주에 해당하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로 결여를 겪는다. 하라는 그들 자신의 꿈을 강요하는 부모로부터 재능을 끊임없이 의심받고, 주완은 자녀에게 집착하는 부모 밑에서 사생활을 빼앗기기도 한다. 해준의 말을 빌리자면 “집은 힘들고 지칠 때 빨리 오고 싶어져야 집이다”. 관계에서 결여를 겪는 아이들에게는 집이 있어도, 집이 없다.

〈집이 없어〉는 물리적 폭력부터 정서적인 폭력까지, 가족관계에서 아이들이 겪는 폭력의 단면을 섬세하게 보여준다. 그 단면이 너무 적나라해서 때로는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까지 느껴진다.

아이들은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무력감에 빠지거나 분노한다. 동시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하며,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스스로 위로하기도 한다. 오빠에게 구타당한 마리가 “오빠가 나 되게 잘 챙겨줘…. 우리 평소에 장난도 많이 치고”라고 변명하다가 “오빠가 화나면 내가 나로 있는 게 안 돼…. 내가 사람이 아니라 동물이 된 거 같아. 야생에서 사는 것 같아”라고 깨달음을 얻게 되는 모습이 대표적이다.

가족관계에서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들은 서로에게서 대안적인 관계를 발견한다. 물론 아이들은 갈등하고, 서로를 의심하기도 한다. 상처 많은 아이들이 만나 서로에게 흠 하나 없는 낙원이 되어주리라는 낙관은 환상일 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때때로 서로를 지지해준다. 한 기숙사 안에서 같이 살아가고, 학교생활을 함께하며 트라우마가 자기만의 것이 아님을 알아간다.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아이들에게는 문제가 생겼을 때 돌아갈 ‘집’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그 ‘집’이 되어준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크고 작은 상처를 겪은 사람이 〈집이 없어〉 속 주인공만은 아닐 것이다. 가까이 지낸 기간이 긴 만큼 누구에게나 가족에게서 받은 아픈 기억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주인공들이 서로를 알아가듯, 독자도 아이들의 상처를 알아가며 이해하고 미움을 덜어내고 마음 깊은 곳에서 응원하게 되는 과정을 겪는다. 각기 다르면서도 비슷한 아이들의 상처를 알아가는 과정은 동시에 독자가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집을 다시 짓는 일이기도 하다.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 〈크루세이더 킹즈3〉.

〈크루세이더 킹즈3〉
가문의 번영을 위해 주군과 국가는 뒷전 - 이상원 기자

함께 모이기 어려운 한가위, 가족의 의미를 간접적으로나마 되새길 수 있는 게임을 소개한다. 지난해 9월 출시된 〈크루세이더 킹즈3〉(〈크킹3〉)이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제격인 ‘타임머신 게임’류에 속한다.

〈크킹3〉는 중세를 배경으로 한 역사 시뮬레이션 게임이다. 플레이 방식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나 〈문명〉 시리즈와 유사하다. 배경은 867년과 1066년 유럽 전역과 아시아 대부분, 북아프리카다. 플레이어는 동로마제국 황제부터 아이슬란드 바이킹 영주까지,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모든 사람이 되어볼 수 있다.

〈문명〉 부류의 게임과 달리 〈크킹3〉는 국가나 사람이 아니라 ‘가문’이 중심이다. 〈삼국지〉보다는 드라마 〈왕좌의 게임〉에 가깝다. 가문의 번영이야말로 이 게임의 지상 목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군의 안위는 물론 국가의 이익도 경우에 따라선 뒷전으로 밀린다. 이 게임에 ‘충의지사’는 없다. 잉글랜드가 프랑스를 공격했을 때 프랑스 봉신인 ‘나’는 도리어 쾌재를 부른다. 왕권이 약해진 틈을 타 독립을 꾀할 수도 있고, 이웃 봉신의 땅을 점령할 수도 있다. 이웃 나라와 동맹을 맺고 주군을 공격하는 일도 흔하다. 차근차근 봉토를 늘리고, 나와 같은 성씨인 사람들을 고관대작에 올리는 게 이 게임의 목적이다. 영지를 가진 가족과 친척들은 내가 위기에 처했을 때 한뜻으로 도와준다.

식구들끼리 훈풍만 부는 건 아니다. 주된 갈등 요인은 상속 문제. 땅을 둘러싼 분쟁이 끊이질 않는다. 가령 사망한 아버지가 서울·경기도·강원도 영지를 가진 공작(公爵)이었다면, 아들 셋은 저마다 영지를 상속받아 서울 공작·경기 공작·강원 공작으로 독립한다. 플레이어가 아버지 땅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는 형제를 암살하거나 수차례에 걸쳐 전쟁을 벌여야 한다. 내가 가진 것에 만족할 수도 있지만 형제들도 같은 생각이라는 보장은 없다. 어제까지 연회에서 웃고 떠들었던 동생이 말도 안 되는 ‘명분’을 이유로 공격해오거나, 음식에 독을 타 나를 비명횡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살얼음을 걷는 기분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기이하게도 이 게임의 재미는 계획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극대화된다. 두 아들의 상속을 정리해두고 죽을 날만 기다리던 도중 갑자기 늦둥이가 태어났을 때, 황제의 가족을 암살한 사실이 폭로돼 영지를 몰수당했을 때, 3대에 걸쳐 이룩한 제국이 흑사병 때문에 무너졌을 때 플레이어는 좌절과 함께 새로운 목표의식을 얻는다.

(특히 중세 유럽의) 역사를 알면 이입하기 쉽지만 몰라도 상관없다. 합스부르크나 호엔슈타우펜, 카페와 같은 유명한 가문을 골라잡아 그들의 행보를 재현하는 것도 즐겁지만,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한 이들을 가상 세계에서나마 빛나게 하는 것도 보람차다. 아일랜드 영주로 시작해 전쟁을 배우고 카스티야 왕이 되어 암살을 익히자. 연휴가 끝날 때쯤이면 일개 백작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대관시키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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