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23일 정부세종청사 앞에서 보건의료노조가 공공의료 확충 등을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민주노총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보건의료노조)은 9월2일 오전 7시를 기해 총파업을 예고했다. 보건의료노조는 보건의료인력 확충과 처우 개선, 공공의료 확충,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을 요구하며 지난 5월부터 3개월간 보건복지부와 협상을 벌여왔다.

파업을 하루 앞둔 9월1일 오후 3시 13차 노정 실무협의가 시작됐다. 양측은 12차례 협상을 하면서 큰 틀에서는 공감대를 이루었지만 ‘5대 핵심 과제’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상태였다. 5대 핵심 과제는 ‘코로나19 전담병원 인력 기준 마련’ ‘공공의료 확충 세부계획 마련’ ‘간호사 1인당 환자수 법제화’ ‘교육 전담 간호사 확대’ ‘야간 간호료 확대’이다. 교섭 직전인 오후 2시40분에는 김부겸 국무총리가 교섭장을 찾았다. 김 총리는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과 교섭 실무진을 만나 “대승적인 결단”을 부탁했다.

당초 노조는 협의 결과 발표 시간을 밤 9시로 정했으나 협상이 길어지며 밤 11시로 연기되었다. 그사이 노조는 정부와 조율한 최종안을 두고 임시대의원회의를 개최했다. 3시간에 걸친 토론 끝에 대의원 83%가 찬성해 최종안을 수용하기로 결정했다. 최종안에는 노조가 요구한 주요 쟁점들이 대부분 담겼다. 권덕철 보건복지부 장관과 나순자 위원장은 9월2일 오전 2시 노정 교섭 합의문에 최종 서명했다. 총파업 돌입 5시간 전이었다.

보건의료노조는 간호사 직종이 조합원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의사 조합원은 없다. 조합원들이 소속된 의료기관별로 보면 사립대병원이 50%, 국립대병원·지방의료원·특수목적병원 등 공공병원이 38.5%이다. 국내 전체 의료기관 중 공공병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10% 남짓인 점을 감안할 때 공공병원 보건의료 노동자 대다수가 보건의료노조에 가입돼 있는 셈이다. 공공병원에 종사하는 간호사 등 보건의료 인력이 파업에 들어간다면 코로나19 치료에도 타격을 피할 수 없다.

특히 전담병원으로 지정돼 코로나19 일반 환자를 받는 지방의료원들이 가장 위태로운 처지에 서 있었다. 의료기관은 노동조합법상 필수공익사업으로 분류된다. 파업을 하더라도 필수인력은 유지해야 한다. 응급실, 중환자실, 분만실, 신생아실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에 따라 파업에 들어가더라도 코로나19 중환자실 간호인력은 그나마 유지가 가능했다. 하지만 전담병원의 일반병동이나 지자체 생활치료센터에서는 의료인력이 대거 파업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파업이 현실화되면 코로나19 환자의 입원, 진료, 퇴원 프로세스가 일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노정 합의가 극적으로 타결되며 임박한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 ⓒ시사IN 이명익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조건부 찬성

감염병 재난 위기에서 노조가 총파업을 결의하게 된 바탕에는 절박함이 있다. 의료진의 소진이 버티기 힘든 수준에 도달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간호사들을 절망하게 했다. 안수경 보건의료노조 국립중앙의료원 지부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3년 사스, 2015년 메르스 위기 때도 국립중앙의료원에 근무하고 있었다. 시간만 흘렀을 뿐이지 감염병 환자를 간호하는 여건은 나아진 게 없다. 지난해 3월 1차 유행 당시 조합원 20명과 대구 동산병원에 지원을 나갔다. 그때부터 언론 인터뷰 등 기회가 있을 때마다 ‘코로나19는 팬데믹이 되었기 때문에 장기전으로 간다. 예산과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해서 훈련된 인력을 확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1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는데 현장은 그대로이다.”

정부의 대책은 환자가 폭증하는 시기에 단기로 간호사를 모집해 코로나19 병동에 투입하는 데에 치중됐다. 간호사들은 이 대책이 의료진을 더 지치게 만들었다고 말한다. 2~4주 잠깐 있다 가더라도 트레이닝이 필요한데 그 부담은 기존 의료진이 떠맡게 된다. 숙련되지 않은 인력이니 전문성이 필요한 업무는 맡기기가 어렵다. 게다가 급하게 파견 인력을 구하느라 높은 임금을 제시했는데 기존 간호사와 격차가 2~3배 가까이 난다. 안수경 지부장은 “정부에서는 ‘인력 몇 명 보강’ 이런 식으로 발표하면 끝이지만 현장의 갈등은 심각하다. 대체 누가 이런 아이디어를 냈나 싶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노조와 정부 협상에서도 ‘코로나19 대응 의료인력 기준 마련’이 핵심 과제로 꼽혔다. 양측은 코로나19 중증도별 근무당 간호사 배치 기준을 9월까지 세우고 10월까지 세부 실행방안을 마련하기로 합의했다. 부족한 간호인력은 전담병원과 협력병원이 직접 채용한다. 파견 인력을 받는 대신 적정 인력 기준을 만들어 병원이 직접 채용하되 그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방식이다.

합의안에는 코로나19 대응 인력뿐만 아니라 간호사 1인당 실제 환자수를 제도화하는 계획도 담겼다. 노조 요구안을 설계한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정책연구원장은 코로나19 유행 이전부터 간호사들의 업무 강도는 높은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그동안 한국 의료는, 간호사는 과로사하지 않고 환자는 의료사고가 나지 않는, 딱 그 정도의 위태로운 균형에서 버텨왔다. 이미 톡 치면 넘어갈 만큼 과부하가 걸려 있는데 코로나19가 덮쳤다.”

안수경 보건의료노조 국립중앙의료원 지부장. ⓒ시사IN 이명익

간호사 면허 소지자에게 병원은 그리 매력적인 일터가 아니다. 전체 간호사 43만명 가운데 의료기관에 근무하는 간호사는 22만명 수준이다. 이 가운데 1년 미만 간호사의 사직률이 42.7%에 달한다. 당초 노조는 미국 1대 5, 일본 1대 7처럼 간호사 대 환자 비율을 법제화하자고 요구했으나 기존 제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 국내에도 간호사와 환자 비율을 따져 각 병원에 등급을 매기는 ‘간호등급 차등제’가 있지만 신고 병원이 저조해 실효성이 떨어진다. 노정은 간호등급 차등제 개편 방안을 2022년까지 마련해 2023년부터 시행하기로 했다.

공공의료 강화도 노조가 최우선으로 요구하는 사안이었다. 정부와 노조는 2025년까지 70여 개 중진료권마다 한 개 이상의 ‘책임의료기관’을 지정해 운영하기로 했다. 본래 노조 요구안은 ‘공공병원’ 지정이었으나 최종안에는 ‘책임의료기관’으로 수정됐다. 지역별 책임의료기관은 공공병원이 주로 맡지만 민간 의료기관이 배제되지는 않는다. 보건의료노조 등이 참여하는 ‘공공의료 확충 및 강화 추진 협의체’가 꾸려질 예정이다.

나순자 보건의료노조 위원장은 “대의원 83%가 찬성했지만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조건부 찬성이었다. 이번 합의문은 공공의료 확충과 인력 확충의 첫걸음이라는 점에서 소중하다”라고 협상 타결 직후 말했다. 이창준 보건복지부 보건의료정책관은 “의료 현장에서 어려움이 없도록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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