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5일 아프가니스탄의 수도 카불의 대통령궁을 점령한 탈레반 조직원들. ⓒAP Photo

적과의 동침은 가능할까? 미국이 8월31일을 기해 20년째 아프가니스탄(아프간)을 점령해온 미군을 완전히 철수시킨 뒤 지긋지긋하던 아프간 전쟁에서 완전히 손을 뗀 모양새다. 하지만 타도 대상이던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간을 재장악한 뒤 미국은 탈레반 새 정부와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지 딜레마에 빠졌다. 현재 미국은 아프간 내 반미 테러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서도 현실적으로 탈레반 정부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지 않을 수 없는 어정쩡한 상황이다.

미국 바이든 행정부는 최근 미국인과 아프간 조력자들의 대피 과정에서 탈레반이 적극 협조한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9월 초 현재 탈레반 새 정부를 공식 인정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우리는 탈레반을 신뢰하지 않지만 이들이 아프간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기에 앞으로도 양측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은 시인했다.

미국은 탈레반의 카불 점령(8월15일) 이후 미군 철수 시한인 8월31일까지 미국인과 현지 아프간 조력자 등 약 11만명을 아프간에서 대피시켰다. 그 과정에서 탈레반의 협조를 받았다. 하지만 아프간에는 미군 통역관으로 근무했거나 미국 대사관, 비정부기관 등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탈레반의 잠재적 보복 대상인 아프간 조력자 수천 명이 남아 있다. 미국인 수백 명도 아프간을 탈출하지 못했다. 이들을 안전하게 구출하려면 탈레반 정부와 협력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이 탈레반 정부를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또 있다. 아프간에 확고한 뿌리를 둔 반미 테러 세력 때문이다. 특히 8월26일 카불 공항 근처에서 미군 13명 등 최소 170명의 희생자와 200명 넘는 부상자를 낸 폭발 테러의 주범 ‘IS-K(이슬람국가 호라산)’는 미국이 예의 주시 중이다. 바이든 대통령이 국내외의 연기 요청에도 당초의 철군 시한(8월31일)을 관철한 까닭도 바로 IS-K의 지속적인 테러 위협 때문이었다.

미군이 주둔할 당시엔 군 정보조직과 중앙정보국(CIA)이 아프간 현지에 대(對)테러 기지와 인력을 유지해 이런 테러 집단을 감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미군 철군으로 이런 인프라가 모두 사라졌다. 미군 측은 철군 시한 며칠 전 카불 공항 외곽의 ‘독수리 기지’란 CIA 시설을 폭파했다. 아프간 현지인을 대테러 요원으로 양성하던 곳이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미국이 향후 테러 감시 기능을 복원하기 위해서도 탈레반과의 협조가 불가피하다.

아프간에는 IS-K 이외에도 알카에다, 하카니 네트워크(Haqqani Network) 같은 테러단체들이 있다. 하지만 미국 처지에서 당면한 최대 위협 세력은 아프간 민간인과 공무원은 물론이고 탈레반에 대해서도 크고 작은 테러 공격을 일삼아온 IS-K다. 최근 카불 공항 테러로 악명을 다시 한번 떨친 IS-K는 극렬 이슬람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한 분파로 아프간 동부와 북부를 근거지로 삼고 있다. 탈레반에조차 불만을 가진 세력들이 결성했고 그 수는 2000여 명으로 추산된다.

IS-K의 최대 적수는 탈레반이다. 특히 아부 오마르 알 호라사니 등 IS-K의 지도급 인사 9명이 탈레반에게 사살된 뒤 양측은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로 돌입했다. IS-K는 카불 테러 직후 발표한 성명에서 “탈레반이 미국과 손잡고 미군 부역자인 아프간 통역관들과 스파이들을 대거 대피시켰다”라고 맹비난했다. 탈레반을 ‘미군 부역자’라고 비난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IS-K는 미국과 탈레반 양측에 ‘공동의 적’인 셈이다.

8월31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아프간 전쟁 종식에 대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P Photo

탈레반 정부 승인 딜레마

미국은 미군 철수 후 IS-K의 준동을 막기 위해서도 아프간 현지에 나름의 정보조직을 시급히 복구하고 현지 조력자들을 확보해야 한다. 탈레반도 아프간 동부와 북부의 산간 지대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IS-K를 섬멸하기 위해선 지금 같은 게릴라식 전투보다는 미군의 공습이 절실히 필요하다. 〈뉴욕타임스〉는 미국 정보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만일 탈레반이 아프간 내 테러조직에 대한 미군 공습을 허용하고 관련 정보를 제공한다면 미국은 앞으로 탈레반 정부와 협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라고 전했다.

탈레반 정부가 테러 문제를 연결고리로 삼아 미국과 협력관계를 구축한 뒤 향후 미국의 공식 인정을 받아내려 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탈레반은 국제사회, 특히 바이든 행정부의 승인을 통해 94억 달러 규모 아프간 중앙은행 자금에 대한 동결을 해제시켜야 한다.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등의 자금지원을 얻어내 경제난을 해결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아프간은 식량과 연료는 물론 전기까지 대부분의 생존 수단을 수입에 의존해왔다. 미국이 동결한 94억 달러는 아프간 경제가 향후 18개월 정도 버틸 수 있는 돈이다. 미국이 이 자금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아프간 주민들이 심각한 경제적 재앙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게 국제구호단체들의 한결같은 지적이다. 이미 아프간 북부 도시 쿤두즈에선 밀가루 값이 41%, 휘발유 값이 63%까지 치솟은 것으로 알려졌다. 동결 자금이 풀리지 않으면 경제난이 가중돼 전국적인 물가 폭등과 기아 급증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도 적지 않다.

이를 모를 리 없는 탈레반 지도부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희망한다는 점을 강력히 천명했다. 특히 이들은 아프간 장악 후 알카에다와 결별하고 아프간이 테러조직의 미국 공격기지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공약했다. 하지만 미국은 탈레반 정부가 정말 테러를 근절하고 여성을 포함한 자국민 인권을 존중할 것인지 여부를 살펴본 뒤 태도를 정할 계획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국을 포함한 각국 정부가 공식 인정을 요구하는 탈레반 정부의 절박성을 지렛대로 삼아 이들이 좀 더 순응적인 태도를 취하도록 설득해야 한다”라고 촉구한 바 있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 패한 미군이 철수한 지 20년 뒤인 1995년에야 베트남을 정부로 인정했다. 탈레반에 대해서도 그렇게 할까? 그때와 달리 지금의 미국은 국제정치 역학상 탈레반 정부 승인을 무한정 미룰 수 없는 상황이다. 러시아와 중국, 이란은 아프간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복원을 꺼려 탈레반 정부를 조만간 인정할 태세다. 국제위기그룹(ISG)의 중국 분석가인 아만다 샤오는 최근 기고문에서 “중국은 아마도 파키스탄 정부와 동시에 아니면 직후에 탈레반 정부를 승인할 것”이라고 관측했다. 미국과 적대 관계인 이란은 이미 아프간을 탈레반이 선호하는 이름인 ‘이슬람 에미리트’로 바꿔 부르기 시작했다.

특히 미국의 우방인 터키와 카타르도 아프간과의 경제관계 증진을 원한다는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실제 아프간에는 전기자동차, 휴대전화 및 랩톱 컴퓨터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을 비롯해 금·동·코발트·철 등 1조 달러 가치의 광물자원이 매장돼 있는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특히 미국 국방부는 2010년 여름 내부 보고서에서 “아프간은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로 볼 수 있다”라며 아프간의 풍부한 리튬 자원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클린 에너지’를 국책의 핵심 과제로 내건 미국 바이든 행정부로서도 다른 나라에 선점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선 탈레반과의 관계 개선을 서두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탈레반 정부가 테러 근절 및 인권 존중 의지를 확실히 보이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이 섣불리 승인할 경우 국내외 비판이 거셀 것이 확실하다. 바이든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이 만만찮다. 특히 바이든은 ‘아프간 주둔 미군이 졸속 철군했다’는 비판을 야당인 공화당은 물론이고 우군인 민주당 의원들로부터도 받고 있다. 따라서 향후 탈레반 새 정부의 인정 여부를 놓고도 바이든 대통령은 의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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