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한국의 시민 1인이 외래진료를 받은 횟수는 연간 17.2회로 OECD 회원국 평균 6.8회보다 2.5배 많다. 사진은 외래 방문자로 붐비는 종합병원 원무과 풍경.ⓒ연합뉴스

건강검진을 받을 때마다 긴장하는 나이가 되었다. 몇 해 전 건강검진 결과에 따라 만성질환자로 등록했고 올해 또 항목을 추가했다. 병을 알려주는 건강검진이 반가울 리 없지만 사실 고맙기도 하다. 1년에 한 번씩은 잊지 않고 나의 건강에 관심을 가져주고 더 커지기 전에 질환을 알려주니 말이다.

그런데 딱 검진뿐이다. 결과를 받은 이후는 모두 내 몫이다. 어느 병원을 가야 할지, 혹시 중증질환이면 다음에 무엇을 해야 할지 수소문해야 한다. 우선 인터넷을 뒤지지만 수많은 정보 앞에서 머리는 더 혼란스러워진다. 이럴 때 오랫동안 내 건강을 살펴온 의사가 이것저것 설명해주고 챙겨주면 얼마나 좋을까?

서구 복지국가가 그렇다. 태어날 때부터 나와 가족의 건강을 꾸준히 돌봐주는 주치의 제도가 있다. 시민들은 지역 주치의에 등록해 일상적인 건강관리 서비스를 받고 상급 진료가 필요할 때 안내를 받는다. 어느 병원이든 찾아갈 수 있는 한국 의료체계를 선호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 자유로운 선택이 더 나은 건강 서비스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병원에 가면 ‘3분 진료’다. 의사의 몇 가지 질문에 수동적으로 대답하고 나면 벌써 진료 끝이다. 여러 검사를 권하는데 꼭 그래야 하는지 알 수는 없고 호텔에 버금가는 병원 시설을 보면 의학적 필요에 의한 처방인지 의문이 든다. 그러다 혹시 다른 병원을 찾으면 같은 과정이 반복된다. 환자는 병원을 전전하느라 고달프고, 의사는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에 대한 임상 경험을 축적하기 어려운 게 대한민국의 의료체계다.

현재 방식은 ‘국민건강보험의 건강’에도 좋지 않다. 근래 코로나19로 병원 이용이 줄어들었을 뿐 국민건강보험의 지출은 오래전부터 빠른 증가세를 보여왔다. 고령화에 따른 노인인구 증가도 이유이지만 환자가 병원을 찾아 전전하고 의사는 상업적 경쟁구조에서 진료해야 하는 의료체계도 중요한 원인이다. OECD에 따르면, 2019년 한국의 시민 1인이 외래진료를 받은 횟수가 연간 17.2회로 회원국 평균 6.8회보다 2.5배 많고, 입원환자 1인당 평균 재원 일수도 18.0일로 회원국 평균 8.0일보다 2.3배 많다. 고가 장비와 검사도 과다해서 CT 촬영은 인구 1000명당 249건으로 회원국 평균 155건 대비 1.6배에 달한다. 이러니 지난 10년간 1인당 경상의료비 증가율이 평균 7.3%로 회원국 평균 3.1%를 압도한다. 왜 한국 시민들은 병원에 자주 가고 오래 입원하며 고가 장비 촬영을 많이 하는가? 국민 체질이 허약해서가 아니다. 의료체계 자체에 근본적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의료서비스에서 환자와 의사는 동등한 계약관계가 아니다. 진료 여부와 범위를 전적으로 의사가 결정하는 비대칭 관계다. 여기서 환자가 의사를 찾아다녀야 한다면 비효율과 고비용은 불가피하다. 많이 진료할수록 의사 수입이 많아지는 보상방식도 바람직하지 않다. 병원 간 경쟁이 치열한 상황에서 경제적 목적이 의학적 판단보다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시민, 의사, 건강보험 모두에게 좋은 제도

이 복잡한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바로 주치의 제도 도입이다. 주치의 제도는 시민의 건강을 예방하고 질병까지 관리하는 1차 의료의 핵심이다. 일상생활에서 시민의 건강을 챙겨주고 전문 진료가 필요할 경우 상급 병원과 연계하며 환자가 지역사회로 돌아오면 후속 돌봄을 담당한다. 의사는 등록 환자 수와 진료 서비스의 질에 따라 건강보험에서 보상을 받으므로 억지로 의료 행위의 양을 늘릴 이유가 없다. 시민은 든든한 건강 지킴이를 두고, 의사는 안정적 수입구조에서 표준 진료에 전념할 수 있으며, 건강보험은 의료비 지출을 관리할 수 있다. 상상 속의 제도가 아니다. 오래전부터 발전시켜온 인류사의 작품이다.

한국에선 어려울 거라고? 이미 지난해 8월 시민·소비자·의료계 등의 92개 단체가 모여 ‘주치의 제도 도입 범국민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시범사업을 포함한 구체적 정책도 제안했다. 지난주에 한 대선후보가 범국민운동본부와 공약 협약을 맺었으니 정치권도 화답하기 시작했다. “이제는 평범한 시민도 주치의를 갖는 시대!” 대통령 선거에 나선 모든 후보의 공약이 되기를 바란다.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정책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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