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잘 나뉜 방에 칸칸이 들어앉아 켜켜이 쌓인 벽지처럼 내밀한 곳까지 닿기도 하고, 침묵의 벽처럼 묻히기도 한다. 살아가면서 기억은 옅어지기 마련인데, 다시금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는 기억들은 모두 내가 살았던 ‘집’과 관계가 있다. 집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며 모든 시간을 공유한다. 그렇기에 집은 시간을 되돌리는 힘이 있다.

서울 종로구 행촌동 1번지에 시간을 되돌린 집이 있다. ‘딜쿠샤.’ 산스크리트어로 ‘기쁜 마음의 궁전’이라는 뜻이며 1923년 서양인 부부가 지었다. 집주인 앨버트 테일러는 사업가이자 미국 해외통신원이다. 그의 아내인 메리는 3·1운동 하루 전날 아들 브루스를 낳았는데, 간호사들이 들어와 메리가 누워 있던 침대에 종이 뭉치를 숨기고 사라진다. 다행히 일본 경찰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고, 종이 뭉치는 앨버트에 의해 해외에 알려지게 된다. 바로 3·1 독립선언서이다.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은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전 세계 신문에 3·1 독립선언서 전문이 실리며, 대한민국의 독립만세운동이 알려지게 된다. 앨버트는 그 뒤로도 위험을 무릅쓰고 일제의 만행을 세상에 알렸다. 그로 인해 앨버트 가족은 일본 정부로부터 강제 추방을 당하게 된다.

“브루스야, 네가 어디를 가더라도 언젠가는 꼭 돌아와야 할 너의 집은 바로 이곳이란다.”

딜쿠샤를 떠나기 전 메리가 브루스에게 한 말이다. 실제로 브루스는 평생 동안 딜쿠샤를 그리워했다. 노인이 된 브루스는 한국을 방문해 딜쿠샤를 찾았으며, 세상에 다시 딜쿠샤를 알렸다.

“건축가가 집을 지어도 하느님이 짓지 않으면 헛되고 파수꾼이 성을 지켜도 하느님이 지키지 않으면 헛되도다.” 딜쿠샤에 새겨진 성경 구절 때문이었을까. 딜쿠샤는 일제에 주권을 빼앗겼을 때에도, 광복의 기쁨이 거리에 넘쳤을 때에도, 한국전쟁으로 절망했을 때에도 같은 자리에 남아 있었다. 수명이 다할 때까지 가진 것을 내어주고, 보듬어주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다시 쌓이는 딜쿠샤의 시간

〈딜쿠샤의 추억〉을 쓴 두 저자는 작가와 프로듀서로 오랫동안 딜쿠샤의 이야기를 좇아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그림책으로 펴냈다. 한 개인의 집이라고 치부하기엔 딜쿠샤의 역사적 가치와 의의가 무척 크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딜쿠샤는 문화재로 등록되어 집의 원형과 실내를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먼지처럼 쌓여 있던 생의 감각과 여기저기 깃들어 있던 추억이 고요하게 모인 듯하다.

앨버트와 메리, 브루스의 바람이 따뜻한 온기처럼 돌아와준 것만 같다. 오래전 우리 민족에게 뻗었던 선한 손길처럼, 봄이 오면 뜰을 내어주고 겨울이 오면 따뜻한 온기를 품어줄 것 같은 그곳에, 다시 딜쿠샤의 시간이 쌓인다. 한 개인과 생을 함께하며 또다시 추억을 쌓을 수는 없겠지만,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 속에 오래도록 ‘기쁜 마음의 집 딜쿠샤’로 남으면 좋겠다(딜쿠샤의 실내 재현 과정을 기록한 책, 〈딜쿠샤, 경성 살던 서양인의 옛집〉을 읽고 방문하면 더욱 의미가 있을 듯하다).

※ 이번 호로 ‘그림의 영토’ 연재를 마칩니다. 수고해주신 필자와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기자명 김지혜 (그림책서점 ‘소소밀밀’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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