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0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연정 협상 회담 중 의회 건물에서 모습을 드러낸 메르켈 총리(왼쪽 두 번째), 녹색당의 공동 대표 카트린 괴링에카르트(왼쪽 세 번째)와 쳄 외츠데미어(맨 오른쪽). ⓒEPA

2017년 11월20일 새벽 독일 녹색당의 공동 대표 카트린 괴링에카르트와 쳄 외츠데미어는 지친 모습으로 기자들 앞에 섰다. 4주 동안 진행되었던 기민당·기사당 연합 및 자민당과의 연립정부(연정) 협상 결렬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괴링에카르트 대표는 기후 보호나 농업, 난민 문제처럼 각 당의 견해가 크게 달랐던 주제에 대해서도 대부분 합의에 도달했는데 결렬되고 말았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협상을 깬 것은 자민당이었다.

괴링에카르트 대표는 4주 동안 합의를 위해 애쓴 기민당·기사당 협상단을 칭찬했다. 협상을 성사시키려 노력한 메르켈 총리에게도 깊은 감사를 보냈다. 메르켈 총리도 ‘연정이 성사되었다면, 그 정부에서 기민당·기사당이 중시하는 경제나 안보 정책은 물론 기후 보호에 대한 녹색당의 요구도 시행되는 의미 있는 성과를 얻었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표시했다.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2017년의 이 연정 협상은 녹색당의 이미지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녹색당은 협상 과정에서 언론과 다른 정당의 정치인들로부터 ‘연정을 위해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당’으로 평가받았다. 협상 결렬 직후 기민당·기사당과 녹색당 대표들이 서로의 노고를 위로하며 따뜻한 인사를 나누는 모습이 언론에 포착되기도 했다. 기사당의 제호퍼 당시 대표는 녹색당의 실용적인 협상 태도에 놀라움을 표시했다. 주간지 〈차이트〉는 녹색당과 기민당·기사당 사이에 서로 한 가지씩 양보하는 연정의 일반적 협상 과정이 잘 진행되었다고 평가했다. 녹색당은 한 해 난민 숫자를 2만명으로 제약하자는 기민당·기사당의 안을 수용했다. 그 대신 기민당·기사당 측은 녹색당의 요구인 ‘난민이 고향의 가족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권리’를 받아들였다.

2017년 선거에서 녹색당은 8.9%의 지지율로 원내 진입 정당 중 가장 적은 의석을 얻었다. 하지만 선거 직후 연정을 구성하는 과정에서 입지가 강해졌다. 다수 의석을 차지한 메르켈 총리의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연립정부를 안정적으로 구성해야 정국을 순조롭게 운영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중앙정치 무대인 연방정부에 참여하지 못한 녹색당 역시 ‘현실 정치’ 능력을 보여주려는 야심을 갖고 있었다. 다만 녹색당과 기민당·기사당 연합 사이의 견해 차이가 컸기 때문에 협상이 쉽지 않으리라 예상되었다. 그러나 녹색당은 유연하게 움직였다. 난민, 에너지 전환, 기후위기 대응 등 주요 의제를 쟁점화하면서도, 녹색당이 양보한 것과 관철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나게 협상을 진행했다. 자민당은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견해 차이가 크지 않아서 연정 협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 또한 크지 않았다. 자민당이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지 않은 이유다.

환경에너지부의 ‘운동화 장관’

녹색당의 연정 참여는 1985년 시작되었다. 그해 독일 헤센주에서 사민당과 연정을 하며 처음으로 주정부에 참여한 것이다. 이 연정 참여는 기성 정당을 거부하는 당원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나 요슈카 피셔 등 현실주의 정치인들의 주도로 성사되었다. 피셔는 헤센주에서 신설한 환경에너지부 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관 복무 선서를 하는 자리에 운동화를 신고 나갔다. 이후 ‘운동화 장관’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이 녹색당의 최초 연정은 14개월 만에 막을 내린다. 헤센주 하나우시에 있던 원자력 회사를 둘러싼 녹색당과 사민당의 분쟁 때문이었다.

이후에도 한동안 녹색당은 사민당의 소수 파트너로 주정부에 참여했다. 1998년의 독일 총선 직전에는 헤센 등 5개 주정부에 사민당·녹색당 연정이 가동되고 있었다. 당시는 오랫동안 지속된 흑황연정(기민당·기사당 연합과 자민당의 연립정부)에 대한 피로감으로 인해 적녹연정(사민당-녹색당)에 대한 여론의 기대가 높았다. 하지만 1998년 3월 녹색당 전당대회에서 파투가 났다. 지도부는 사민당과의 연정을 염두에 두고 중도적 생태주의 노선을 추구했다. 그러나 대의원들이 강경한 공약을 통과시키고 말았다. L당 1.52마르크에서 5마르크로 휘발유 가격을 인상해 환경세를 도입하고 보스니아 평화유지군 파병 연장을 중단한다는 등의 내용이다. 역풍이 거셌다. 많은 시민들이 녹색당의 집권 의지와 통치 역량에 의문을 가졌다. 10% 안팎이던 지지율이 5% 아래로 추락했다.

1998년 사민당-녹색당 연립정부를 출범시킨 슈뢰더 당시 총리(왼쪽)와 요슈파 피셔 부총리 겸 외무부 장관.ⓒdpa

사민당과 슈뢰더 총리 후보는 녹색당의 환경세 공약을 공격하는 한편 기민당과의 대연정 카드를 공공연히 고려하기 시작했다. 1998년 4월 과거 동독 지역이었던 작센안할트주 선거에서는 녹색당 득표율이 고작 3.2%에 머물렀다. 녹색당이 연방의회에 진입할 가능성이 그만큼 낮아진 셈이었다. 이에 녹색당 지도부는 전당대회의 결정을 거스르며 환경세 공약 재검토를 결정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녹색당은 1998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6.7%의 득표율을 기록할 수 있었다. 사민당과 연정 구성도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연정 협상에서 녹색당의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못했다. 원전 폐쇄 일정을 즉각적으로 수립하고 실행하자는 녹색당의 요구는 결국 ‘원전 사업자들과 협의를 통한 장기적 폐쇄’로 합의되었다. 환경세, 반전 등 녹색당 고유의 정책 역시 사민당의 공약 수준에서 합의되었다. 대신 새롭게 구성된 연방 내각에는 요슈카 피셔 부총리 겸 외무장관, 위르겐 트리틴 환경장관, 안드레아 피셔 보건장관 등 녹색당원 3인이 입각했다.

사민당과 연정하는 동안 녹색당은 코소보 및 아프가니스탄 파병 문제로 내분을 겪었다. 당 지도부는 파병을 불가피한 사안으로 봤지만 당원 가운데는 반전 평화주의 노선을 지지하는 세력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녹색당원 수가 5만3000명에서 4만4000명으로 줄었다. 하지만 성과도 있었다. 연립정부가 녹색당의 요구를 정책에 반영한 것이다. 혼인 이외의 동반자 관계를 인정하는 ‘시민결합제도’ 도입, 국적법 개혁 등 차별을 없애기 위한 정책들이 추진되었다. 당시 광우병 파동의 결과로 녹색당 대표를 지낸 레나테 퀴나스트가 농업장관으로 취임했다. 이후 유기농업과 동물복지가 연립정부의 정책 내로 들어왔다.

하지만 1998년 출범한 ‘1기 적녹연정’ 기간에 독일 경제 상황이 악화되면서 사민당과 녹색당의 재집권이 어려울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러나 총선을 한 달여 앞둔 2002년 8월, 독일과 인근 국가를 덮친 100년 만의 홍수가 상황을 바꿨다. 슈뢰더 총리는 장화를 신고 홍수 지역을 누비며 즉각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기후변화가 주요 의제로 떠오르며 녹색당은 특기인 ‘날씨’ 이야기에 집중했다. 결국 2002년 총선에서 녹색당은 8.6%(1998년의 6.7%보다 1.9%포인트 상승)의 득표율로 제3당 지위를 유지한다. 사민당은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동일한 38.5%로, 1998년보다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그러나 의석이 늘어난 녹색당 덕분에 ‘2기 적녹연정’이 출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출범한 2기 적녹연정에서 녹색당의 존재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사민당은 ‘어젠다 2010’ 프로젝트에서 긴축재정과 복지 축소, 노조 권한 약화, 감세 등을 추진했다. 이에 노조와 사민당 좌파들은 강력히 반발한다. 녹색당은 전문 분야가 경제나 복지가 아니었기에 비판을 피할 수 있었다. 대신 녹색당이 정치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해내지도 못했다.

주정부 대표들이 구성하는 연방의회 상원에서 기민당·기사당 연합이 절대다수를 차지하게 된 것도 녹색당에는 악재였다. 독일은 지방정부의 권한이 큰 연방국가다. 지방정부의 재정이나 세금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려면 상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따라서 사민당은 연정 파트너인 녹색당보다는 상원 다수파인 기민당·기사당 연합과 더 긴밀히 협조하게 된다. 결국 적녹연정은 경제와 복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2005년 메르켈 총리의 대연정으로 권력을 넘기게 된다.

2021년에도 독일 주정부들은 강력한 정치적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하지만 녹색당의 입지가 달라졌다. 녹색당은 현재 16개 주정부 중 11곳에서 연정에 참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녹색당은 주정부에서 파견한 인물로 구성되는 상원 69석 가운데 45석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한다. 녹색당이 2014년 난민 관련 규제 강화를 차단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상원에서 확보한 힘 덕분이었다. 2019년에는 독일 정부의 에너지 정책에서 이산화탄소 가격을 높이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정부 총리 빈프리트 크레치만(오른쪽)은 녹색당 소속이다. ⓒdpa

녹색당이 주정부 및 연방정부 차원에서 연립정부 전략을 다양하게 구사하게 된 배경은 2기 적녹연정의 교훈이다. 사민당에 의존하기보다 녹색당 고유의 정치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을 배웠다. 메르켈에게 권력을 넘겨준 2005년 총선 직후, 녹색당은 전당대회를 통해 사민당뿐 아니라 다른 정당과의 연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는 ‘(사민당으로부터) 독자화 노선’을 밝힌다.

이처럼 주정부 차원의 연정 참여는 녹색당을 환경과 에너지 분야의 대표 정당으로 확고히 자리 잡게 했다. 다양한 연정에서 환경과 에너지부 장관 자리는 자연스럽게 녹색당 몫이 되었다. 농업이나 소비자 보호, 교통 정책 등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녹색당의 현실 정치 능력이 검증되면서 ‘녹색당 총리가 주도하는 연방정부’를 상상하는 일도 어렵지 않게 되었다.

연정 협상 무기는 기후위기

특히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의 주정부 총리 빈프리트 크레치만 같은 인물은 보수파에게도 녹색당 주도 정부가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는 실례를 보여준다. 녹색당원인 크레치만은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총리가 되었고 2021년에 세 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2016년과 2021년 연속으로 기민당과의 연정을 선택한 그는 벤츠 같은 거대 기업을 우대하거나 안보·난민 문제 등에서 기민당을 편들기도 하면서 보수층의 지지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오는 9월 총선에서 녹색당과 기민당은 가장 큰 경쟁자이자 유력한 연정 파트너다. 일간지 〈타츠〉의 녹색당 담당 기자로 최근 관련 단행본을 출간한 울리히 슐테 씨는 “녹색당이 집권하려면 메르켈 지지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 자체가 두 정당 간 견해 차이가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9월 총선 이후 실제로 녹색당과 기민당·기사당 연합의 연정이 성사된다면, ‘어느 쪽이 제1당이냐’와 상관없이 정책 부문에 따른 투쟁과 타협이 전개될 것이다. 그리고 기후위기는 지금까지 그래왔듯 녹색당의 연정 협상 무기로 힘을 발휘할 터이다.

기자명 박상준 (베를린훔볼트대 농업경제학과 석사과정)·김인건 프랑크푸르트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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