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 세계관’의 영화에 총 여덟 번 출연한 블랙 위도우의 첫 솔로 영화 〈블랙 위도우〉의 한 장면.

(이 글에는 영화 〈블랙 위도우〉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흔한 표현이지만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살아온 경험이 다르고, 사회가 자신을 대하는 온도가 다르다. ‘핍박’이라는 말을 단어로만 아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핍박이란 단어가 인생에 새겨진 사람도 있을 것이다. 둘에게는 같은 이야기도 다르게 읽힌다.

영화 〈블랙 위도우〉는 최대한 누구에게나 재미있도록 설계된 2000억원짜리 블록버스터 액션영화이지만 나 같은 사람에겐 머리가 아프도록 눈물이 나는 영화였다.

주인공 나타샤를 연기한 스칼릿 조핸슨은 1984년생이다. 그는 19세에 바프타(영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탔고, 인터넷 영화 데이터베이스 IMDb에 따르면 지금까지 영화제에 232회 후보로 오르고 65회 수상을 한 배우다. 2010년 영화 〈아이언맨 2〉에서 블랙 위도우로 처음 등장했고 그 후 ‘어벤져스 세계관’의 영화에 총 여덟 번 출연한다.

‘아이언맨’의 솔로 영화는 3편, ‘캡틴 아메리카’도 3편, ‘토르’조차 3편이 나왔다 (나는 토르 좋아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그런데 영화 〈블랙 위도우〉는 이제야 나왔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좋게 생각하면 늦게 나온 만큼 갈 수 있는 지점이 있었다. 영화 〈블랙 위도우〉는 ‘자아가 비대하고 추한 특정 성별의 중년이 어떻게 세상을 망가뜨리는지, 그리고 그가 물건으로 사용하던 희생자가 살아남아서 어떻게 자신을 구하고 다른 피해자들을 구하는지에 대한 이야기’이자, ‘이놈의 집구석 너만 탈출하고 바깥세상 나가서 영웅 소리 들으니까 좋냐? 집에 남은 내 생각은 나지도 않더냐? 하고 동생에게 비난받는 장녀 서사’이자 ‘자기 행복만 생각하면서 소소히 살아도 되는데 타인과 세상을 위해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초인의 이야기’였다.

나타샤는 자신을 세뇌하고 학대한 ‘레드룸’의 수장 드레이코프를 죽이고 어벤져스에 합류하지만, 동생 옐레나(플로렌스 퓨)로부터 그가 살아 있고 레드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당연히 둘은 함께 레드룸을 부수러 가기로 하는데 그 과정에서 ‘라떼’ 이야기만 늘어놓는 아버지 레드 가디언이 합류하고 사이코 과학자 엄마 멜리나도 합류한다. 그리고 화끈한 폭파 액션, 바이크 액션, 설산을 배경으로 하는 액션, 공중낙하 액션 등이 이어지지만… 날 울린 건 다른 부분이었다.

영화에는 엄마 멜리나와 주인공 나타샤, 동생 옐레나가 등장한다.

앞에 서는 여성에게 일어나는 슬픈 일

감독 케이트 쇼틀랜드와 주연배우이자 제작자 스칼릿 조핸슨은 흥미로운 거리를 많이 심어두었다. 예를 들어 페미니스트의 세대론 같은 것. 엄마 멜리나를 1세대, 주인공 나타샤를 2세대, 동생 옐레나를 3세대 페미니스트로 생각해보자. 멜리나는 자신이 쳇바퀴 안에서 태어난 쥐라서 빠져나올 수 없다고 말한다. 나타샤는 쳇바퀴 안에서 태어난 건 당신 탓이 아니고, 무엇보다 당신은 쥐가 아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왜 이런 세상을 물려줬냐고 윗세대를 쉽게 비난하지만 사실 그는 그 세대에게 허용된 최대한의 범위로 애써온 것일 수도 있다. 해독약도 멜리나 세대의 위도우가 만들어둔 것이다.

동생 옐레나는 아직 자신을 찾고 있는 천둥벌거숭이다. 다 부수고 싶지만 방법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헬리콥터를 빌리거나 무기를 준비할 연줄이 없다. 하지만 그런 천둥벌거숭이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언니와 동생의 관계도 재미있는데, 동생은 언니를 동경하면서도 좀 촌스럽다고 생각한다. 특히 착지할 때의 시그니처 포즈가. 스칼릿 조핸슨은 인터뷰에서 자기가 그 포즈를 각인시키기 위해 10년을 고생했는데 플로렌스 퓨가 단숨에 박살냈다며 웃었다. 신세대가 나타나면 구세대의 가장 멋진 부분이 단숨에 촌스러워진다. 씁쓸하지만 멋진 일이다. 아, 세 여성의 캐릭터 차이는 아버지 레드 가디언을 대할 때 극명하다. 엄마는 웃으면서 받아주는 듯 비꼬고, 큰딸은 진저리를 치고, 막내딸은 얼굴에 펀치를 날려버린다.

‘빌런’의 매력에 대해 얘기해보자. 세상의 나쁜 권력자들은 실제로 만나보면 매력적일까?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하며 부를 쌓은 사람에게, 딸을 때리는 아버지에게 카리스마가 있을 수 있을까? 드레이코프는 비겁자답게 위도우들이 절대 자신을 해하지 못하게 암시를 걸어놓는다. 전투능력이 한없이 0에 가까울 드레이코프가 나타샤에게 손을 올리자 인간 흉기인 나타샤는 9세 여자아이처럼 몸을 움찔거린다. 영화 속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가정폭력을 당하는 피해자들에게 지금도 일어나는 일이다. 아 참, 드레이코프가 한 말 중에 ‘어둠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는 거다 큭큭…’ 여기서 쉰내가 나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

블랙 위도우는 어벤져스 시리즈에서 힐을 신고 전투해왔다. 또 영화마다 썸을 타는 대상이 바뀌어서 함께 출연한 남자 배우들에게 공개적으로 조롱을 당하기도 했다. 업계에서 일한 지 30년이 넘는 스칼릿 조핸슨은 어떤 생각을 하며 버텼을까. 블랙 위도우는 드디어 편한 신발을 신고 전투하고 누구와도 썸을 타지 않는다. 블랙 위도우가 혼자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그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놀랍지 않은가. 어떤 집단에서 여성의 존재가 누군가의 썸 상대로만 취급되는 건 흔한 일이다. 여자는 다 형수님 아니면 제수씨라는 농담을 들어왔던 시간이 떠올라 괴롭다.

아, 가장 괴로웠던 장면은 나타샤가 어린 위도우들에게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이었다. 나타샤는 그들을 해치고 싶지 않지만, 해독제를 맞기 전의 여성들에게 나타샤는 거슬리는 적일 뿐이다. 그건 앞에 서는 여성에게 일어나는 슬픈 일이다. 나와 같은 피해자에게 미움받는 일.

(블랙 위도우에 관한) 마지막 영화를 직접 제작하여 멋지게 마무리한 스칼릿 조핸슨에게, 이 영화는 ‘미투에 대한 이야기’라고 밝힌 감독 케이트 쇼틀랜드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낸다.

기자명 오지은 (음악인·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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