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머리말을 읽으면 계속 보게 되는 책이 있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책이 그렇다. 속도감 있게 이어지는 명쾌한 서술,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솔직한 경험담이 책장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말랑말랑한 글은 아니다. 사람들이 꺼리고 외면하는 심각한 사회문제를 다룬다. 그런데도 읽는 재미가 웬만한 소설책보다 낫다.

나만 이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저임금 노동자의 암담한 현실을 그린 그의 대표작 〈노동의 배신〉은 150만 부 넘게 팔리며 최저임금 인상의 기폭제가 되었다. 2001년에 출간됐는데 벌써 현대의 고전으로 꼽힌다. 어쩌다 한 권이 성공했다면 운이라 하겠지만 긍정주의의 이면을 파헤친 〈긍정의 배신〉, 추락하는 중산층의 현재를 보여준 〈희망의 배신〉 등 다른 책들 역시 큰 호평을 받으며 성공을 거뒀다. 이러니 그의 글에 남다른 힘이 있다고 인정할밖에.

나는 그 힘이 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쓸 수 있을지 궁금했다. 그래서 신간 〈지지 않기 위해 쓴다〉가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달려갔다. 제목을 보고 글쓰기 노하우를 담은 자전 에세이를 떠올렸는데 기대와 달리 그가 40여 년간 여러 매체에 기고한 글을 모은 칼럼집이었다. 조금 실망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모아놓은 글들을 읽다 보니 세상을 움직인 글발이 어디서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분노와 유머, 세상을 움직인 글발의 힘

 

책에는 1984년에서 2018년까지 쓴 글 37편이 실려 있는데, 시기나 주제는 제각각이지만 밑바탕에 흐르는 정서는 한결같다. 그것은 분노다. 1941년생인 바버라 에런라이크가 80대인 지금도 저널리스트로서 목소리를 내고 인정받는 이유는 그가 여전히 분노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아니어도 분노하는 사람은 많다. 시도 때도 없이 분노를 터뜨리는 사람들 때문에 일상이 위태로울 정도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시인 김수영이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라고 자탄했던 그런 분노를 쏟아낸다. 왕궁이 아니라 왕궁의 문지기에게 퍼붓는 비겁한 분풀이, 능력주의라는 이름으로 출발의 불평등은 외면한 채 결과의 공정만 따지는 반쪼가리 분노가 태반이다.

그와 달리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구태의연하게 들릴지 몰라도, “불의”에 분노한다. 몸이 부서져라 일해도 가난을 벗어날 수 없는 최저임금 노동자의 처지에 분노하고, 맨 윗자리를 차지한 소수가 다른 사람들의 모든 노력과 성취를 강탈하는 ‘대격차 사회’에 분노하고, 그러고도 미안해하기는커녕 빼앗은 자가 빼앗긴 자들을 모욕하고 훈계하는 적반하장의 세상에 분노한다.

그의 분노는 내 편 네 편을 가리지 않는다. 양극화 사회에서 자신의 풍요와 안전을 지키겠다며 “높은 담”을 쌓는 중상층, 국경에 쇠 벽을 치고 가난을 범죄시하는 정부, 젠트리피케이션에 항의하는 이들을 보며 “그 순간을 마음 챙김의 기회로 이용하라”고 읊조리는 실리콘밸리 종사자들, 백인 노동자계층의 절망엔 눈감은 채 그들의 인종차별주의를 경멸하는 진보 지식인, 남군과 똑같이 이라크 수감자를 학대해 빗나간 성평등을 실천한 여군… 차별을 부추기고 약자를 짓밟는 모든 것에 그는 분노한다.

그러나 오직 분노뿐이라면 그의 글이 이토록 많은 호응을 얻지는 못했을 터. 세상을 움직인 글발의 두 번째 힘은 유머다. 그는 분노를 부르는 불의와 이기심을 고발하지만 결코 비분강개하지 않는다. 비통한 탄식 대신 그는 경쾌한 유머로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다. 〈노동의 배신〉이 최저임금 상승이라는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몸으로 부딪히며 전한 현실의 생생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잠입 취재기는 언제나 있었다. 그의 글이 특별한 건 유머 때문이다. 그는 비참한 노동 현실을 고발할 때조차 유머를 잊지 않았고, 그렇게 자아낸 웃음으로 닫힌 마음을 열어 변화를 받아들이게 한다.

글쓰기든 실생활이든 분노와 유머를 겸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분노가 떠올리는 웃음은 고작해야 비웃음, 누군가를 바보로 여기는 조롱이기 쉽다. 그러나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분노의 대상을 바보로 보지 않는다. 그는 계급차별, 인종차별, 성차별에 반대하지만 그걸 신봉하고 실천하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비웃기 전에 이런 맹목이 어디서 기인하며 어떻게 그들 자신을 해치는지 보여준다.

이는 상대를 대상화하지 않고 자신과 똑같은 사람으로 보기에 가능한 태도다. 그는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호통치는 대신 ‘나도 그럴 수 있다’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빈곤한 저널리즘”의 시대에 자신이 저널리스트로서 계속 분노를 쓸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렇다. 광부의 딸인 그는 자신의 성공을 능력이 아니라 행운이라 말하며, 이 행운을 가능케 한 부모와 조부모, 이웃들의 노동과 투쟁을 기억하고 감사한다. 그가 ‘연대’를 강조하는 건 그래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누리는 편안한 일상은 수많은 이들의 고된 노동의 결과이니, 이 고마움을 감사기도나 감사일기가 아니라 “공정한 임금과 더 나은 작업환경에 대한 요구를 지지하는” 연대로 표현해야 한다.

독서하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지만 저자가 미국인, 백인 노동계급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드러낼 때는 멈칫했다. 그래도 책을 놓지 않은 건, 요즘 보기 드문 그 계급적 관점이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그는 계층 격차가 심해지는 사회에서 “부유층에게 가장 위험한 것은 좌경 정치세력이 아니라 그런 세력이 부상하지 않는 것”이며, 좌절과 절박함을 표출할 정치 통로가 없으면 “범죄가 늘고 정치적·종교적 분파주의가 극단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바로 어제 쓴 글 같지만 35년 전에 쓴 문장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가 이미 다 쓴 것 같다.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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