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11월10일 무너진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통일 독일에 대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는 동·서독 시민들.ⓒEPA

1989년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90년 10월3일, 옛 동독의 여러 주(州)들이 서독 연방정부에 가입하는 형태로 독일은 통일되었다. 한국인이 ‘독일 통일’에서 연상하는 것은 아무래도 시민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 환호하며 망치로 장벽을 부수고, 이렇게 무너진 장벽 사이로 옛 동독 주민들이 서독 영토로 들어오는 장면일 것이다. 그러나 독일 통일은 모두가 염원하던 것이었을까?

베를린에서 만난 구동독 출신 카틀린 뮐러 씨(63, 당시 브란덴부르크주 포츠담 거주)는 “그때 나는 라디오를 들으며 일하고 있었다. 통일이 결정됐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눈물이 났다. ‘내 나라(Heimat)를 잃은’ 것이 너무 슬펐다”라고 회상했다. 통일 당시 6세로 작센주 드레스덴에 살았던 이나 호페 씨(35)는 자신의 부모가 월요시위(옛 동독 인민들이 자국의 공산주의 정부에 대항해 펼친 시위)에 나갔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내 부모가 월요시위에 나간 것은 ‘변화’를 원해서였습니다. 모든 동독 사람이 통일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이들은 독재체제로 운영되던 공산주의, 사회주의 시스템의 개혁을 바랐을 뿐입니다.”

통일 과정 또한 간단치 않았다. 오랫동안 정당정치를 해왔던 서독 정부에 참여해야 하는 동독 대표 정당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를 표방한 옛 동독에서는 사회주의통일당(SED)이 절대 권력을 장악한 ‘국가정당(북한 노동당처럼 정당 자체가 국가로 투표 없이 영구 집권)’으로 전 사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옛 동독 정부는 서독에 있는 기민당(CDU), 자민당(LDPD)은 물론 농민당(DBD), 민족민주당(NDPD) 같은 다른 정당의 설립도 허용했다. 다만 다른 정당들은 동독의 정치체제를 공산주의적 일당 지배가 아니라 다당제 민주주의 시스템으로 위장하기 위한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들이었다.

1983년 3월 녹색당 관계자들과 의회로 향하는 서독 녹색당 정치인 페트라 켈리(왼쪽에서 두 번째).ⓒAFP PHOTO

이 같은 기만적인 정치체제와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는 동독의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동독인들의 불만은 결국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교회에서 열린 월요집회를 시작으로 동베를린, 드레스덴, 할레 등 동독 주요 도시의 평화혁명 시위로 발전했다. 동독인들은 그해 11월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퇴진, 자유선거 실시, 여행자유, 언론자유 등을 요구했다.

이 기간에 동독에서는 노이에포룸(Neue Forum) 같은 다양한 시민세력이 조직되어 동독 정부의 개혁과 변화를 요구했다. 이들은 사회주의통일당이 제안한 ‘중앙 및 지방 원탁회의’에 참여하면서 부분적으로 동독 정부 및 의회 기능을 대체했다. 장벽이 무너진 직후 동독은 헌법에서 ‘공산당의 정권 독점’ 조항을 삭제한다(공산당의 영구 집권 부정). 이로써 그동안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으로 존재해온 기민당, 자민당, 농민당 등이 자체적 노선을 추구할 수 있게 되었다. 동독에 녹색당이 창당된 것도 이 시기다.

옛 동독에서도 1980년대 초반부터 반핵과 평화, 환경운동 등을 추구하는 그룹들이 결성되기 시작했다. 1983년 5월 서독 녹색당의 대표적 정치인인 페트라 켈리가 동베를린을 방문해 동독 환경운동가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동독에서도 녹색당 창당 논의가 시작됐다. 동독 환경운동가들은 1984년 11월 소련이 신형 핵미사일을 개발해 실전에 배치할 때 이에 격렬히 항의했다. 1986년 4월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고 이후엔 전국적 차원에서 핵발전소 반대운동을 조직했다.

1980년대 말 동독에는 환경운동단체 80여 개가 있었다. 이 단체들은 노이에포룸과 함께 동독의 사회변혁을 요구하는 시민세력의 하나로 원탁회의에 참여했다. 장벽이 무너진 1989년 11월24일부터 26일 동베를린에서는 환경운동단체들이 주도하는 생태 세미나가 진행된 뒤 동독 녹색당이 창당되었다. 동독 녹색당의 기치는 ‘환경보호, 생태적인 동독 재건, 평화 보장, 성평등’이었다. 1990년 2월9~11일 할레에서 첫 당원대회를 열어 대의원 400명을 선출했다. 당시 당원은 약 3000명이었다.

서독 녹색당의 지원을 받지 못한 동독 녹색당

한 달 뒤인 1990년 3월18일엔 옛 동독에서 최초로 ‘인민의회(한국이라면 국회)’를 자유선거로 구성(총선)할 예정이었다. 이 선거에 참여하기 위해, 베를린 장벽 붕괴를 전후로 새로운 노선을 걷게 된 기존 정당들과 새로 창당한 정당들, 여러 사회단체들은 다양한 선거연합을 결성했다. 서독 정당들은 동독에서 파트너를 찾거나 자매 정당을 설립해 직간접적으로 동독 선거에 개입했다. 동독의 기민당은 당시 서독에서 집권당이었던 기사·기민당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1989년 10월에 창당된 동독 사회민주당(SDP:사회주의통일당과 차별적 노선을 표방하면서도 좌파의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시도)은 서독 사회민주당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았다. 사회주의통일당은 스스로 개혁하겠다며 당명을 민주사회당(PDS, 이후 좌파당 Die LINKE)으로 바꿔 선거에 뛰어들었다.

독립여성연합(UFV)과 선거연합을 결성한 동독 녹색당은 서독 녹색당의 적극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서독 녹색당은 동독의 정당과 단체들이 서독 세력의 개입 없이 자주적으로 동독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서독 녹색당은 동독이 무비판적으로 자본주의를 수용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통일과 관련해서도 ‘동·서독 두 국가를 일정 기간 유지해야 한다’는 노선이었다. 이와 비슷한 견해를 가진 동독 내 세력으로는, 노이에포룸 등 시민단체가 결성한 ‘동맹90’이 있다. 동맹90 역시 동독의 개혁과 존속을 주장했다.

그러나 인민의회 선거는, 녹색당과 동맹90의 기대와 달리, 기민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연합의 압승으로 끝났다. 이 선거로 구성된 동독 정부는 1990년 4월12일 동독이 서독에 편입되는 방식의 통일에 합의했다. 동독의 자민당, 사민당, 기민당 역시 서독의 관련 정당에 흡수·통합되는 과정을 거쳤다. 동독 녹색당 역시 1990년 9월의 두 번째 전당대회에서 서독 녹색당과 합당을 결의했다.

통일 비판은 시대 흐름에 대한 패착

1990년 12월12일엔 통일 독일의 첫 연방의회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다. 선거운동 과정에서 녹색당은 “모두가 ‘독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는 날씨에 대해 이야기한다”라는 슬로건으로 통일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다. 서독 지역의 녹색당은 5% 득표율을 넘지 못해 의회 진출에 실패했다. 동맹90과 선거연합을 맺은 동독 지역의 녹색당은 옛 동독 지역에서 득표율 6.2%를 기록했다. 그 덕분에 연방의회에 비례대표 8석을 진출시킬 수 있었다.

당시 녹색당은 독일인들의 통일 열망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1990년 1월과 봄에 진행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당시 서독인들의 70%와 동독인들의 85%가 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이후 녹색당은 1990년 12월 선거에서 ‘통일’을 비판한 것은 ‘시대의 흐름에 대한 패착이었다’고 평가했다.

1993년 5월14일에는 라이프치히에서 동·서독 녹색당의 첫 공동 전당대회가 열렸다. 이 전당대회에서 동·서독 녹색당은 동맹90과 합당하면서 현재 ‘독일 녹색당(Bündnis 90/Die Grünen)’의 진형을 갖추게 되었다. 당시 서독 녹색당원이 3만7000여 명이었던 것에 비해 동독 녹색당원들은 2600여 명에 불과했다. 이대로 합당하면 서독 녹색당이 동독 녹색당을 흡수하는 꼴이 된다. 그래서 동독 지역에서 주로 활동해온 동맹90도 포함한 것이다. 합당 과정에서 녹색당은 강령 수정에 따라 의회정치를 중시하는(운동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용적 개혁 노선을 표방하며 ‘더 이상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분배적 정의’가 녹색당에서 예전만큼의 중요성을 잃게 되면서 ‘생태적 좌파’ 성향 당원들이 대거 탈당하기도 했다.

옛 동독 지역인 튀링겐주에서 녹색당 당원들이 인종차별 반대 시위를 하고 있다. ⓒ녹색당재단 제공

통일 이후 특히 옛 동독 지역은 엄청난 사회변화를 겪었다. 공장들이 문을 닫고 실업률이 증가하면서 많은 시민들이 서독으로 이주했다. 동독의 빈 공장과 가게들은 서독의 자본 측으로 넘어갔다. 동독과 서독 ‘지역’의 경제적 격차가 커졌다. 동독 지역의 소외와 낙후는 개선되지 않았다. 통일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옛 동독 지역 시민들의 임금 및 생활수준은 서독 지역 거주민의 70~80%가량으로 조사된다. 여전히 수많은 옛 동독 출신 주민들이 자신을 2등 시민으로 느낀다. 이런 감정이 외국인에 대한 배제와 독일 민족주의, 우익 포퓰리즘 운동으로 표출되고 있다.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옛 동독 지역에서 높은 득표율을 얻고 있는 것은 녹색당에 큰 도전이다. AfD 같은 대안 우파들은 30년 전 평화혁명 시위에서 사용됐던 ‘우리가 인민이다’라는 구호를 다시 치켜들기도 한다. 다만 이 구호를 ‘인민은 곧 독일인이며, 독일인 우선의 정책이 필요하다’고 해석해버린다. 이에 녹색당은 ‘인민은 억압받는 사람들을 의미하며, 그러므로 인민에는 노동자와 외국인, 이민자, 난민, 유대인, 무슬림, 장애인, 성소수자, 여성 모두가 포함되어야 한다’는 원칙하에 ‘반유대주의, 차별주의, 인종주의, 외국인과 소수자 혐오 등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전히 선거 때마다 서독 지역의 녹색당 지지율이 동독 지역 녹색당의 지지율보다 4~5%포인트 정도 높다. 그러나 옛 동독 지역의 녹색당은 기후보호, 지속가능한 경제발전, 반극우주의와 반민족주의 등을 주요 의제로 지지층을 넓혀가고 있다. 2019년 9월 브란덴부르크주와 작센주에서 열린 주 선거에서 녹색당은 각각 10.8%와 8.6% 득표율을 기록해 기민당, 사민당과 함께 연립 주정부를 구성할 수 있었다.

통일 이후 30년이 지난 오늘날, 기후위기 시대를 맞아 독일의 모든 정당이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기후총리’로 불리는 앙겔라 메르켈이 산업계와 기후보호를 저울질하며 온건한 정책들을 내놓을 때, 녹색당은 가장 분명하고도 적극적으로 기후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을 내놓고 있다. 이뿐 아니라 옛 동독 지역에 존재하거나 통일 이후 새롭게 나타난 사회문제들에 대해 생태, 지속가능성, 정의, 평등 같은 녹색 관점의 대안을 꾸준히 내놓고 있다. 프라이데이포퓨처(Fridays for future) 시위로 기후운동에 동참하고 있는 ‘그레타 (툰베리) 세대’는 물론 그동안의 녹색당에 실망했던 옛 지지자들이 다시 녹색당에 투표할 채비를 갖추는 중이다.

기자명 손어진 (독일 치타우·괴를리츠 대학 정치학 박사과정)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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