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영화 〈빛나는 순간〉은 70대 제주 해녀 진옥(고두심)과 서울에서 온 30대 다큐멘터리 PD 경훈(지현우)의 사랑이야기다.

〈올드 랭 사인〉 〈알이씨(REC)〉 같은 퀴어 영화를 연출해온 소준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서울 종로3가와 이태원 대신 제주도를 선택했다.

그는 언제나 외로움이 스며든 자리를 살폈다. 그래서 그의 영화엔 늘 사랑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의 배경이 된 제주는 마치 한 명의 배우처럼 제 몫을 한다. 엄혹한 역사가 일군 제주의 땅 위에서 아픔을 가진 이들은 비로소 애도를 시작한다. 해녀 진옥은 제주의 아픈 역사와 현재를 잇는다. 숨비소리로 사랑을 전승한다. 고두심이 분한 진옥이 곧 제주인 이유다.

7월12일, 제주에서 해녀삼춘(성별과 상관없이 가까운 이웃이나 어른들을 부를 때 쓰는 제주 호칭)을 초대한 〈빛나는 순간〉의 특별한 상영회가 열렸다. 그곳에서 배우 고두심을 만났다.

그는 인터뷰 중에도 간간이 제주방언을 쓰며 곧잘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그에게 영화 〈빛나는 순간〉이 담아낸 제주와 사랑의 의미에 대해, 또 49년간 연기를 멈추지 않은 배우로서의 삶에 대해 물었다.

오늘만 해도 세 상영관을 다니며 인사를 하셨죠. 계속해서 관객들 만나고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하고, 영화에 대한 애정이 남달라 보입니다.

코로나로 모든 것이 다 단절되고 어려운 상황이잖아요. 이렇게라도 관객분들 만나면서 인사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고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해보는 거예요. 이 영화는 지금도 제가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영화를 본 분들도 그 얘길 저한테 꼭 해주더라고요. “이건 당신 아니면 안 됐겠네. 정말 당신은 이 영화 안 했으면 후회했을 것 같다.” 뿌듯하죠. 게다가 이번에 아시안 필름 페스티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해외에서도 인정을 받았으니 더 힘이 나고요.

이 영화를 통해 제주의 어떤 면을 보여주려 했나요?

영화 홍보할 때는 ‘33살의 나이차를 극복한 멜로영화’ 이렇게 얘기하니까 많은 분들이 ‘고두심이 그런 영화를 했어?’ 하시는 것 같아요. 하지만 사실은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서로 손을 맞대고 아픔을 치유해나가는 영화예요. 그리고 제주의 아픔, 해녀의 삶을 다룬 영화이고요. 당신들이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찾는 제주도가 예쁜 꽃으로만 장식된 곳이 아니고 이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 있고, 척박한 땅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선 사람들의 땅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영화 한 편으로 다 보여줄 순 없겠죠. 그래도 힘든 시절을 품어낸 강인함과 숭고함이 뭔지 한 번쯤 다 같이 생각해보길 바랐습니다. 제주도가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너무 많이 훼손됐어요. 꼭 어디를 파헤치고 못살게 해야 개발일까요? 요즘은 그런 걱정을 해요.

진옥은 죽음과 상실을 짊어지고 평생을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러다 비슷한 아픔을 가진 경훈을 만나고 서로의 응어리를 어루만지면서 ‘살암시민 살아지매(살다 보면 살아진다)’라는 말을 건네고요.

그 말이 너무 아프죠. 참 슬퍼요. ‘살암시민 살아지매’ 그 말을 하는 순간, 막 가슴이 울컥해요. 어떤 경우에도 인내하는 강인함. 바로 그게 제주의 정신이고 해녀의 운명이거든요. 제주는 삼면이 바다잖아요. 바다에 생명줄이 있는 거예요. 목숨을 걸고 바다에 가서 어떻게든 먹고살려고 하는 거죠.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면서 살아가는 해녀들은 마음속에 아픔도 묻고 괴로움도 묻고 ‘살다 보면 살아진다’ 그 말을 담고 사는 거죠. 또 ‘혹은 살아보젠(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 이 말도 제주도를 대표하는 말이라고 생각해요. 4·3사건도 그렇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지만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는 거예요. 고통스러워도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는 거죠.

‘살다 보면 살아진다’ 이 대사가 나오는 장면은 진옥이 4·3사건에 대해 말하는 롱테이크 독백신이죠. 실제 거의 모든 대사를 직접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근데 정말로, 제가 그걸 어떻게 찍었는지 저도 모르겠어요. 제 뼛속까지 그 이야기가 붙어 있는 것처럼 꼭 제가 4·3사건을 겪고 본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제가 어릴 때 아버지 손잡고 이웃 마을 친척 제사에 간 적이 있어요. 근데 ‘아이고, 아이고’ 하는 소리가 온 마을에서 나는 거예요. 우리만 제사인 줄 알았는데 옆집, 뒷집, 앞집이 다 울어요. 그래서 제가 “아버지, 이 집에 제사 아니?(이 집만 제사인 거 아니에요?)” 그랬더니 아버지가 “아. 그거 아니. 여기 이 동네가 다 몰살. 한날한시에 다 몰살.” 이러셨어요. 한 방에 동네 사람들이 다 숨어 있었는데 총알이 날아와서 앞사람까지 꼬꾸라지고 그 사람에게 총알이 박혀서 자기는 안 꼬꾸라진 거예요. 그런 사람들이 피가 낭자한 어둠 속에서 시체를 건너 건너 겨우 살아남아 그때의 일을 말하는 거죠. 다들 자기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면서 죽은 거잖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어요?

사실 그 장면은 감독님이 정말 짧게 골자를 대사로 써주시긴 하셨어요. 제가 거기다 살이고 뭐고 다 붙였어요. 감독님 컷 안 했으면 하루 종일이라도 할 것처럼 정말 신 내린 것같이 했어요. 다 끝나고 나니까 스태프들도 눈시울이 젖어서 아무 말이 없고 감독님은 벙쪄서 ‘컷’ 하는데 움직이질 못하고. 나도 끝나곤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를 모르겠더라고요.

스스로 정말 중요한 장면이란 걸 알고 욕심이 나는 장면은 어떻게 준비하세요?

감독님이 써준 골자에서 벗어나지 않고 ‘여기서 이렇게 해서 살을 붙여야겠다. 여기는 이렇게 해야지’ 깨알같이 대본에 썼어요. 항상 좋은 드라마나 영화에는 ‘여기구나’ 하는 장면이 있어요. 배우들이 알거든요. ‘여길 못하면 다른 거 아무리 잘해도 안 된다’ 하고요. 양치하면서도, 거울을 보면서도, 밥 먹으면서도 계속 머릿속으로 그렸어요. 그런 장면은 어떻게든지 해내야 해요. ‘어떤 배우가 와도 눈싸움에서 지지 말고 해야지’ 하면서. 독하게 하는 거죠.

영화 〈빛나는 순간〉은 70대 제주 해녀와 서울에서 온 30대 다큐멘터리 PD가 서로의 상처를 보듬는 영화다. ⓒ명필름 제공

젊을 때부터 대부분 며느리, 엄마 역만 맡으셨죠. ‘캐서린 헵번 나이쯤 되면 멜로 하려나’ 하는 말도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됐네요.

‘애정 신이 성에 안 찼다.’ 이렇게 말한 게 많이 인용되던데 그건 그냥 하는 말이에요. 저는 진옥의 귀에 물이 들어가서 그걸 경훈이 빼주는 장면을 제일 좋아해요. 무릎베개를 하고 누워 있다가 간지러워서 부끄러워하잖아요. 그러다 경훈을 올려다보고는 깜짝 놀라 밖으로 나가는 장면인데요. 그때 진짜 ‘내 표정이 많이 나왔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할머니라도 수줍어요. 머리도 하얗고 주름도 있지만, 그래도 진옥은 그 속에 사랑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살았던 거예요.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소준문 감독에게 ‘고두심 배우에게 묻고 싶은 게 더 생기진 않았는지’ 물어봤습니다. ‘고두심 배우가 생각하는 사랑이 뭔지 궁금하다’고 하더군요.

감독님이 부끄러워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말도 참 잘해요. 글쎄요. 사랑이라. 서로 상처를 보듬어주고 아픔을 어루만지는 게 사랑 같아요. 그렇게 위로하며 살 수만 있어도 정말 좋은 삶 아닐까요? 그걸 이 영화에서 보여준 거고요. 마지막에 진옥이 경훈을 보내는데 그것도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해요.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경훈을 그렇게 보내줘야 하는 거죠.

두 달간 진짜 제주 해녀가 돼서 살았죠. 쑥으로 수경을 닦는 장면 같은 것은 정말 현실적이더라고요.

어휴, 그런 거는 그냥 옆에서 보면 알 수 있어요. 삼춘들이 숨 오래 참는 법, 이런 것도 알려줬는데 이건 말로 설명을 못해요. 사실 우리 해녀삼춘들이 있어서 제가 든든하게 바다에 들어갔어요. 제가 어릴 때 파도에 휩쓸린 적이 있어서 물을 무서워해요. 이전에 해녀로 나온 영화 〈인어공주〉에서도 결국 대역을 썼거든요. 근데 이번엔 그럴 수가 있나요. 70살 먹어서 그런 것도 못하고 대역 쓰냐, 이런 말 안 들으려고 정말 열심히 연습했어요. 그런데 막상 바다에 가니 옆에 상군 해녀삼춘들이 포진해 있잖아요. 세상에, 말도 못하게 든든한 거예요. 제가 꼬르륵꼬르륵 물에 빠진다고 해서 그분들이 나 하나 못 건져줄까. 그 생각 하면 할 수 있겠더라고요. 나중엔 감독님이 컷 했는데도 한 장면 더 찍자고 할 정도였으니까요.

진옥이 해녀복 위에 꽃무늬 티셔츠를 입고 있는 장면도 재밌고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무래도 해녀복이 단조로우니까 자기 멋을 내서 그 위에 꽃무늬 옷 같은 걸 입는 거예요. 원래는 옷 아랫단을 꽉 매면 그게 주머니처럼 되잖아요. 그럼 바다에서 소라며 멍게며 보말이며 따서 테왁(물속에서 몸을 의지하거나 망사리를 달아 채취한 해산물을 띄워둘 때 쓰는 뒤웅박)까지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그 옷 안에 넣는 거죠. 원래 쓰임새는 그거지만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 입는 거예요. 빨간색도 입고 꽃무늬 옷도 입고.

저는 해녀삼춘들과의 추억이 많아요. 어릴 때 어머니 손잡고 해녀삼춘들 자주 봤거든요. 불턱이라고 해서 돌멩이를 이렇게 쪼그맣게 해놓는 게 있는데 거기서 다들 쉬어요. 바다 갔다가 나오면 춥고 떨리고 입술은 새파랗고. 그럼 거기에 불을 피워서 몸도 데우고 옷 말아놓은 것도 입고 하는 거예요. 어머니가 고구마, 보리빵 이런 거 쪄서 뜨끈뜨끈할 때 보자기에 싸서 해녀삼춘들에게 줄 때 제가 일 삼아 따라가곤 했어요.

고두심 배우는 이번 영화에서도 해녀삼춘들이 먹을 따뜻한 간식을 직접 챙겼다. 전체 회식 때는 촬영하며 틈틈이 찾은 네잎클로버를 모든 스태프에게 엽서와 함께 건넸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너무 많이 고생하잖아요.” 젊은 스태프들의 노고를 하나하나 눈에 담는 그의 모습이 그려졌다. 동료이자 후배 배우인 지현우씨에게 ‘고두심 배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한 분야에서 50년을 일한 만큼 미래가 불안하고 막막한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이 있는지’ 물었다.

‘49년 차 여배우’ ‘최초로 3사의 방송대상을 모두 거머쥔 배우’ 고두심을 말할 때 붙는 수식어들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도 자기를 의심하거나 실패를 걱정하나요?

그럼요. 그건 공포죠, 공포. 다음에 또 잘한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어요. 정말 무섭죠. 근데 저는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요. 배역도 마찬가지예요. 욕심을 갖고 ‘무슨 역할을 하고 싶어요’라고 한다고 그것이 나한테 주어지나 하면 그것도 아니거든요. 어떤 역할이든 주어지면 받아들여요. 그저 이번엔 내가 그 인물에 어떻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그 고민만 하는 거죠. 될 수 있으면 물처럼 살려고 해요. 내 그릇 안에 담아낼 수 있도록 하면 거기에서 뭔가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요.

7월12일 제주에서 〈빛나는 순간〉 상영회가 열렸다. 고두심 배우(가운데)와 소준문 감독(오른쪽). ⓒ시사IN 이명익

지현우 배우의 질문에 답해주신다면요?

사람마다 자기만의 개똥철학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는 공인이다 보니까 스스로 사람들이 제게 갖는 기대를 거스르면 안 된단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고 그게 항상 저를 짓눌렀어요.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을 지나서 고두심이 지금의 고두심이 된 거예요. 제가 하는 행동, 말, 이런 것들이 누군가에겐 용기도 되고 좌절도 되고 그래서 때로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저는 오늘 죽을 것처럼 힘든 일이 있어도 내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촬영장에 가요. 제가요. 평생을 머리맡에 알람을 맞춰놓은 적이 없어요. 현장에 가야 되는 일정에 맞게, 딱 그때 눈을 떴거든요. 그러니까 책임감과 긴장감. 그게 늘 어마어마한 거죠. 그렇지만 내가 사랑받는 만큼 그 몫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았어요. 사실 저는 어릴 때 꿈이 배우였는데 50년을 배우로 사랑받고 살았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사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어요. 이런 행운이 어디 있나 싶어요. 그러니 제가 함부로 무슨 말을 하겠어요. 그저 자기 중심을 갖고 자기를 잘 다독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요. 그게 제 개똥철학인 거죠.

후배들에게는 이런 말을 해요. 누구를 미워해도 너무 오래 미워하지 말라고요. 작품을 하면서 누굴 어떤 장면에서 만나게 될지 모르거든요. ‘눈을 보고 대사를 해야 하는데 미워하는 사람이 앞에 있으면 눈을 마주보고 싶겠니? 너만 손해잖아. 그럼 네 연기가 빵점이 되잖아. 그러니까 너 자신을 생각해서라도 누구를 오래 미워하지 마라.’

같은 길을 가는 동료들이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김혜자, 김영옥, 나문희 이런 언니들하고 친하죠. 사실 언니들이 다 저를 예뻐해요. 얼마 전에 혜자 언니를 만났는데 ‘이 나이 되니까 이제 사람이 보인다’ 이러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언니 눈은 참 늦게도 뜬다. 늦게도 뜨네!’ 하면서 장난을 쳤어요. 맞아요. 이젠 사람이 정말 보여요. 그래도 후배들에겐 제가 먼저 다가가고 그러진 않아요. 대신 손을 내민 사람들은 놓지 않죠.

그런 동료들과 앞으로 어떤 드라마를 만들고 싶나요?

요즘은 자극적인 드라마가 정말 많잖아요. 그런데 저는 〈디어 마이 프렌드〉 〈동백꽃 필 무렵〉 이런 드라마 참 좋았어요. 서민들이 더불어 살아가면서 같이 즐거워하는 드라마. 팔리지 않아도 미디어에서는 그런 걸 지향해주면 사람들이 더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요. 〈전원일기〉를 다시 젊은 사람들이 본다잖아요. 유튜브로도 보고, 티비에서 세 채널이나 그걸 방영하고 있대요. 참 이상한 현상이에요. 이런 드라마 인기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래도 계속해보자, 계속 만들어보자. 그랬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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