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의 현재 모습(맨 위)과 1961년 설립 당시 모습(위). ⓒ인천도시산업선교회 보존협의회 제공

18만998㎡(약 5만4751평)의 땅이 있다. 그리고 그 가운데 188㎡(약 57평)의 땅이 있다. 큰 땅 가운데 약 0.1%에 해당하는 작디작은 땅이다. 이 작은 땅은 어떤 사람들에게 매우 소중한 공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작은 땅을 포함한 큰 땅을 헐고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세우려 한다. 그러자 작은 땅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큰 땅을 헐되 이 작은 땅만은 그대로 남겨달라고 외치고 있다. 작은 땅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수도권 지하철 1호선 동인천역 4번 출구로 나오면 동인천역 북광장이 있다. 길을 건너면 냉면으로 유명한 화평동이 나오고, 길을 따라 야트막한 언덕을 넘으면 화수동이다. 관광객으로 들끓는 동인천역 남서쪽 차이나타운 일대와는 풍경이 사뭇 다르다. 인근에 동일방직, 인천제철(현대제철) 등 대규모 공장을 끼고 있는 이 동네는 1980년대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바글대는 곳이었다. 지금은 빌라와 단층집이 어울려 있는 한적하고 오래된 동네다.

이 일대 5만4751평에 지상 40층 규모 아파트 31개동을 짓겠다는 계획이 ‘화수화평 재개발사업’이다. 총 3183세대가 사는 아파트가 들어선다. 시공사는 현대건설. 사업구역과 맞붙은 곳에 초등학교 두 곳, 중학교 한 곳, 화도진공원, 도서관 등이 있고 소방도로도 잘 갖춰졌다. 인천시 도시계획위원회는 6월23일 이 사업계획을 승인했다. 작은 땅은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작은 땅에는 한쪽 벽면이 담쟁이덩굴로 뒤덮인 57평짜리 교회가 있다. 예배당이라고 해봐야 20명이나 들어갈까 싶은 작은 교회다. 1961년 미국 선교사 조지 오글 목사가 초가집에 설립한 인천도시산업선교회(인천산선)로, 현재 이름은 ‘미문의일꾼’ 교회다. ‘미문(Beautiful Gate)’은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구걸하던 지체장애인을 일으켜 세운 기적을 일으킨 예루살렘 성전 동편 문에서 따왔다. 일꾼은 물론 노동자다. 일요일이면 작업복 빨래가 온 동네에 나부끼는 ‘노동자의 동네’에서 인천산선은 60년 동안 터를 잡고 목회 활동을 펼쳐왔다.

김정택 목사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요구하며 6월22일부터 단식 중이다. ⓒ시사IN 조남진

‘동일방직 똥물 테러 사건’의 무대

화수화평 재개발 사업계획에 따르면, 인천산선은 철거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해야 한다. 인천산선 철거 소식은 알려지자마자 인천 지역의 뜨거운 쟁점으로 떠올랐다. 인천산선 총무를 지낸 김정택·김도진 목사가 단식에 돌입했고 7월13일 인천 지역 시민사회단체 80여 개가 망라된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존치를 위한 범시민대책위원회’가 출범했다. 대책위 관계자들도 7월13일 릴레이 단식에 들어갔다. 이 작은 교회가 어떤 공간이기에 관심이 쏟아지는 걸까.

인천산선을 설명하는 키워드는 ‘여성 노동운동’이다. 이곳을 빼고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기원과 역사를 말할 수는 없다. 인천산선은 1978년 ‘동일방직 똥물 테러 사건’의 무대였다. 그리고 이 사건을 설명하려면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섬유회사인 동일방직 노동자 대다수는 여성이었다. 가족 뒷바라지를 위해 학교 대신 공장을 택한 여성들이었다. 그럼에도 노조지부장은 남성이 독차지했다. 1972년 한국노총 섬유노조 동일방직지부 조합원 1300명 가운데 남성은 200명에 불과했지만 노조지부장은 남자였다. 남성으로 구성된 노조 지도부는 어용이었다. 구사대로서 노동 감시기구 구실을 했다. 부당한 현실에 대한 불만이 쌓이면서 반란이 일어났다. 1972년 노조 대의원 대회에서 주길자씨가 남성 후보를 제치고 지부장으로 선출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노조지부장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화수·화평동 재개발 지역의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운데 원).ⓒ시사IN 조남진

주길자씨에 이어 1975년에도 여성 노동자 이영숙씨가 지부장으로 뽑히자 사용자 측은 노조 집행부를 와해시키려 했다. 여성 조합원들이 이에 항의하자 사측과 남성 조합원은 이들을 기숙사에 감금했다. 여성 노동자들은 전면 파업으로 맞섰다. 파업 3일째 경찰이 농성장을 둘러싸고 강제 연행을 시도하자 조합원들은 옷을 벗어던졌다. “벗고 있는 여자 몸에는 누구도 손 못 댄다”라는 외침이 나왔다. 속옷만 입은 채로 반나체 시위가 벌어졌다. 경찰은 주동자만 내놓으면 물러가겠다고 회유했지만, 여성 노동자들은 “우리 모두가 주동자다”라며 물러서지 않았다.

1978년 똥물 테러 사건은 이런 상황에서 자행됐다. 새 노조지부장을 선출하는 대의원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구사대로 동원된 남성 노동자들이 야간 근무를 마치고 투표소로 향하던 여성 노동자의 얼굴과 몸에 똥을 끼얹고 입에도 똥을 쑤셔 넣었다. 선거는 무산됐다. 상급단체인 한국노총 섬유노조는 동일방직을 사고 지부로 규정하고 ‘배후설’을 꺼내들었다. 바로 인천산선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도 동일방직 노조가 ‘빨갱이 단체’인 인천산선의 지시에 따라 행동했다고 선전했다.

정부의 선전이 사실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었다. 학업에 목말라 있던 여성 노동자들에게 인천산선은 배움의 공간이었다. 한문, 꽃꽂이 같은 교양수업뿐 아니라 노동법을 통해 노동자의 권리를 배웠다. 목사들의 ‘위장취업’도 있었다. 인천산선은 설립 초기부터 ‘노동 목회’를 목표로 삼고, 남성 목사는 1년, 여성 목사는 6개월씩 공장 생활을 하도록 했다. 인천산선 2대 총무를 지낸 조화순 목사는 동일방직에 6개월간 취업해 노동자들을 조직했다. 그 결과 동일방직 노조 대의원 40명 가운데 25명이 인천산선 회원일 정도였다.

사측과 정부에 인천산선은 눈엣가시였다. 〈산업선교회는 무엇을 노리나〉 같은 책자를 만들어 배포했고 “때려잡자 조화순” 같은 현수막이 걸리기도 했다. 똥물 테러의 목표가 인천산선이었는지도 모른다. 테러 사건 이후 동일방직은 20대 여성 노조원 124명을 해고했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전국 노조와 사업장에 해고자들의 신상이 기록된 명단이 뿌려졌다. 이른바 노동계 ‘블랙리스트’의 시초였다. 해고자들은 어디에도 취업하지 못한 채 눈물을 삼켜야 했다. 야만의 시절이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동일방직 사건은 다시 평가받았다. 2001년 중앙정보부 전직 직원의 양심고백으로 여성 노동자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배후에 중앙정보부가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한 것 역시 중앙정보부였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해고자 가운데 73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하고 회사에 34명의 복직을 권고했지만 회사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회사와 국가의 폭력에 의해 해고자 신분이 된 이들의 지난 세월은 여전히 반쪽짜리 명예회복에 그치고 있다.

김도진 목사가 쌍우물 유적을 설명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몇 달 만에 태도 바꾼 인천시

동일방직 공장은 지금도 남아 있다. 2017년 운영을 중단했지만 과거 여성 노동자들이 사용했던 기숙사 등이 그대로 있다. 그래서 인천산선 총무 김도진 목사는 이곳에 ‘어느 여성 노동자의 길’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동일방직에서 인천산선에 이르는 700여m의 거리를 여성 노동자의 길로 만들고, 그 길을 걸으면서 우리 일상의 여유와 평화가, 사실은 어느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져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이 김도진 목사의 바람이었다. 사단법인 ‘서해문화’ 같은 문화운동 단체가 지난해부터 과거 동일방직 여성 노조위원장과 인천산선 활동가의 집담회 자리를 개최하는 등 실제 ‘여성 노동자의 길’ 사업도 착착 진행 중이었다. 화수화평 재개발이라는 날벼락을 맞기 전까지는.

‘철거 강행 대 반대’로 팽팽히 맞서고 있지만 범시민대책위원회의 요구는 사실 그리 난망하지 않다. 무조건 재개발 반대가 아니다. 재개발하되, 사업계획을 변경해 인천산선 공간을 존치해달라는 것이다. 현실적인 방안도 있다. 재개발조합이 존치하기로 한 19세기 문화재인 쌍우물이 교회 건물과 겨우 10m 떨어져 있다. 쌍우물과 교회를 한데 묶어 역사·문화 명소로 남기자는 것이 대책위의 요구다. 교회가 존치되면 현재 남아 있는 동일방직 등을 묶어 지역을 산업문화유산 공간으로 탈바꿈시킬 수도 있다. ‘여성 노동자의 길’은 그중 하나일 것이다. 인천 지역 산업문화유산을 연구한 남지현 경기연구원 연구위원(도시공학 박사)은 “인천산선이 있는 화수·화평동, 만석동 일대는 일제강점기부터 중공업·경공업·농업이 한데 섞인 종합산업단지로서 의의가 있다. 종합산업단지와 함께 성장한 노동자 운동의 뿌리인 인천산선은 보존해야 할 가치가 크다”라고 말했다.

1985년 7월20일 옛 동일방직 노조원들의 출판기념회에서 문익환 민통련 의장과 함께 촬영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인천산선 측은 조택상 인천광역시 균형발전정무부시장과 대화를 거듭했다. 조 부시장은 현대제철 통합노조위원장 출신으로, 노동자 시절부터 인천산선과 인연을 맺었던 인물이다. 대책위 측에 따르면 몇 달 전만 해도 조 부시장은 인천산선을 존치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그러나 이후 태도가 180° 바뀌었다. 표면적으로는 인천산선이 군사정부 시절 정부의 허가를 받지 못한 무허가 건물이라는 점을 들고 있지만, 대책위는 몇 달 만에 바뀐 인천시의 태도를 납득하지 못하고 있다. 〈시사IN〉은 조택상 부시장에게 취재를 요청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이 와중에 인천시는 7월6일 동일방직 부지를 주거복합공간으로 개발하겠다는 계획까지 발표했다. 산업유산의 흔적을 지우고, 친환경과 녹색을 표방하는 시민 편의 공간을 만든다는 방안이다. 이렇게 인천 노동운동의 역사는 송두리째 설 공간을 잃어가고 있다.

인천산선에 몸담으며 민주화와 노동운동에 앞장선 주역들은 사회로부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조지 오글 목사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일로 2002년 대한민국인권상을 받았다. 조화순 목사도 인천산선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7년 대한민국인권상 국민훈장을 받았다. 1980~1983년 인천산선 실무간사로 활동했던 고 김근태 의원도 올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이들과 노동자들의 터전이었던 인천산선 건물은 정작 사라질 위기에 직면했다. 힘센 개발 논리 앞에 57평짜리 기억의 공간이 견뎌낼 수 있을까. 작은 땅의 기억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점점 커지고 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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