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의 반원전운동이 격렬해졌다. 아래는 같은 해 10월 원전 건설에 반대하는 독일 시위대. ⓒAP Photo

오는 9월26일 총선에서 독일은 16년간의 메르켈 시대와 작별하게 된다. 녹색당의 아날레나 베르보크 총리 후보는 유력한 차세대 주자로 점쳐지고 있다. 탈핵 운동 점조직에서 출발해 생태주의를 근간으로 산업과 경제를 재편하는 대중정당으로 거듭나기까지 녹색당의 변천사를 살펴본다.

독일 정치에 밀어닥친 ‘녹색 물결’의 배경에는 최근 몇 년간 기후위기에 대한 독일인들의 높아진 경각심과 현 메르켈 정부의 기후위기 대응 노력에 대한 실망감이 자리 잡고 있다. 독일 연방환경청(BMU)이 지난 3월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환경과 기후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이 최근 3년간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독일 연방정부가 기후위기 및 환경문제에 충분히 대응하고 있다고 답한 응답자는 2016년 34%에서 2018년 14%로 대폭 하락했다.

녹색당이 현재의 전 지구적인 보건·기후위기 속에서 독일의 집권 대안세력으로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지난 40년간 야당으로서 녹색당의 존재감이 환경정책 면에서 집권 정당들에 영향을 미쳐왔다. 더욱이 최근엔 폭넓은 이해관계자를 아우를 수 있는 원숙한 대중정당으로 거듭났다.

독일의 원전 정책은 196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이때부터 원전 및 핵폐기물 처리장 건설 등에 반대하는 시위들이 벌어졌으나 지역 내의 운동에 머물렀다. 정부의 원전 정책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했다.

1974년 프라이부르크 인근의 빌(Wyhl) 지역이 새로운 발전소 부지로 선정되면서 반원전운동은 변화를 맞게 된다. 인근 주민들의 항의에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정부가 반응을 보이지 않자 150여 명이 건설 부지를 점거한 것이다. 주정부는 공권력 투입으로 수십 명을 연행했다. 반원전 운동에 공권력이 투입된 최초의 사건이었다. 이는 전국적인 이슈가 되었고 3만여 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반원전 시위로 발전되었다.

이때부터 반원전운동은 지역적 운동에서 전국적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브로크도르프, 칼카 등지에서 핵시설 건설부지 점거와 공권력 투입이 반복되었다. 사민당과 자민당(FDP) 연립정부의 반원전운동에 대한 진압이 폭력성을 더해가자 기존 학생운동과 신사회운동의 세력들도 시위에 가세했다. 반원전운동은 환경운동에서 국가폭력에 대한 저항으로, 나아가 평화운동, 반전운동으로 확장되었다.

‘친환경적인 것이 경제적’이라는 시각

1970년대 말부터는 반핵운동에 세 가지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난다. 첫 번째, 반핵운동의 의제가 원전 건설 반대에서 핵연료 재처리 및 핵폐기물 문제로 확대되었다. 두 번째, 에너지소비의 효율화와 재생에너지 등 핵에너지의 대안을 찾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세 번째는 반원전운동의 정치화다. 계속되는 전국적인 시위에도 정책 변화가 이뤄지지 않자 ‘직접행동’이 아닌 정치를 통해 변화를 이루려는 이들이 등장했다. 이는 의회 진출을 위한 정당 결성으로 이어졌다. 1977년을 시작으로 여러 연방주에서 반원전운동 세력의 선거 연대가 결성되었다. 선거 연대는 1980년 1월 녹색당 창당으로 이어졌다. 창당과 같은 해 치러진 첫 총선에서 녹색당은 1.5%를 득표해 의회 진입에 실패했다. 1983년 3월 총선에서는 5.6%를 얻어, 20여 년간 이어진 ‘기독민주당(기민)·기독사회당(기사) 연합-사회민주당(사민당)-자유민주당(자민당)’의 공고한 3당 체제를 깨뜨리고 연방의회에 입성한다.

1986년 4월, 폭발로 폐허가 된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AP Photo

녹색당은 독일 정치에서 환경 의제를 우선순위로 끌어올렸다. 1970년대까지 독일 환경정책은 미국이나 스웨덴 등의 환경정책을 쫓아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녹색당이 의회에 진출한 1983년을 기점으로 헬무트 콜의 독일 정부는 적극적인 환경정책을 추진해나가기 시작한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사고는 독일의 원전 정책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한편에서는 반원전운동이 더욱 격렬해져 화염병과 최루탄까지 등장했다. 다른 한쪽에서는 운동을 법정으로 가져가 원전 시설에 대한 소송전을 벌였다. 원자력을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으로 커졌다. 사민당은 원전 지지에서 원전 폐쇄로 노선을 바꿨다. 이러한 변화의 요인 중 하나는 반원전 여론을 통해 성장한 녹색당이었다. 사민당으로서는 녹색당을 중요한 연정 파트너로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민당의 변화는 당시 보수 연정을 이끌었던 기민·기사 연합이나 자민당의 원전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결국 독일은 이미 가동 중인 원전 이외의 확대 계획을 포기하게 된다.

녹색당은 1998년 연방선거에서 사민당의 소수당 파트너로서 처음으로 연립정부에 참여한다(적녹연정). 녹색당이 사민당에 제기한 연정의 조건은 원전 폐쇄였다. 양당은 단계적인 원전 폐쇄로 뜻을 모았다. 2000년 6월에는 정부와 원전 운영사들 사이에서 원전 폐쇄와 관련된 ‘원자력 합의’가 이루어졌다. 2002년에는 원자력법의 개정을 통해 원전 폐쇄 결정이 구속력을 갖게 된다.

생태적 세제 개혁을 통해 화석연료에 대한 탄소세를 도입하는 동시에 에너지 전환의 상징적 법률인 재생에너지법(EEG)이 도입된 것도 적녹연정 시기의 일이다. 2000년에는 공식적인 ‘지속가능성 전략’이 마련되었다. 자연보전법의 강화(2002), 환경과 관련된 단체소송제도 도입, 유기농업에 대한 지원 또한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앞서 헬무트 콜 정부가 도입한 기후 정책과 발전차액지원제도(Feed-in-Tariff) 또한 적녹연정에서 더욱 강력하게 추진되어 성과를 얻었다. 특히 2010년까지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을 12.5%로 늘린다는 재생에너지법의 당초 목표는 2007년에 14%를 기록하면서 훨씬 빨리 달성되었다.

독일 녹색당 녹색정치의 근간인 ‘생태적 근대화’ 기조가 정부 차원에서 뿌리내리게 된 것 또한 이 시기의 특징이다. 환경과 경제의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정치적인 관점인 생태적 근대화론은, 간단히 설명하자면, 환경과 경제를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환경오염을 경제성장의 불가피한 부작용으로 간주하는 기존 관점에서 탈피했다. 즉, ‘생태적이고 친환경적인 것이 궁극적으로는 경제적’이라는 시각이다. 1980년대 초부터 녹색당 내의 실용주의자(레알로)들은 이 ‘생태적 근대화’론에 기초한 산업시스템의 생태적인 전환을 추구해왔다. 1998년의 적녹연정은 생태적 근대화의 달성을 연정 합의문에 담아 공식화했다. 이러한 정책을 추진한 결과 이미 2005년에 기후보호와 관련된 투자가 독일 GDP의 5%를 차지할 정도로 성장했고, 독일의 환경기술산업은 세계시장을 선도하는 위치에 오르게 된다. 널리 알려진 독일 ‘에너지 전환’의 중요한 토대들은 이 시기에 형성되었다.

적녹연정이 끝나고 2005년 메르켈이 이끄는 기민·기사 연합과 사민당의 대연정이 들어선 이후 탈원전은 위기를 맞는다. 사민당이 환경장관을 담당한 덕에 탈원전 기조가 유지되긴 했으나 기민당 내부에서는 원전 폐쇄 정책을 포기한다는 결정이 내려진다. 탈원전 결정에 반대하는 흑황연정(기민·기사 연합과 자민당의 연립정부) 수립 이후인 2010년, 독일 정부는 원자력법의 개정을 통해 원전 폐쇄 계획을 수정했다. 원전의 폐쇄 시점이 대폭 후퇴하게 된 것이다. 이 시기 독일 정부가 발표한 ‘에너지 구상(Energiekonzept)’은 온실가스 감축 달성과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를 위한 원전 사용기한 연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역설적이게도 ‘에너지 구상’은 에너지 전환 정책을 위한 것이었다.

독일 정부의 원전 가동 연장 결정은 다시 전국적인 반원전 시위를 촉발했다. 이런 움직임에 힘입어 녹색당은 전례 없는 지지율 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여론조사에서 최초로 20% 이상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베를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사민당을 누르고 지지율 2위를 기록했다. 2011년 3월11일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따라 원전 문제가 독일 정국을 지배하게 되었다. 녹색당은 2017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는 법안을 의회에 제출하며 정부를 압박했다. 좌파당은 2014년까지 원전을 폐쇄하자고 주장했다.

산업계 설득에 공들이는 총리 후보

2011년엔 2월부터 9월까지 7개 주에서 연달아 지방선거가 치러졌다. 녹색당은 이 모든 선거에서 과거보다 훨씬 많은 표를 얻었다. 특히 후쿠시마 사고 직후인 2011년 3월27일 치러진 바덴뷔르템베르크주 선거에서는 11.7%에서 24.2%로 과거보다 두 배가 넘는 득표율을 기록하며 제1당으로 부상했다. 이후 주정부의 연정을 구성하면서 녹색당 역사상 최초로 주지사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 지역의 터줏대감이었던 중도우파 기민당은 뼈아픈 패배를 겪은 뒤 탈원전으로의 복귀를 선언하면서 2022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로 결정한다.

2001년 6월, 원자력 발전의 단계적 폐지 합의문에 서명하는 슈뢰더 당시 총리(가운데)와 녹색당 소속의 트리틴 환경부장관(오른쪽).ⓒMarco Urban

그러나 이런 정치적 성과가 무색하게도 2013년 연방 선거에서 녹색당은 특표율이 8.4%에 머무른다. ‘에너지 전환’ 의제를 메르켈 총리(기민당)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탈원전으로 (다시) 돌아서며 독일의 에너지 전환을 이끄는 지도자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기후 총리’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2011년 독일 정부의 탈원전 재결정이 녹색당에겐 핵심 의제의 상실을 의미했다.

2017년 선거에서 녹색당은 기민·기사 연합, 자민당과 함께 연정을 위한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이 협상은 자민당의 이탈로 무산된다. 탈석탄 정책에 대한 이견 때문이었다. 녹색당은 석탄 발전의 단계적 완전 종료와 화력발전소 20곳 즉각 폐쇄, 내연기관 차량 신규 허가 2030년 종료 등을 주요 기후정책으로 내걸었다. 반면 자민당은 석탄 발전의 경제적 필요성을 피력해온 까닭에 녹색당과의 합의점을 도출해내기 어려웠다. 이후 들어선 대연정은 2020년이 되어서야 2038년까지 석탄 발전을 종료하겠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녹색당은 이 계획이 기후 목표를 달성하기에는 너무 기한이 길다며 반대했다.

오는 9월 선거를 위한 녹색당의 핵심 공약은, ‘독일의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70%로 감축하는’ 것이다. 기후보호법이 정한 55%보다 15% 더 높은 목표다. 2030년 이후 내연기관 차량 신규 허용 금지도 지난 선거에 이어 다시 등장했다. 교통 부문에서는 올해 도입된 교통 탄소배출권 가격을 현행 1t당 25유로에서 60유로로 대폭 인상하려고 한다. 철도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를 통해 단거리 항공을 철도로 대체할 계획이다. 해상 및 육상풍력 등 재생에너지 확대도 주요 공약이다.

아날레나 베르보크 녹색당 총리 후보는 특히 산업계에 기후정책을 설득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그는 현 시점이 기후친화적 전환을 통해 “(독일 산업이) 기술적인 비교우위를 점할 기회”라고 역설한다. 기후친화적 기술개발은 물론 친환경적 수소 발전에도 대규모 재정지원을 약속했다.

탄소중립 사회로의 전환은 독일뿐 아니라 글로벌 차원에서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기후위기가 점점 더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으로 악화되며 하루하루 ‘티핑포인트(급변점)’를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녹색당이 실제로 기후위기를 해결할 기회를 갖게 될지는 9월 선거에 달려 있다.

기자명 박상준 (베를린 훔볼트 대학 농업경제학과)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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