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짜 수산업자 김씨가 대표로 있는 경북 포항 남구의 부림물산. ⓒ시사IN 문상현

누군가에겐 ‘선박왕’이자 청년 재력가였다. 다른 누군가에겐 언론사 부회장이었고 생활체육단체 임원이기도 했다. 정치권과 검찰·경찰·언론·교육·연예·의료계 인사들이 그와 어울렸다. 최근 전방위 로비 의혹 사건의 중심에 선 ‘가짜 수산업자’ 김 아무개씨의 이야기다.

그는 현재 1심 재판을 받고 있다. 2018년 6월부터 올해 1월까지 7명을 속여 116억원을 가로챈 혐의(사기 등)다. 김씨는 자신을 1000억원대 유산을 상속받은 수산업자로 소개했다. 가지고 있지도 않은 선박 여러 척과 거짓 선동오징어(선상에서 급랭한 오징어) 사업으로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며 투자자를 모았다.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사기 사건이 지난 6월23일 급반전했다. 경찰이 현직 검사 사무실을 압수수색하면서다. 압수수색은 김씨의 입에서 시작됐다. 오징어 사기 사건으로 검찰에 송치되기 직전인 4월 초, 그는 돌연 경찰에 면담 요청을 하고 “유력 인사들에게 상납한 자료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김씨의 휴대전화에선 현직 검사 외에도 사회 각계각층 인사의 이름이 줄줄이 나왔다. 박지원 국가정보원장과 국민의힘 주호영 의원, 경북 포항이 지역구인 김병욱 의원, 김무성·정봉주·이훈평 전 의원 등 정치인들을 비롯해 박영수 특검과 변호사, 경찰 간부, 사립대 전 이사장,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대변인이었던 이동훈 전 〈조선일보〉 논설위원, 엄성섭 TV조선 앵커 등이 포함됐다. 이들은 김씨로부터 금품과 차량을 받았거나 식사·수산물 등을 제공받았다는 의혹을 산다. 단순 사기 사건 피의자였던 김씨가 전방위로 금품을 뿌린 ‘로비스트’라 불리게 된 이유다.

김씨는 2016년 사기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 그는 2008년부터 2년 동안 피해자 총 36명으로부터 1억6000만원을 가로챈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그는 당시 아르바이트를 했던 변호사 사무실의 사무장을 사칭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피해자들에게 접근했다. 개인회생을 시켜주겠다며 돈을 가로챘다. 다른 사람의 명의로 휴대전화기를 할부로 사거나, 정수기 등을 빌렸다. 2심 판결문을 보면, 김씨는 당시 일정한 직업도 없고 사기로 가로챈 돈을 전부 생활비로 썼다. 피해자들과 합의도 못할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컸다.

김씨는 출소 직후 오징어 사업을 내세워 다시 사기극을 벌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업으로 돈을 가로채는 등 직전 사기 행각과 수법이 비슷했다. 그러나 이번엔 ‘진짜’가 있었다. ‘인맥 네트워크’였다. 첫 단추는 20년 넘게 기자 생활을 한 송 아무개씨를 만나면서 채워졌다. 송씨는 과거 김무성 전 의원 캠프에서 특보를 맡기도 했다. 직접 정치에 뛰어든 적도 있다. 2016년 총선 당시 경북의 한 지역구 새누리당 예비후보로 등록했지만,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2017년 대구교도소 수감 당시 김씨도 같이 있었다.

김씨를 아는 복수의 관계자들은 이번 사건의 시작점을 2018년 4월이라고 지목했다. 김씨가 송씨를 찾아가면서부터라는 것이다. 다만 당초 김씨가 송씨에게 접근한 목적은 오징어 사업 명목으로 투자금을 가로챌 목적이었다고 한다. 송씨에게 돈을 받고 추후 사업 수익이라고 속여 일부만 돌려준 뒤, 나머지를 챙겨 잠적할 계획이었다. 실제 송씨는 이번 100억원대 오징어 사업 사기 사건에서 17억원을 투자한 피해자다. 그는 김씨에게 처음에는 1억여 원만 투자금으로 건넸는데, 김씨는 이 돈만 챙기고 송씨와 관계를 끊을 심산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송씨가 유력 인사들에게 김씨를 소개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김씨가 송씨에게 김무성 전 의원 팬을 자처하며 만남을 주선해달라고 했고, 송씨 역시 정치권 인사들에게 좋은 사업 아이템을 가진 청년 사업가가 있다며 소개했다. 이때 김씨가 만난 인사 가운데 한 명이 김무성 전 의원의 친형이다. 김 전 의원의 형은 김씨에게 총 86억원을 오징어 사업 투자금으로 건네면서 이번 사건의 최대 피해자가 되었다. 김씨 측 한 관계자는 “당초 계획했던 1억원이 갑자기 100억원이 됐다. 그때부터 김씨가 대범해졌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송씨로부터 소개받은 이들을 통해 다른 인사들을 만났다. 김씨가 거짓 직함을 여러 개 만들어 내세우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재력을 과시하며 수산물 선물 등을 통해 유력 인사들의 환심을 샀고, 이들의 이름을 뒷배 삼아 또 다른 인사들에게 접근했다. 박영수 특검과 현직 검사, 변호사 등을 이 방식으로 접촉했다. 김씨는 지역 활동 등을 통해 단체로 한 번 식사를 하고 만남이 없었던 인물들에게도 연락 없이 선물을 보내는 등 정성을 들였다.

김씨는 선물 등으로 환심을 산 유력 인사를 뒷배 삼아 박영수 특검(아래)에게 접근했다. ⓒ연합뉴스

인맥 관련 진술에 대한 김씨의 태도 변화

김씨의 고향인 포항 구룡포읍에서 만난 주민들은 하나같이 “배 10척만 있어도 손에 꼽는 ‘선박왕’으로 불린다. 수십 척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직접 보지도 않고 어떻게 덜컥 믿었는지 의문이다”라고 지적했지만, 네트워크의 힘은 의심을 지웠다. 이 사건을 주시하는 국회의 한 의원실 관계자는 “(유력 인사들이) 김씨를 보자마자 믿었던 게 아니다. 김씨가 아니라 그를 소개해준, 오래 알고 지냈던 신뢰할 수 있는 지인을 믿은 것이다. 인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가 만들어낸 하나의 촌극이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렇게 만든 인맥을 사기가 아닌 다른 목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오징어 사업 사기로 100억원 밑천이 생겼으니, 새 인맥과 돈으로 ‘실체가 있는 단체’에서 자리를 잡거나 다른 사업과 연결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김씨 측 다른 관계자는 “여러 아이디어 가운데에는 연예계나 성형외과 등 의료계에 접근해 홍보로 돈을 버는 구상도 있었다. 과거 사무장을 사칭한 사기 사건과 비슷하지만, 이번에는 실제로 존재하는 인맥을 활용했다는 게 다른 점이다”라고 말했다.

경찰은 최근 현직 검사와 경찰 총경급 간부, 언론인 등 총 7명을 입건했다. 피의자들을 연달아 소환하면서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들이 받는 혐의는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일명 김영란법)’ 위반이다. 피의자 모두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또한 경찰은 김씨가 연결해줬던 전직 사립대 이사장과 교수, 현직 검사의 골프 회동 경위를 확인하고 있다. 해당 사립대는 지난해 6월 환매가 중단된 옵티머스 펀드에 120억원을 투자했다가 입길에 올랐다.

이 사건이 뇌물죄까지 확대될지는 현재로서는 미지수다. 뇌물 사건의 핵심은 공여자의 구체적 진술, 명확한 물증, 대가성과 직무 관련성 입증이다. 뇌물죄가 적용되면 청탁금지법보다 처벌 수위가 높아져 수사 규모도 지금과는 크게 달라진다. 사건의 열쇠를 쥔 김씨는 현재 “검찰에서 진술하겠다”라며 경찰 수사를 거부하고 있다. 오히려 7월7일 열린 오징어 사기 사건 재판에서 경찰의 휴대전화 압수수색 과정을 문제 삼기도 했다.

법조계에선 김씨의 태도 변화에도 주목한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로비스트들의 재산은 인맥이다. 자신이 처벌받는 상황에 처해도 그 이후를 생각해 그들이 곤란해질 만한 진술은 하지 않는다. 인맥 관련 진술의 배경에는 이들에게 어떤 경로로든 도움을 요청했으나 묵살되자 홧김에, 또는 원한을 품은 경우가 많다. 김씨는 검찰 송치 전 경찰에서 ‘유력 인사에게 금품을 상납했다’고 진술했다가 다시 말을 바꿔 경찰 수사에 협조하지 않고 있지만, 그가 검찰에서 다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포항·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