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30일 열린 유로 2020 영국 대 독일 16강전. 영국이 2대 0으로 앞서며 승리가 사실상 확정됐을 때 경기장 전광판에 한 독일 소녀가 등장했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로 보이는 아이였다. 얼굴에 독일 국기를 그려 넣은 소녀가 아빠로 보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 울고 있는 모습을 본 영국 팬들 사이에서 환호하는 함성이 터졌다. 이기고 있는 입장에서 너무한다 싶었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경기가 끝난 뒤 인터넷에서 소녀의 사진이 독일을 비웃는 메시지와 함께 퍼져나갔다. 전 영국 축구 선수인 게리 리네커는 이 내용을 트위터에 올리며 “역겹다. 소름끼치는 제노포비아”라고 했고, 한 영국인 사업가는 “영국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끔찍하지는 않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소녀를 위한 모금을 시작했다. 이틀 만에 8000파운드(약 1250만원) 이상이 모였다고 한다.
이 사건을 보면서 의문이 생겼다. 만약 전광판에 잡힌 팬이 여자 아이가 아니라 남자 아이였다면, 혹은 남성 성인이었다면 어땠을까. 아이에 대한 공격적 표현의 종류 때문이다. ‘어린 나치’ 같은 인종혐오적 표현도 있었지만, ‘cunt’ ‘slag’ 같은 여성혐오적 표현도 많았다. 자기 나라가 경기에 져서 우는 여자 아이에게 우리말로 하면 ‘걸레’ 같은 성적 비속어를 쓰는 걸 어떻게 봐야 하나. 인터넷에 한번 퍼진 내용은 없애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아이가 나중에 자신의 어릴 적 사진이 이런 비속어들과 함께 돌아다니는 걸 본다면 어떤 느낌일까. 게리 리네커가 일부 영국인들의 행태를 ‘제노포비아(외국인 혐오증)’라고 한 건 절반만 맞는 말이다. 아이는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확산된 제노포비아와 여성혐오 범죄의 이중 피해자다.
인터넷이 삶의 일부가 되며 실생활에서 벌어지는 폭력의 상당수가 온라인으로 무대를 옮겼다. 협박성 메시지, 신상 털기 같은 범죄에는 남녀 구분이 없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 성인, 미성년자 할 것 없이 온라인 성범죄에 노출되는 비율이 남성보다 훨씬 높다. 온라인 성범죄란 무엇인가. 협박이나 성희롱적 메시지, 원치 않은 신체 사진 전송, 관심을 빙자한 온라인 스토킹, 개인정보 해킹, 이를 이용한 공개적 망신 주기 등이다. 코로나19로 인터넷 사용이 늘어나면서 온라인 성범죄의 종류도 더 다양해졌다. 줌바밍(zoombombing)이 한 예다. 화상회의 플랫폼인 ‘줌’과 폭격을 뜻하는 ‘바밍’을 합성해 만든 이 단어는 줌을 통한 수업이나 회의 때 초대받지 않은 외부인이 마음대로 접속해 음란물 사진을 퍼붓는 등 방해하는 행위를 뜻한다.
실제로 신체 접촉이 있는 것도 아닌데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뭐 그리 대수냐는 주장도 전에는 흔했다. 온라인 성범죄를 별것 아닌 것으로 보고 내버려둔 결과가 N번방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온라인만으로도 얼마든지 끔찍한 성 착취가 일어날 수 있음을 알린 계기가 됐다.
‘새로 나온 모든 기술은 포르노에 쓰인다’
문제는 갈수록 심각해지고 다양해지는 온라인 성범죄에 적절히 대처할 법 제도가 미비하다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큰 비용을 치르고 나서야 일명 ‘N번방 방지법’을 통과시켰지만 프라이버시 침해 가능성이나 해외 서버는 수사할 수 없어 무용지물이라는 점 등 때문에 논쟁 중이다. 유럽이라고 대단히 나을 것도 없다. 성범죄와 관련한 스위스 법안이 마지막으로 개정된 건 30년 전이다. 최신 온라인 성범죄에 적용하기엔 당연히 무리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유럽에서 아주 흔한 온라인 성범죄 중 하나는 ‘딕 픽(dick pic)’, 즉 성기 사진 전송이다. 소셜미디어에서 여성 이용자가 채팅이나 메시지를 통해 사전에 수신 동의한 적이 없는 남성의 성기 사진을 받는 것이다. 국제앰네스티 스위스 지부가 2019년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 39세 스위스 여성의 약 20%는 성기 사진을 포함해 성적인 의미가 명확한 사진을 받은 경험이 있다. 이 성기 사진이 음란물인지, 성희롱인지 아니면 성폭력인지에 대한 법적 기준은 모호하다. 현재 스위스 형법은 이것을 음란물로 보고 수신자가 성인일 경우 벌금형을, 미성년자일 경우 3년 이하 징역형을 내린다.
특정 의도를 갖고 원치 않는 사람에게 전송하는 성기 사진이 음란물인가? 법학자들과 여성 단체들은 이를 음란물이 아닌 성폭력으로 봐야 한다고, 성폭력을 정의할 때 신체 접촉만이 아닌 사진까지 포함시키자고 주장한다. 유럽 국가들 중 ‘딕 픽’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나라가 핀란드다. 성인에게 원치 않은 성기 사진을 보낼 경우 최대 6개월 징역형을 부과하는 법안을 현재 의회에서 논의 중이다.
급변하는 현실을 법이 못 따르면 시민들이 나선다. 스위스에선 올해 3월 특별한 웹사이트 하나가 문을 열었다. ‘Netzpigcock.ch’라는 이 사이트의 목적은 여성들이 소셜미디어 등에서 성기 사진을 받았을 때 빠르고 효율적으로 수사 당국에 고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다. 비영리 시민단체 ‘인터넷 용기(Netz Courage)’에서 만들었다. 여성이 성기 사진을 받아도 대부분 고발로 이어지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어디에 어떻게 신고해야 할지 몰라서, 고발장을 작성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서, 처벌 근거가 있는지조차 몰라서다. 이 사이트는 그런 문제를 해결한다. 정해진 양식에 따라 받은 성기 사진을 업로드하고 주어진 몇 가지 문항에 간단한 답변을 남기기만 하면 자동으로 고발장이 pdf 문서로 완성된다. 여기에 걸리는 시간은 1분 남짓이다. 피해자는 문서를 다운받아 경찰에 우편으로 보내기만 하면 된다. 우편 비용도 이 단체에서 부담한다.
이 서비스가 시작된 지 한 달 만에 고발장 1178건이 다운됐다고 한다. 물론 고발을 한다고 해서 모두 수사와 처벌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 성기 사진을 음란물로 처벌하는 법 규정도 아쉽다. 하지만 그동안 쉬쉬하며 참아 넘기던 일을 법의 테두리 안으로 넣었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움직임이다. 제대로 된 통계조차 구할 수 없던 ‘딕 픽’ 건수가 대략적으로나마 드러났다는 게 어딘가.
인터넷 용어로 ‘룰 34’라는 게 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포르노 버전이 있다(There is porn of it. No exceptions)’는 내용으로, 책이나 영화·사람·물건 등 모든 것이 음란물로 패러디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해리 포터〉가 뜨면 그 뒤에 〈해리 피터〉라는 음란물이 등장한다(실제로 있다). 최신 디지털 기술을 가장 먼저 접하는 IT 업계의 엔지니어들은 ‘룰 34’를 살짝 비틀어 ‘새로 나온 모든 기술은 포르노에 쓰인다’고 말한다. 화상회의를 위한 기술이건, 온라인 쇼핑을 돕는 기술이건, 새롭게 등장한 기술은 결국 성적인 목적으로 사용된다는 거다. 딥페이크(deepfake)가 좋은 예다. 처음에는 영화 특수효과 용도로 쓰였지만 곧 사람과 음란물을 합성하는 데 이용되었다. 기술에는 선악이 없지만 그걸 이용하는 의도에는 선악이 있다. 우리는 기술 발달에 따른 새로운 룰을 만들 준비가 돼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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