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2일 전당대회에 참석한 아날레나 베르보크 녹색당 공동대표. ⓒAP Photo

독일은 정당정치의 모범 국가로 여겨진다. 온건 보수와 진보를 각각 표방하는 기독민주당(기민당)과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양 날개로서 민주주의의 성숙과 경제성장을 이끌었다. 그러나 기후위기, 난민 문제, 경제 양극화, 극우 세력의 약진 등 새로운 이슈들이 등장하면서 전통적인 의회정치에 울리는 경고음이 커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독일 녹색당이 ‘등대 정당’을 넘어 집권 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지난 16년 동안 총리직을 이어온 앙겔라 메르켈 총리가 퇴임할 예정인 오는 9월26일 총선에서 녹색당은 어떤 정치적 성과를 거두게 될까? 제도권 정치에서 큰 의미를 부여받기 힘든 군소정당으로 간주되어온 녹색당이 정권 창출까지 내다보는 정당으로 도약한 과정은 한국 사회에도 의미하는 바가 크다. 독일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공부하는 필자들이 5회에 걸쳐 녹색당의 성장기를 살펴본다.

녹색당 공동대표인 아날레나 베르보크와 로베르트 하베크는 지난해 6월 독일 주요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기고문을 보냈다. 집권당인 기민당의 창당 75주년을 축하하기 위함이었다. 베르보크와 하베크는 기고문에서 ‘안정과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기민당의 국가운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기민당은 1945년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직후 창당해 독일 재건 및 새로운 체제의 형성에 기여했다. 초대 총리인 콘라트 아데나워를 시작으로 기민당 소속 총리가 재직한 기간을 합치면 40년이 넘는다.

물론 이 기고문이 축하 메시지만을 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두 젊은 공동대표는 녹색당이 어느덧 안정적인 정권 운영과 협치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우회적으로 표현했다. 기민당처럼 녹색당도 집권당으로서 발돋움할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다. 오는 9월 연방의회 선거에서 기민당의 집권 연장을 위협할 강력한 경쟁자는 사회민주당(사민당)이 아니라 녹색당이다. 6월16~23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녹색당은 지지율 22%로 기민당에 이어 2위에 올랐다. 총리 선호 여론조사에서도 녹색당의 베르보크 후보가 23%로 기민당의 아르민 라셰트(26%)에 이어 2위를 기록했다.

기민당과 녹색당은 9월 총선 이후 예상되는 가장 유력한 연정 파트너이기도 하다. 기민당이 1위를 기록하더라도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차지하기는 어려우리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녹색당을 연정 파트너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만약 녹색당이 1위를 차지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 급진적인 진보정당으로 여겨져온 녹색당과 보수정당인 기민당이 독일 정부를 이끌게 된다. 독일 사회와 두 정당이 그동안 여러 가지 변화를 거쳐왔기에 가능한 일이다. 특히 녹색당은 당이 추구하는 가치의 스펙트럼을 점진적으로 넓혀왔다.  

1980년 창당 당시, 녹색당은 기존 정당이나 시스템과 타협하지 않고 의회 외부에서 운동의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 생태주의적 좌파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당을 주도했다. 강령에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강하게 비판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의 기초 이념 중 하나는 비폭력으로, 이는 사실상 모든 군사행위를 폭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 같은 초기 노선에 따르면, 기민당과 사민당 등 기존 정당들은 녹색당의 협력 대상이 아니라 극복 대상이었다. 그러나 녹색당 내부엔 현실 정치 참여와 꾸준한 변화를 중요하게 생각했던 현실주의적 당원들도 있었다. 요슈카 피셔가 이런 경향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1985년 피셔는 헤센주에서 사민당과 녹색당의 연정을 끌어내며 주정부의 환경장관이 된다. 연정과 주정부 참여는 녹색당에서 최초의 일이었다. 1998년 녹색당은 연방 단위에서도 처음으로 연정에 참여한다. 슈뢰더 총리의 사민당과 녹색당이 함께 구성한 연방정부가 탄생한 것이다. 요슈카 피셔는 외무장관 겸 부총리가 됐다. 이 시기, 녹색당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되는 사건이 일어난다.

1980년 1월 창당대회를 연 독일 녹색당의 초대 지도부. ⓒAFP PHOTO

당의 기본 가치에서 ‘비폭력’ 빼다

1999년 3월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가 당시 신유고연방의 코소보 지역을 폭격했다. 독일 또한 나토 회원국으로 참여했다.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갈등에서 시작된 코소보 전쟁에서 세르비아계인 밀로셰비치 당시 신유고연방 대통령이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조직적 인종청소를 자행했고, 이에 대해 나토가 ‘인종청소 저지’라는 명분으로 개입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나토의 군사행동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 없이 진행되었다. 독일 외무장관이었던 피셔는 독일군의 참전을 적극 지지했다. 이는 어떤 군사적 행동에도 동의하지 않는 당내 평화주의자들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녹색당 내 좌파 진영의 중요한 정치인 한스 크리스티안 슈트뢰벨레의 주도로 ‘나토 군사침략의 즉각적인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제출된다.

결국 1999년 5월13일 녹색당은 이 문제를 두고 특별 전당대회를 열게 되었다. 대의원들이 투표로 독일의 코소보 참전에 대한 당의 입장을 결정할 것이었다. 피셔를 지지하는 당대표단의 안과 군사행동의 즉각 중단을 요구하는 안이 맞붙었다. 수많은 시위대가 전당대회장을 둘러쌌다. 대의원 800명을 보호하기 위해 경찰 1500명이 투입됐다. 정작 큰 사건은 외부가 아니라 대회장 내부에서 발생했다. 누군가 피셔를 향해 빨간색 물감이 든 봉투를 투척했다. 오른쪽 귀에 봉투를 맞은 피셔는 귀를 손으로 감싸며 얼굴을 찡그렸고 그의 양복은 붉게 물들었다. 피셔는 얼룩진 양복을 입은 그 상태로 연설을 시작했다.

“전쟁이 되풀이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한다. 하지만 (밀로셰비치의 세르비아계가 자행하는) 아우슈비츠와 파시즘 또한 다시는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결국 대의원 800명 가운데 444명의 찬성을 얻어 당대표 안이 통과되고, 녹색당은 독일군의 코소보 전쟁 참전을 지지하게 된다. 이날 피셔는 오른쪽 고막이 찢어졌지만 그의 당내 입지는 강화되었다. 이는 녹색당이 1980년부터 유지하던 반나토·비무장 등의 기조를 완전히 포기한 사건이었다. 빨간 물감을 맞은 피셔의 모습은 초창기와 완전히 달라진 녹색당의 면모를 상징하는 장면이 된다.

2002년 만들어진 새로운 강령은 이러한 기조를 반영해 당의 기본 가치 항목에서 ‘비폭력’을 뺀다. 또한 ‘생태’의 구체적 실천 원리로서 ‘지속가능성’에 방점을 찍었다. 이로써 녹색당은 생태적 전환을 통해 새로운 경제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 반전·비폭력·반자본주의를 강조했던 초기 녹색당의 성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다.

지난해인 2020년 11월 녹색당은 새로운 강령을 발표했다. 강령의 제목은 ‘존중하고 보호한다’이다. 독일 헌법인 기본법 제1조 1항 ‘인간의 존엄은 침해할 수 없으며,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모든 국가 공권력의 의무다’에서 따왔다. 녹색당이 환경 같은 대안적 가치뿐만 아니라 독일 사회 구성원의 다양한 요구를 포괄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제목이다. ‘변화가 안정을 만든다’라는 부제는 기후위기에 대한 적극적 대응이 사회의 안정적 발전을 위해서 중요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기후위기는 녹색당 지지율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청소년들이 이끈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 시위와 점점 심각해지는 기상이변 문제는 독일인들에게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각인시켰다. 시사주간지 〈슈피겔〉에 따르면 독일인의 77%가 기후위기를 심각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높은 수치다. 그중 60%는 기후위기의 심각성 때문에라도 정권이 바뀌어야 한다고 응답했다. 〈슈피겔〉은 대부분의 독일인이 기후위기를 문제로 인식하고 있지만 자신의 일상을 바꾸기를 원하지는 않는다고 꼬집었다. 녹색당의 선거 전략은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모순을 인정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설득하는 것이다.

아민 나세히 뮌헨 대학 교수는 독일의 저명한 사회학자다. 그는 녹색당과 긴밀하게 교류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좌파·우파라는 이념 구분 위에 정치가 작동하는 시대는 끝났으며, 이로 인해 정치권에서 ‘녹색’의 경쟁력이 점점 강화되리라고 내다본다. 각 유권자의 욕구는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분화되어서 이제 그 욕구들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이념은 없다. 사회정의·경제·평화·성평등·이민자 문제 등은 각각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영역에 속한다. 이처럼 서로 다른 영역을 녹색당이 유연하게 연결할 수 있다고, 아민 나세히 교수는 주장한다.

1999년 5월 전당대회에서 빨간색 물감을 맞은 요슈카 피셔 당시 외무장관 겸 부총리. ⓒAFP PHOTO

저소득층에 부담 안 주는 기후위기 정책

6월12일 녹색당은 전당대회에서 연방의회 선거 공약을 통과시키며 본격적인 선거 캠페인에 돌입했다. ‘독일, 모든 것이 여기에 있다’라는 선거 공약집의 제목을 두고 잠시 논쟁이 일기도 했다. 일부 당원들이 제목에 들어간 ‘독일’이라는 단어가 국가주의를 연상케 한다며 수정을 청원했지만 유지하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대중과 접점을 넓히고 지지층을 두껍게 확보해서 녹색당 최초로 총리를 배출하려는 지도부의 의지에 당원 대다수가 지지를 보낸 것이다. 총리 후보인 베르보크는 이제부터 진짜 선거전이 시작되었다며, 당원 모두가 이번 선거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선언했다.

녹색당 선거 공약의 핵심은 지구 기온 상승을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1.5℃ 이하로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기후위기 관련 정책이다. 그러나 녹색당이 환경만을 고려하고 일반 시민들의 삶이나 경제성장에 관심이 없다는 인식을 지우기 위해, 기후위기 정책을 경제성장이나 분배 정책과 연결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녹색당은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70% 감축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올해 1월 이산화탄소 1t당 25유로로 도입된 탄소배출세를 2023년까지 60유로로 올리겠다는 계획이다. 현재 독일의 기후변화 대응법이 1990년과 비교해 2030년까지 온실가스 배출량 55% 감축을 목표로 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녹색당의 대응 정책이 더 적극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녹색당은 기후위기 대응 정책이 저소득층에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도록 관심을 기울인다. 탄소배출세로 마련된 재원을 시민들에게 에너지 지원금 형태로 돌려줘 난방비나 차량 유지비 부담의 증가를 보완할 계획이다. 또한 해마다 500억 유로(약 67조원)를 생태적 사회 전환에 투자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공약했다. 현재 9.6유로(약 1만3000원)인 시간당 최저임금을 12유로(약 1만6000원)까지 올리고, 그동안 노동조합들로부터 강력히 비판받아왔던 ‘하르츠 IV(실업급여 수급 기간의 대폭 단축, 비정규직 확대 등을 골자로 한 독일의 노동시장 개혁 정책)’를 폐지하겠다고 공약했다. 이와 함께 최상위 소득 계층에 대한 증세와 국방 및 외교에 대한 적극적 공약도 내놓았다.

녹색당은 기민당과는 경제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보수층을, 사민당이나 좌파당과는 사회적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진보층을 두고 경쟁한다. 녹색당이 독일의 미래 권력이 될 수 있을지는 9월에 결정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독일 정치의 중심에 녹색당이 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