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4월10일 대한성형외과의사회 임원이 의료사고와 일부 병원의 비도덕적 운영 행태에 대해 사죄하고 있다. ⓒ연합뉴스

의사 단체가 고개를 숙이고 사과한 적이 있다. 일부 의사들의 치부를 공개하며 비상식적 의료 행위를 바로잡겠다고 약속했다. 2014년 4월10일 대한성형외과의사회가 발표한 대국민 성명의 내용이다. 회원의 비위에 지나치게 관대하다는 비판을 받아왔던 의사 단체가 내부 문제를 바깥에 알리고 문제 삼는 건 지극히 드문 일이었다. 의료계는 대한성형외과의사회의 ‘고백’을 ‘대사건’으로 평가했다.

고백의 배경에는 2013년 12월9일 한 여고생이 성형수술 도중 뇌사에 빠진 사건이 있다. 조사 결과 일부 대형 성형외과들의 ‘대리 수술’이 사실로 확인됐다. 광고비 및 브로커 비용 등으로 거액을 쓰고 상대적으로 인건비가 낮은 의사를 고용해 수술 횟수를 늘리는 식이었다. 수술실의 한 침대에서는 지방흡입 수술을, 다른 침대에서는 가슴 수술을 동시에 진행하기도 했다. 환자가 ‘유령 의사’의 얼굴을 마주하게 될 것을 우려해 프로포폴 등 수면마취제를 과다 투여했다. 의사회는 “썩은 싹을 과감히 도려내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나갈 것이다”라고 밝혔다.

그러나 의사회는 확실한 재발 방지를 약속할 수 없었다. 폐쇄적인 공간에서 반복적이고 조직적인 은폐가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수술실은 외부와 철저히 차단돼 있다. 수면마취를 한 환자는 의식이 없다. 내부고발이 없으면 수술실에서 일어나는 비상식적 의료 행위 적발은 불가능하다. 수술에 참여한 다른 의사와 간호조무사 등의 양심선언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수술실에 CCTV를 달자는 의견이 나왔다. 환자의 의사 폭행 때문에 CCTV 설치가 거론된 적은 있었다. 의료진 보호가 목적이었다. 환자 권익보호를 위해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이 만들어진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후 각종 대리 수술과 성범죄가 연이어 일어나면서 입법 요구 목소리에 본격 힘이 실렸다.

그러나 수술실 CCTV 설치 법안은 국회 근처를 맴돌기만 했다. 제19·20대 국회에서 관련 법안이 발의됐지만 논의조차 되지 못하고 자동 폐기됐다. 2019년 5월 안규백 더불어민주당(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수술실 CCTV 설치 법안은 발의 하루 만에 폐기되었다. 법안에 서명한 의원 5명이 갑작스레 공동 발의를 철회했다. 법안 발의 최소 기준은 공동 발의자 10명 이상이다. 철회한 한 의원이 “의사의 항의가 있었다”라고 해명해 의료계 눈치를 봤다는 지적이 나왔다.

현재 제21대 국회에는 수술실 CCTV 관련 법안이 모두 3건 올라 있다. 지난해 안규백 의원이 다시 발의했고, 같은 당 김남국·신현영 의원도 각각 대표 발의했다. 현재 수술실에 CCTV를 설치해야 한다는 여론은 압도적이다. 6월28일 국민권익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찬성 97.9%, 반대 2.1%다. 의료계와 환자 단체 사이에서 중립을 고수해온 정부도 최근 ‘내부 설치’ 의견을 밝혔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의원 대부분은 여야 구분 없이 입법 취지와 CCTV 설치 자체에 공감대를 모으고 있다. 정치권과 정부, 환자 단체는 물론이고 의료계에서도 법안 통과를 위한 여건은 갖춰졌다고 평가한다.

이준석 대표에게 공개 질문 던진 이후

정작 법안은 첫 관문인 법안심사소위원회(법안소위)를 넘지 못하고 있다. 소속 의원들은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6월까지 4차례에 걸쳐 회의를 하고 공청회도 열었지만 마침표를 찍지는 못했다. 처리가 지연되는 이유는 보건복지위 법안소위 회의록에 선명하게 드러난다.

법안소위 첫 회의가 열린 지난해 11월26일 보건복지부는 전국 병원의 CCTV 설치 현황을 공개하고 ‘자율 설치’하는 의견을 냈다. 발의된 법안에 비해 크게 후퇴한 모습이었지만 여야 간 갈등도 이견도 없었다. 의원 대부분은 별다른 의견을 내지 않고 설치 현황과 운영 방식을 파악하는 데 그쳤다. 법안 처리를 서두르자고 주장한 참석자는 여당 간사인 김성주 의원뿐이었다.

두 번째 회의는 2월18일 열렸다. 보건복지부는 ‘수술실 내부엔 자율 설치, 입구엔 의무 설치’ 의견을 냈다. 일종의 절충안이었다. 이날도 여야 사이에 이견이 없었다. 오히려 상당한 합의를 이뤘다. 회의에 참석한 의원 11명 가운데 발의된 법안대로 수술실 ‘내부’에 CCTV를 의무적으로 설치해야 한다는 의견은 강병원 민주당 의원 한 명뿐이었다. 법안 처리는 이날도 무산됐다. 4월28일 열린 세 번째 회의는 의원들이 5월 열릴 공청회에서 의견을 듣고 논의하기로 합의하면서 10분도 안 돼 끝났다. 보건복지위 소속 민주당 의원실의 한 관계자는 “당시 큰 틀에서 합의는 이뤄졌지만 법안의 핵심인 내부 설치를 자율로 할지, 의무로 할지에 대해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환자 단체 요구와 의료계 입장을 절충하고자 했다”라고 말했다.

6월23일 네 번째 회의에서는 처음으로 여야 의견이 엇갈렸다. 민주당 의원 대부분이 이전 회의들과는 사뭇 다른 태도를 보이며 법안의 ‘내부 설치 의무화’ 조항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국민의힘 의원들은 CCTV 설치 위치부터 범위, 관리 문제 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해야 한다는 입장을 냈다. 세부 사항은 추후에도 논의할 수 있으니 일단 법안을 처리하자는 민주당 의원들과 논의를 마치고 처리해야 한다는 국민의힘 의원들의 견해가 엇갈리면서 결국 여야는 이날도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갑자기 정치권의 반응이 달라진 이유는 뭘까. 국회 논의 과정 전반을 지켜봤던 환자 단체와 의료계는 그동안 다소 소극적이었던 양당 의원들이 ‘특정 시점’ 이후 논의에 참여하는 태도와 방향성 면에서 크게 달라졌다고 했다.

그 시점은 6월14일이다. 윤호중 민주당 원내대표가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를 향해 “국민 10명 중 8명이 찬성하는 수술실 CCTV 설치법은 반드시 해결해야 한다. 새로운 야당 지도부는 어떤 의견을 가지고 있느냐”라고 공개 질문을 던진 날이다. 이준석 대표는 같은 날 “의사들이 의료 행위에 굉장히 소극적으로 임할 수 있다. 전문가 의견을 좀 더 청취해보고 입장을 내겠다”라고 밝혔다.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엘리트 기득권을 대변해왔던 국민의힘의 기존 모습과 달라진 게 없다”라고 공개 비판했다. 이준석 대표가 “민주당은 언제까지 선악을 조장해서 여론조사 정치를 하실 건가”라고 받아치며 논쟁에 불이 붙었다.

환자 단체와 의료계는 이런 분위기를 우려한다. 수술실 CCTV 설치 문제가 정쟁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9개 환자 단체로 구성된 한국환자단체연합회 안기종 대표는 “환자 권익보호를 위해 추진되는 법안이 정쟁의 도구로 활용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법안 심사는 여름철 소나기와 같다.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2019년 법안이 단 하루 만에 폐기된 일을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다”라고 걱정했다. 박수현 대한의사협회 홍보이사 겸 대변인은 “의료계가 수술실 CCTV 설치를 무조건 반대하는 게 아니다. 수술실 현장 상황과 의료계 각 분야 사정 전반을 감안해 염려되는 지점과 보완해야 할 점을 국회에서 함께 논의해달라는 의견인데, 반영이 잘 안 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수술실 CCTV 법안은 7월 중 국회에서 다시 논의될 예정이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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