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해와 남대서양에서 비막치어를 포획하는 원양어선 S호는 배가 고장나지 않는 한 한국에 들어올 일이 없다. ⓒ조상혁 제공

국내 한 중견 원양어선사가 외국인 노동자(선원)의 신분을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폭로 당사자는 비자금 조성 과정에서 회사 임원의 지시를 받아 허위 서류를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원양어선 선장이다. 배를 띄우지 않을 때에는 국내에 머무르는 연근해 어업과 달리 원양어업은 먼바다에 나가 있는 배가 한국에 수년간 들어오지 않는다. 구두 지시만으로도 횡령이나 회계 조작이 가능한 구조다. 그동안 외국인 선원에 대한 처우 문제가 제기된 적은 있었으나 이들의 신분을 이용해 회사 측이 이익을 빼돌리는 구체적 의혹이 제기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폭로의 주인공은 A실업 소속 원양어선 S호를 이끌었던 조상혁(가명·53) 선장이다. 조 선장은 2013년 어느 날 본사 배 아무개 상무로부터 이례적인 주문을 받았다고 한다. 배 상무는 당시 조 선장에게 “회사 회장 아들이 존스홉킨스 대학에 유학 중인데 용돈 격으로 보낼 자금이 필요하다. 3만 달러만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이때 미화 3만 달러를 ‘만들라’고 한 것은 비자금을 확보할 수 있는 가짜 비용 서류를 만들어달라는 의미였다. 배 상무가 지시한 가짜 서류는 외국인 선원의 명의를 활용한 ‘상여 지급 내역’이었다. 조 선장은 선내 항해사에게 지시해 선원들의 특별 상여금 서류를 만들고 여기에 가짜 서명을 기입하는 방식으로 서류를 꾸몄다.

S호의 승선 인원은 36명 내외다. 선장과 항해사, 기관장과 기관사 등 해기사 6명을 제외하면 30명 정도가 일반 승선 선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이들은 어획 조업을 비롯해 배 수리, 얼음 제거 등 선내 대부분의 잡무를 담당한다. S호의 선장·기관장·해기사는 한국인이지만 나머지 선원은 모두 외국인 노동자다.

이들의 급여체계는 기본급인 월급과 조업 성과에 따라 달라지는 상여로 나뉜다. 통상 외국인 선원의 월급(고정급)은 경력에 따라 미화 600달러(약 68만원)에서 1500달러(약 170만원) 수준이다. 고정급은 선원에게 곧바로 지급되는 것이 아니다. 선사 측이 일단 한국 내 인력 송입업체에 임금을 보내면 이 돈은 선원의 소속국에 있는 송출업체를 거쳐 해당 노동자에게 지급된다. 송입업체가 자기 나라의 선사에 외국인 노동자 취업을 알선하고 임금 지급 등 인사관리를 대행한다면, 송출업체는 자기 나라의 노동자를 해외 선사에 취업 알선하고 인사관리 대행을 수행한다. 이 과정에서 송입·송출업체들은 수수료를 뗀다.

원양어선사의 비자금 조성을 폭로한 조 선장이 공개한 관련 이메일.

가짜 사인만으로도 비자금 조성 가능

이처럼 송입·송출업체를 거치고 그 내역이 기록되는 고정급은 조작하기가 어렵다. 하지만 조업 성과에 따라 분배하는 상여금은 현금으로 준다. 외국인 선원들도 송입·송출업체를 통하지 않고 당장 현금을 손에 쥘 수 있기 때문에 무척 중요한 수입원이다. 배 아무개 상무는 이 같은 ‘현금 정산’ 상여 지급건을 한 건 더 만들어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 선장은 1990년대부터 원양어업에 종사한 베테랑이다. 그가 2017년까지 이끌던 S호는 뉴질랜드 남부 남극해(로스해)와 남대서양 공해에서 비막치어(파타고니아 이빨고기)를 포획한다. 우리가 흔히 일식당에서 주문하는 ‘메로’가 바로 비막치어다. 한국에서 남극해까지 오가는 건 비효율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 선장과 S호는 한국에 들어오지 않고 남대서양과 남극해에 머물며 인근 항구에서 보급(물·식량·연료 등)과 하역(조업한 물품을 배에서 내리고 판매하는 일)을 모두 해결한다.

1년 중 남반구 여름이 도래하는 12월에 남극해(뉴질랜드 남쪽 로스해 권역)로 나가 조업을 하고 바다가 얼어붙는 2~3월에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로 회항해 조업 물품을 하역한다. 이후 배는 다시 남대서양 영국령 사우스조지아 사우스샌드위치제도 인근 공해상으로 나가 10월경까지 다시 메로를 잡는다. 그러다가 11월이 오면 남극해 조업을 위해 뉴질랜드 방면으로 이동하는 식으로 한 해가 흘러간다. 배는 특별히 고장이 나지 않는 한 한국에 들어올 일이 없다. 내내 남극해와 남대서양을 오가며 그저 1년에 세 차례 정도 우루과이에 정박할 뿐이다.

비자금 조성을 지시한 배 상무는 배가 들어오는 때에 맞춰 우루과이 몬테비데오를 찾았다. 그리고 이곳에 머무르는 동안 조 선장과 그 아래에 있는 일등항해사에게 지속적으로 ‘가짜 사인 서류’를 요구했다는 게 조 선장의 주장이다. 이러한 지시는 대개 구두로 전달되었고 은밀하게 추진되었다. 그렇게 배에서 일하는 외국인 선원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여금을 수령한 것’으로 꾸며져 회계에 반영되었다.

원양어선사의 비자금 조성을 폭로한 조 선장이 공개한 가짜 사인 서류.

어떻게 가짜 사인만 가지고 비자금을 조성하는 게 가능했을까. 조 선장의 설명에 따르면 정산 과정의 허술함 덕분이다. 위 〈그림 4〉를 살펴보자. 이 서류는 실제로 조 선장이 회사 측에 제출한 ‘가짜 사인 서류’다. 서류 최상단에는 ‘장기 조업 특별수당’과 ‘장기 항해 수리 특별수당’이라는 명목이 적혀 있고, 아래로는 선원의 이름과 각자 수령하는 금액, 그리고 서명란이 마련되어 있다. 1인당 적게는 900달러(약 102만원)에서 많게는 1000달러(약 113만원)까지 분배되었다. 외국인 선원들로서는 큰 수익이지만 실제로 이 돈은 지급된 적이 없다.

회사 처지에서 가장 좋은 경우는 외국인 선원들이 자발적으로 ‘가짜 서류’에 사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급 서류에 적힌 ‘지급 내역’은 국문뿐 아니라 영문도 기입해야 하기 때문에 외국인 선원들이 쉽사리 동조하지 않는다. 선사 고위 임원이 ‘만들어달라’고 한 서류에는 결국 ‘가짜 사인’을 채워 넣게 되는 것이다.

조 선장의 증언에 따르면 배 상무는 증거가 남는 통신망 대신 구두로 이 같은 요구를 했다. 조 선장은 “선장이라고 해도 본사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다”라고 말했다. 단 2015년과 2016년에 각각 한 차례씩 이메일로 지시를 내린 ‘예외’가 있다. 〈그림 3〉은 당시 배 아무개 상무가 조 선장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2015년 12월9일에 배 상무가 조 선장에게 보낸 ‘대외비/ 선원 지급금 정산건’ 이메일 내용을 살펴보자. “첨부된 파일의 2개 시트를 모두 출력하여 SIGN(서명) 난에 선원들 개별 사인을 하시고… 이 내용은 기관장도 알아서는 좋을 게 없는 내용인 것은 선장님께서 잘 아실 것이고…”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통상적이고 정상적인 상여라면 굳이 기관장에게 비밀로 할 이유가 없다. 이 이메일에는 회사 측에서 미리 제작한 ‘장기 조업 특별수당’ 표와 ‘장기 항해 수리 특별수당’ 표가 첨부되어 있었다. 해당 표에 기입된 상여금 총합은 각각 2만2200달러(약 2500만원)와 2만8000달러(약 3200만원)에 달했다.

반면 이메일을 보낸 당사자 배 아무개 상무는 이 이메일이 가짜 서류를 만들라는 지시가 아니었다고 반박한다. 통상 정산 이메일이 오가는 과정에서 ‘기관장에게 비밀로 하라’는 지시를 내릴 때도 있다는 것이다. 배 상무는 6월29일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기관장도 모르게 선장에게 지급되는 돈이 있다. 선장에게는 위험한 지역을 가는 것에 대한 특별수당을 보낼 때가 있는데, ‘아무도 알게 하지 말고 선장만 알고 있으라’는 지시는 그런 배경에서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조 선장은 이런 요구가 1년에 한두 차례씩 반복되었다고 주장한다. 각각 2만~3만 달러어치 ‘수령증’을 작성해준 덕분에, 배 아무개 상무는 연 5000만원 이상의 ‘가짜 비용’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 같은 지시는 조 선장이 퇴사한 2017년까지 이어졌다.

정작 명의를 도용당한 외국인 선원들은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다. 원양어업에 종사하는 외국인 선원은 우리가 통상 마주하는 외국인 노동자와는 전혀 다른 환경에서 일한다. 법적으로 한국 선사의 한국 국적(국기) 선박에서는 한국 법이 적용된다. 일하는 곳과 생활하는 곳이 한국 선박이기 때문에 배가 남극해에 있든 남대서양에 있든 한국의 민형사상 법적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선원의 경우 근로기준법상 휴식시간이나 최저임금법상 최저임금 등이 적용되지 않는다('안중(眼中)에 없는 원양어선 이주 선원' 기사 참조). 노동조건 대부분이 선원법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급여 역시 열악하다. 원양조업국 대부분이 국제운수노동조합(ITF) 기준에 맞춰 임금을 지급하다 보니 연근해 어업이나 국내 일반 제조업 노동자보다 최저임금이 낮다. 한국 원양어선 대부분이 외국인 선원의 급여를 ITF 최저임금 기준에 맞추고 있다. 2021년 기준 ITF 최저임금은 월 540달러 수준이다. 그 때문에 최근에는 승선하는 선원의 국적도 달라지고 있다. 2000년대까지만 해도 중국 출신 선원이 많았지만 최근 중국의 인건비가 오르면서 인도네시아 선원이 느는 추세다.

원양어선에서 조업 성과에 따라 분배하는 상여금은 현금으로 지급된다. ⓒ조상혁 제공

비자금 경로로 작동한 노동 인권 사각지대

선원들이 ‘받는 돈’과 회사가 실제로 ‘지급한 돈’을 비교하기도 마땅치 않다. 일단 외국인 선원들이 한국에 들르는 경우가 흔치 않다. 외국인 선원은 한국 송입업체와 현지 송출업체를 통해 원양어선에 올라탄다. 한마디로 한국 행정력이 이들을 감시하기가 어렵다. 지난해 해양수산부는 연근해 어업에 한해 민간 송입·송출업체를 배제하고 공공기관이 송입·송출업무를 담당토록 하겠다고 발표했다. 송입·송출업체가 외국인 선원의 급여를 중간에 착복하면서 실질임금이 선원 최저임금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해서다. 공적 창구를 통해 선원의 고용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하지만 원양어업에서는 여전히 민간 송입·송출업계의 영향력이 강하다. 업체들은 오랜 시간 동안의 업무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원 노동력’의 네트워크를 확보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개별 선원들을 관리할 수도 있다.

조 선장이 이끌던 S호 역시 외국인 선원을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승선시켰다. 선원들이 인도네시아와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지구 반대편인 우루과이까지 날아와 배에 타는 것이다. S호는 조업 특성상 정산과 하역, 승선과 하선 모두 우루과이 현지에서 이뤄지고 주요 사무 역시 이곳에 위치한 지사(A실업과 형제기업인 B실업의 현지 지사)에서 처리된다. 한국의 행정력이 이들의 자금 내역이나 급여 정산 등을 일일이 감시하기 어렵다.

다만 선원 가운데 한국인이 있고, 계좌로 송금하는 경우에는 어떤 식으로든 급·상여 지급의 증거가 남는다. 그러나 대다수 선원은 한국에 들를 일이 없다. 따라서 한국의 사법기관이나 감독기관이 이들에게 상여가 제대로 지급되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가짜 서명’으로 지급 내역을 만들어도 선사의 회계감사 과정에서 크게 문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외국인 선원을 관리하는 선사 처지에서 가장 큰 위험은 선원의 이탈이다. 외국인 선원으로서는 원양어선보다 육지의 제조업 공장이나 연근해 어업 쪽이 훨씬 매력적인 일터일 수 있다. 일단 원양어선에 타면 그 내부에서 모든 생활이 이뤄지는 데다, S호처럼 극지방에서 조업할 경우 얼음 제거 같은 부가 노동이 많을 수밖에 없다. 정상적 노동시장이라면 원양어선의 선원에게 적절한 보상이 지급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 보상이 선원에게 제공되지 않고 ‘가짜 서류’를 통해 누군가에게 새어나간 셈이다.

이 돈이 실제로 ‘존스홉킨스 대학에 다니는 회장 아들’에게 전달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가짜 서류 작성을 지시했다고 지목된 배 아무개 상무는 6월28일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그런(비자금을 따로 조성하기 위해 가짜 서류를 조작한) 사실은 없다”라고 의혹을 부인했다. 뒤이어 6월29일에는 〈시사IN〉에 “나도 선원 출신이다. 선원들의 이익금을 갈취할 의사는 전혀 없고, 그렇게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라며 재차 의혹을 부인했다. 배 아무개 상무는 2021년 3월, A실업의 공동 대표이사로 선임되어 회사 전체를 책임지고 있다.

이 같은 의혹을 폭로한 조상혁 선장 역시 이 과정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조 선장은 “아무리 회사의 지시라고 하지만 나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러나 오랜 악습과 병폐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라며 내부고발 배경을 설명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올라온 2020년 감사보고서에 따르면 A실업의 당기(2020년) 매출액은 126억여 원, 영업손실은 11억여 원이다. 조 선장의 증언에 나온 정황이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면 영업손실이 초래된 원인은 다시 분석되어야 할 것이다. 지구 반대편 노동 인권의 사각지대가 불투명한 자금 이동의 경로로 작동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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