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10일 ‘읽는 당신×북클럽’ 마지막 북토크에 나선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의 역자 김승진씨(오른쪽).ⓒ시사IN 신선영

〈시사IN〉과 동네책방이 함께한 ‘읽는 당신×북클럽’이 6월10일 종료됐다. 100일간의 대장정이었다. 이 기간 독자 320여 명은 〈공정하다는 착각〉(마이클 샌델 지음, 와이즈베리 펴냄)과 〈가난의 문법〉(소준철 지음, 푸른숲 펴냄)을 잇달아 함께 읽으며 납작해진 공정 논의가 불평등을 어떻게 심화시키는지, 우리 사회에서 가난이 어떻게 구조화되고 있는지 생각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공유했다.

마지막 책은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아비지트 배너지·에스테르 뒤플로 지음, 생각의힘 펴냄)이었다. 최근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윤희숙 국민의힘 의원이 기본소득 의제를 놓고 ‘책은 읽어보셨나?’라고 설전을 벌이는 바람에 더 유명해진 책이다. 600쪽이 넘는다. 독자들의 말마따나 “북클럽이 아니었다면 혼자 읽을 엄두를 내지 못했을 벽돌책”인 셈이다. 세계화, 자동화와 실업, 기후위기 등 책이 담고 있는 우리 시대의 문제 또한 긴박하고 무거웠다.

6월10일 북토크에 나선 이 책의 역자 김승진씨(시카고 대학 사회학 박사, 사진 오른쪽)는, 거대한 문제일수록 구체적으로 질문해야 한다는 게 저자들의 일관된 주장이라고 설명했다. “자동화가 고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전 지구적 빈곤을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처럼 질문을 크게 던져봐야 답은 한 가지다. “모른다.” 이래서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

정책 또한 마찬가지다. 제3세계 여자아이들의 중학교 진학률을 높였더니 미래에 기대할 수 있는 생활수준이 크게 향상됐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치자. 하지만 부모는 여전히 아이를 학교에 보내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부모 의식을 바꾸는 캠페인을 벌여야 할까? 문제는 그렇게 간단치 않다. 어떤 지역에서는 등하굣길에 여아가 성폭력 위험에 노출될까 봐, 어떤 지역에서는 여아가 물 긷는 일을 전담해야 해서 그럴 수 있다. 이럴 경우 해법은 치안 강화와 수로 공사다. 기대했던 정책 효과가 나타나지 않을 때는 대중의 몽매함을 탓할 게 아니라 ‘왜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는지’ 그 이유를 찾아내기 위해 구체적인 작은 질문들을 던진 다음 가설을 세워 이를 검증하려 집요하게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은 ‘자선’ 아닌 ‘보상’

사실 이 책의 공저자는 무작위 통제 실험을 경제학에 도입한 공로로 2019년 노벨 경제학상을 탄 바 있다. 모든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누릴 권리가 있으며, 이를 위협하는 상황이 발생했을 때 그 정도를 최대한 완화해주는 정책을 설계해 ‘존엄’을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윤리 문제가 아니다. 이들에 따르면 문명사회는 이미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라는 명제에 합의한 바 있다. 따라서 구성원의 존엄이 지켜지지 못한다면 그 사회는 위법한 행동을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19나 기후위기 등 전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담을 누군가 부당하게 더 많이 떠맡게 되었을 때도 사회는 이를 보상할 책임이 있다. 곧 재난지원금은 ‘자선’이 아닌 ‘보상’이다.

이날 북토크에 참여한 독자들은 작은 질문들을 끊임없이 던지며 ‘더 나은 해법’을 찾아가려는 저자들의 태도에서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문정아씨). 반면 새로운 관점이나 정책이 제기돼도 그것이 궁극적인 해결책으로 연결되지 않고 또 다른 문제를 파생시키는 것을 보며 답답해졌다는 독자(김영하씨)도 있었다.

김승진씨는 문제를 잘게 쪼갠다 한들 우리 앞에 놓인 크고 어려운 문제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비장하게 희망적일 것”.

100일간의 북클럽은 희망을 ‘비장의 무기’로 벼리며 힘든 시대를 함께 건너자는 다짐으로 마무리됐다.

 

〈시사IN〉과 동네책방이 함께한 ‘읽는 당신×북클럽’ 시즌 1이 종료됐다. 북클럽에 참여한 독자들은 100일간 책 세 권을 동시에 읽으며 공정·가난·불공정을 이야기했다. ‘동네책방과 함께하는 독서모임’ 그리고 ‘〈시사IN〉과 함께하는 온라인 북토크’를 통해서였다. 독자들이 남긴 북클럽 참여 후기를 소개한다.

 

내 주변에 혹시 모를 윤영자 할머니

박세나 (경기 성남시 ‘좋은날의 책방’ 소속)

코로나19로 타의적 방콕러가 되었다. 넷플릭스와 유튜브의 바다에서 한없이 헤엄치다 나왔어도 코로나는 사라질 줄 몰랐다. 무료함을 참다 참다, 평소의 나라면 절대 자진해서 읽을 수 없을 내용과 두께의 책을 내 손으로 ‘스스로’ 잡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닥쳐온,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야 했던 지난 1년 반을 지내며 어느덧 대화의 기술도 잊어버린 듯했다. 이런 나에게 책을 세 권 읽고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은 세상에 무관심했던 내 무지와 마주하는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모니터 너머에 사람이 있구나. 나와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하는 누군가가 있구나’ 하고 느끼는 기회였다.

세 권의 책을 읽으면서 얼마 전 지인의 SNS에서 본 글이 잊히지 않았다. “휠체어를 탄다고 하면 걷고 싶어 할 거라 흔히 생각한다. (…) 로봇을 입고 걷는 것, 계단을 올라가는 휠체어를 타는 것, (이런 것이)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휠체어를 타고 어디든 갈 수 있는 공간과 사회를 바란다.”

보행을 도와주는 로봇이 개발된다고 했을 때, 나는 막연히 ‘휠체어를 타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겠구나. 그 사람들이 좋아하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내 위주의 편협한 시각이었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보행을 도와주는 최첨단 로봇이 아니라 휠체어가 넘기엔 높은 도로와 건물 입구의 턱을 없애고, 그들이 지나갈 때 무심코 바라봤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거두는 것이다.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에서 말했듯, 사회정책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인간 존중을 바탕으로 사회정책을 만드는 것은 왜 중요한지 생각하게 되었다.

얼마 전 외근 길에 서대문을 지나다 본인의 몸만큼 큰 폐지더미를 끌고 가는 또 다른 윤영자 할머니(〈가난의 문법〉에 등장하는 가상 인물-편집자 주)를 만났다. 오늘은 우체국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명동을 지나며 텅 비어버린 상가를 보았다. 코로나19라는 도망칠 수 없는 큰 파도를 몸으로 맞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파도가 오기 전에 대피소를 만들어두었다면 희생을 줄일 수 있었을 텐데…. 직장인인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하게 될 줄 몰랐다.

현생이 무의미해서 드라마로, BTS로 도피했던 나를 이 세상 중력으로 끌고 온 지난 3개월, 책을 읽으면서 주변을 더 돌아보게 되었고 내 주변에 혹시 모를, 도움이 필요한 윤영자 할머니가 있지 않은지 찾아보게 되었다.

주말마다 책을 들고 동네 카페로 가서 벚꽃이 피고 지고 장마가 다가오는 것까지 볼 수 있어서 참 좋았다.

‘좋은 연대’를 고민했던 시간들

김태연 (부산 ‘책방밭개’ 소속)

2021년 상반기, 독서모임 세 곳에 참석했다. 책 세 권을 함께 읽은 ‘읽는 당신×북클럽’, 세인트존스 대학 학생들이 만든 ‘필로어스’, 그리고 철학자 고병권의 ‘북클럽 자본’.

코로나19 이전에는 사람과 동떨어져 지내던 내가, 그래서 거리두기가 오히려 편했던 내가, 코로나19 속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게 됐다는 건 참 역설적이다. 과거의 일들은 모두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인지, 아니면 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발악인지는 나도 모르겠다. 누군가 그랬던가. 사람 때문에 얻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유해야 한다고. 치유의 한 과정이라고 조심스럽게 믿어봐도 괜찮을까.

사람은 왜 모이는 걸까. 다양한 모임이 있지만, 굳이 꾸역꾸역 생각을 나누고 배움을 나누려는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그러는 걸까. 각자도생을 강요당한 코로나19 속에서 책을 읽고 토론한다는 의미가 낯설게 다가온다.

‘독서모임’이라는 ‘연대’는 사람과 사람을 물리적으로 연결할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연결한다. 그런데 그 연결이 참 독특하다. 내가 참가한 독서모임 참석자들은 단순히 나와 생각이 같은 사람을 원하지 않았다. 내 의견에 반박해주고, 내 생각을 넓혀주고, 책 내용을 입체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을 만나길 원했다. 독서모임이 신자유주의의 가장 반대편에 있는 집단같이 느껴졌다.

기적이라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책을 선량하게 보는 사람들과 삐딱하게 보는 사람들이 만나서 대화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질문하고, 겸손하게 답한다. ‘읽는 당신×북클럽’ 1회 모임에서 천관율 기자는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 모였다고 했다. 그의 말이 옳다. 고집이 있어야 하고 최대한 타협하지 않아야 안전할 수 있는 ‘각자도생’이라는 삶의 방식과 너무 어울리지 않은 방법으로 살아가고 싶은 사람들이 모였으니, 정말 이상한 모임이었다.

‘읽는 당신×북클럽’ 기간 내내 우리는 ‘좋은 연대’를 고민했던 것 같다. 공정한 사회를 만들려면(〈공정하다는 착각〉), 폐지를 줍는 가난한 사람들을 지키려면(〈가난의 문법〉), 경제학이 사회 구성원들을 이해할 수 있으려면(〈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 합의가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런 합의는 서로의 손을 맞잡고 눈을 마주보며 서로를 이해하는 연대를 통해 가능하다.

오해하면 안 된다. 연대는 내 생각을 재확인하고 자기강화를 통해 만들어가는 게 아니다. 내 생각만을 고집하지 않는 사람들, 타인의 삶과 생각을 경청할 줄 아는 사람들, 서로의 눈을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화하고 반박하며 만들어간다. 그리고 나는 세 개의 독서모임을 통해 연대의 가능성을 엿본 것 같다.

새로운 사회계약(New Deal)이 필요한 오늘날, 세상으로 나올 용기를 내준 나에게 고맙다. 그리고 그런 나에게 사람은 타인의 세계관과 부딪치며 성장할 수 있음을 가르쳐준 독서모임에 감사한다.

 

함께 책 읽기의 치열함에 대하여

문정아 (서울 마포구 ‘정치발전소’ 소속)

치열-하다2 熾烈하다:기세나 세력 따위가 불길같이 맹렬하다.

치열-하다1 治熱하다:병의 근원이 되는 열기를 다스리다.

치열-하다3 熾熱하다:열도가 매우 높다. (치열하다, 네어버 어학사전 검색)  

보통 생존을 위해, 또는 엄청난 승부욕에 불타서 하는 행동을 두고 ‘치열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몸에 병이 났음을 알려주는 열을 다스리는 행동도 ‘치열하다’고 한다. 그 치열한 상태는 열도가 매우 높다.

혼자 읽는 행동을 비유하라면 난 안위·휴식·도피로 비유할 테다. 책의 내용과 정서가 나에게 불편함을 준다면 덮어버리고 다른 도피처를 찾는다. 혼자 읽기란 끊임없이 내 정체성을 찾기보다 그저 헤매고 다니는 과정일 수도 있다. 그게 잘못됐다는 얘기는 아니다. 누구나 헤맬 수 있고, 헤매는 과정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게 되기도 하니까.

함께 읽기는 내가 읽은 책, 나의 경험, 나의 존재가 생경하게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 마주해야 하는 행동이다. 함께 읽기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 나의 역사에 대해 스스로에게 그리고 함께 읽는 사람들에게 얘기하려면, 생경했던 것들을 되짚어봐야 한다. 설사 온라인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하는 말과 표현에 랜선 너머 존재들의 귀와 눈이 나를 맞추고 있으니, 그저 얘기할 수는 없다. ‘읽는 당신×북클럽’을 하는 동안, 놀라운 공감으로 감동하거나, 적당한 지성과 통찰에 놀라는 그런 순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떤 얘기에, 어떤 존재에, 어떤 표현에는(이 ‘어떤’에는 나라는 존재를 포함한다) 불편했고, 화가 났고, 피하고 싶어서 온라인 장을 나가고 싶은 순간이 자주 있었다.

레베카 솔닛의 책 〈멀고도 가까운〉(반비 펴냄)은 읽기와 쓰기, 그리고 연대에 관해서 얘기한다. 읽는 것으로 나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경험해보고, 이를 통해 ‘이야기’가 이동하면서, 고통에 함께 아파하면서 연대가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고통이 몸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감정을 이입함으로써 그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함으로써, 어떤 사회 구성체의 일부가 되는 셈이다(157쪽).”

나는 자부심이 맹렬한 사람이며, 생각한 대로 그만큼은 행동하고자 하고, 생각을 멈추지 않으려 했던 사람이라고 여겼다. 함께 책을 읽기 전에는. 하지만 난 자주 멈추는 사람이었고, 행동을 못할 것 같으면 정당화할 그 무엇을 찾는 사람이었다. 바쁘다든지, 지금 그걸 생각할 수 없는 다른 대의가 있다든지. 그런 단언을 마음에 품고 책을 읽으며 방랑했다. 하지만 함께 책 읽기는 방랑할 틈이 없었다. 책의 내용에 치열해야 했고, 책을 읽고 얘기하면서 떠오르는 모순들에 치열해야 했다. 어떤 기세(Accident)와 정체(Identity)에 대해 열이 나고 있음을 확인해야 했다.

〈공정하다는 착각〉을 함께 읽으며 그동안 학위, 학벌, 공부, 노력 그리고 그 당연한 대가라는 이데올로기에 치열할 수 있었고, 〈가난의 문법〉을 함께 읽으며 현재의 경제적 능력과 일의 가치가 나의 노력의 당연한 대가라고 정당화하던 생각에 치열할 수 있었고, 〈힘든 시대를 위한 좋은 경제학〉을 함께 읽으며 선한 행동의 경제적 가치에 대한 자부심에 치열할 수 있었다.

세 권을 함께 읽는 동안 나에게서 가장 드러났던 모습은 정당화 행동이었다. 나의 사유와 내가 누리는 자유·권리는 내가 스스로 노력하고 쌓아올린 대가로 ‘정당’하다는 무의식이, 그 무감각이 치열한 도전에 직면했다. 모든 순간에 나는 자부심으로 무장하고 나 자신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자신의 결의와 열정적인 활동에 자부심을 갖는 것은 좋지만, 자신을 예외적인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 ‘당신이 발 딛고 선 곳에서 시작하라’는 말은 윤리적인 삶과 관련되기보다, 정치운동과 현실에서 정말 발 딛고 선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운동은 이렇게〉, 마이클 왈저 지음)

함께 책 읽기는 나를 끊임없이 정당화하던 감각에 다른 사람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얹어지며 내가 상호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을, 홀로는 옳은 존재로 완벽해질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느껴지지 않았던 감각들에 대한 돌봄을 생각해보는 기회였다. 앞으로를 예고한다는 게 두려운 시절이지만, 팬데믹이 종식되고 그간 우리에게 찾아왔던 좀 더 억지스러웠던 무감각이 깨어날 수 있게 되기를…. 함께 느꼈던 고통이, 치열함이 우리에게 잠언이 되어 더 강한 연대로 찾아올 것을 예고해보고 싶다.

“제가 읽은 가장 구체적인 ‘잠언’이에요. 허공에 뜬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글은 노동하는 여성만이 쓸 수 있어요. 지성과 통찰은 약자가 가질 수 있는 힘입니다. 읽기가 사는 고통을 덜어준다는 말은 사실이에요. 외로움도 죽고 싶은 마음도 진정시켜줍니다. 잠시의 위로가 아니라 곁에 있어줍니다. 읽기만으로 연대할 수 있다고 믿어요.” (〈멀고도 가까운〉 정희진 작가의 책 뒷면 추천사 중에서)

 

기자명 김은남 기자 다른기사 보기 ke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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