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7일 정근식 진화위 위원장이 제1차 진상규명 조사 개시 결정 기자회견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 과정에서 고문과 폭행 등으로 억울하게 살인 누명을 쓰고 고통받은 이들이 뭉쳐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위원장 정근식)의 문을 두드렸다. 이들은 자신들 같은 국가폭력 피해자를 다시는 양산하지 않기 위해 화성 사건 수사 과정에서 벌어진 인권유린에 대해 국가가 마땅히 화답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알려진 바와 같이 화성 연쇄살인사건은 1986년부터 1991년까지 경기도 화성 일대에서 여성들을 대상으로 자행된 10건의 성폭행 살인사건을 가리킨다. 용의자로 지목돼 정식 수사 대상에 오른 사람만 2만1280명이며 수사와 수색, 예방활동 등에 투입된 경찰 인력은 연간 200만명에 달한다.

2006년 4월 공소시효가 만료되면서 영구 미제사건으로 묻히는 듯했다. 그러나 진실은 30여 년 만에 드러났다.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진안2리에 살던 이춘재가 처제 살해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수감 중이던 2019년, 8차 화성 사건의 범인이 자신이라고 고백하면서다. 이미 8차 사건 범인으로 윤성여씨가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터라 세상은 발칵 뒤집혔다.

2019년 8월부터 진행된 경찰 재수사를 통해 화성에서 발생한 3·4·5·7·9차 사건의 증거물에서도 이춘재의 유전자가 검출되었다. 이춘재 스스로도 화성과 청주 등지에서 연쇄살인 14건과 성폭행 34건을 저질렀다고 자백하면서 이른바 화성 연쇄살인사건 10건은 모두 이춘재 소행으로 공식 종결됐다. 그러나 사건 당시 경찰이 엉뚱한 민간인들을 피의자로 지목해 고문과 가혹행위를 자행한 중대한 인권침해는 물론 무고한 이들을 살인범으로 조작했던 정황은 슬그머니 가려졌다. 경찰이 재수사에서 이춘재가 저지른 연쇄살인사건뿐만 아니라 수사 과정에서 자행한 고문과 독직폭행 등 공무원 범죄도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로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수사를 당한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공통적으로 불법체포, 감금, 폭행 등 가혹행위와 그에 의한 자백 강요, 조서 조작 등 위법 수사를 당했다고 호소한다. 당시 경찰은 수사본부를 꾸리고 전국의 유능한 수사관들을 모아 총력전을 펼쳤으나 범인의 윤곽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초조해진 경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리수를 남발했다.

고문 기술자 이근안이 화성경찰서로 파견돼 근무한 시기(1985~1989)도 1~8차 화성 연쇄살인사건 시기와 맞물린다. 이근안은 이때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관들에게 고문 기술을 전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화성 사건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된 무고한 시민들이 고문 조사 과정에서 살해당하거나 이후 스스로 목숨을 끊는 끔찍한 일도 발생했다.

1988년 1월12일 수원 화서역 여고생 성폭행 살인사건 용의자로 경찰에 체포된 명 아무개 군(16)은 엿새 뒤인 그해 1월18일 경찰서 유치장에서 쓰러져 뇌사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다. 병원 측은 명 군의 폐에 물이 차 있고 엉덩이와 발바닥에 피멍이 든 상태로 병원에 옮겨졌다고 밝혀 가혹한 구타와 물고문으로 사망했다는 점을 암시했다. 서울대생 박종철이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받다 사망한 때가 1987년 1월14일이었으니 딱 1년 뒤에 일어난 고문치사 사건이었다. 당시 사회문제가 될 것을 우려한 경찰이 서둘러 명 군 사망에 연루된 수사 경찰들을 독직폭행 치사로 기소함으로써 조용히 넘어갔다.

1991년 4월16일에는 화성 10차 사건 당시 용의자로 경찰의 추적을 받던 장 아무개씨(33)가 경찰이 들이닥치자 달아나다가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사망했다. 경찰은 절도 전과와 추행 혐의로 입건된 적이 있는 장씨가 환각제를 상습 복용한다는 제보를 받고 화성 10차 사건 용의선상에 올렸다고 해명했다. 1993년 8월3일에는 김 아무개씨(41)가 흉기로 자신의 배를 찔러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다 동수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중태에 빠졌다. 김씨는 1986년부터 1992년까지 수차례에 걸쳐 화성 연쇄살인사건 용의자로 화성경찰서 수사본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는 처지에서 가정이 파탄 날 지경에 몰리자 극단적 시도를 한 것으로 밝혀졌다.

1987년 화성 연쇄살인사건 당시 사건 현장이던 횡계리를 중심으로 수사 중인 경찰. ⓒ연합뉴스

공소시효 만료돼 처벌 피한 경찰

일부 경찰은 화성에서 살인사건 피해자 유골을 발굴하고도 수사 부담 때문에 시신을 다시 파묻어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1989년 7월7일 병점초등학교 2학년 김 아무개 양이 수업을 마치고 하교하던 도중 실종됐다. 김 양의 가족으로부터 실종신고를 받은 수사본부는 5개월 동안 별다른 수사 진전을 보이지 못한 채 사건을 덮어두고 있었다. 그해 12월20일 김 양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장소 부근에서 마을 주민들이 참새 사냥을 하던 중 김 양의 가방·치마·신발·속옷 등 유류품 10여 점을 발견하고 수사본부에 신고했다. 출동한 화성경찰서 이 아무개 형사계장은 민간인 방범대장 조 아무개씨와 함께 야산을 수색하다가 줄넘기 줄에 묶인 양손 뼈 등 김 양의 사체를 발견했다(이춘재는 8차 사건 재심 법정에서 이 사건의 피해자 김 양을 성폭행하고 살해할 당시 줄넘기로 양손을 묶었다고 진술했다). 이 형사계장은 민간인 방범대장에게 집으로 가라고 한 뒤 부하 경찰에게 삽을 가져오라고 지시해 유골들을 땅속에 묻어버렸다. 유족에게는 이 사실을 비밀에 부치고 사건 관련 서류를 허위로 작성했다. 경기 남부지방경찰청은 이춘재의 자백이 나온 2019년에야 비로소 해당 경찰관들의 비위 혐의를 조사했다. 유골을 은폐한 경찰관들이 공소시효를 이유로 조사에 응하지 않자 형식적인 조사를 거쳐 ‘사체은닉 및 증거인멸’ 혐의로 이들을 입건했다. 하지만 공소시효가 만료되어 ‘공소권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수원지검 역시 ‘공소권 없음’으로 처분했다.

이처럼 5·6공화국 권위주의 정권 시절의 화성 사건 수사 과정에서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가혹한 국가폭력에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다. 그러나 아직 규명되지 않은 진실이 많다. 그래서 화성 사건 수사 피해자들이 뭉쳤다. 이들은 김칠준 변호사, 박준영 변호사와 이정도 변호사를 중심으로 화성 사건 수사 피해자 전반에 대한 진실규명 신청서를 진화위에 제출했다.

피해자들이 진화위의 문을 두드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2019년 경찰의 재조사 당시 고문 폭행 조작에 가담한 경찰관 다수가 공소시효를 핑계로 수사기관에 출석하지 않았다. 경찰도 수사를 더 이상 추진하지 않아 ‘제 식구 감싸기’라는 불신을 샀다. 피해자들이 사건 수사를 받을 당시의 관련 서류를 열람·등사 신청해도 경찰은 대부분 거절했다. 이에 비해 진화위는 조사를 거부하는 ‘전직 경찰’들에 대해 출석 또는 동행을 요구할 권한을 갖고 있다. 진화위는 경찰이 내놓지 않으려는 수사 자료에 대해 제출을 요구하는 권한도 행사할 수 있다. 이 같은 ‘강제’ 조사권을 발동해서, 무고한 시민을 상대로 야만적 국가폭력을 자행한 경찰관들에 대한 철저한 조사를 벌여달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요구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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