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 피해자 유가족 윤동기씨. 용의자로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한 동생 윤동일씨는 이른 나이에 암으로 사망했다. 동생이 고문에 의해 작성한 진술서와 사진을 들고 있다. ⓒ시사IN 신선영

“이춘재 때문에 집안이 풍비박산 났지만 이춘재보다 경찰이 더 밉다.” 경기도 화성시에 사는 윤동기씨(58)는 이춘재가 저지른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의 피해 가족이다. 비극은 1990년 11월 일어난 9차 화성 연쇄살인사건에서 비롯됐다. 당시 19세였던 동생 윤동일씨는 공업계 고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집 근처 중소기업에 근무하던 청년이었다. 3년간 개근할 정도로 성실한 성품에 우등상을 독차지해 고교 생활기록부에는 “학습태도가 좋으며 우수해 타의 모범이 되는 학생”이라고 적혀 있다.

1990년 12월15일, 평소처럼 아침에 출근한 동생은 이날로 소식이 끊겼다. 가족들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행방이 묘연했다. 윤동일씨가 실종된 지 닷새째 되던 날, 저녁 뉴스를 보던 가족들은 대경실색했다. 화성경찰서에서 포승줄에 묶인 윤씨를 연쇄살인사건 범인이라고 공개해 텔레비전 화면을 가득 장식한 것이다.

사정은 이랬다. 그해 12월15일 직장에서 한창 일하던 윤동일씨는 급습한 화성 연쇄살인사건 특별수사본부 형사들에게 붙들려갔다. 그는 연행 초기 사흘 동안 화성시 태안지서 근처 현대여인숙과 화성경찰서 태장지서, 진남지서 등으로 끌려 다니며 잠을 한숨도 못 잔 채 무수한 구타와 고문을 통해 허위 자백을 강요당했다. 경찰은 이 사건의 피해자인 여고생 김 아무개 양의 사체에서 검출된 범인의 체액이 윤씨의 혈액형(B형)과 일치한다고 주장하며 고문을 일삼았다.

사흘 동안 폭행과 고문에 시달리던 윤씨는 이러다 가족 얼굴도 못 보고 죽어 나가겠다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고통을 견디다 못한 그는 경찰이 원하는 대로 “내가 김 양을 성폭행한 후 살해했다”라고 거짓 자백을 했다. 이를 토대로 경찰은 윤씨가 화성 9차 살인사건 범인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윤동일의 B형 혈액형과 피해자 김 양의 사체에서 검출된 정액의 유전자가 일치하며 윤동일이 피해자 김 양의 교복 색깔과 필통 모양, 가방 속에 들어 있던 학용품을 세세하게 사실대로 진술해 진범임을 뒷받침한다.”

윤씨를 범인으로 단정해 발표한 경찰은 같은 해 12월21일 그를 출입기자단 앞에 세워서 ‘확인사살’용 질의응답까지 마쳤다. 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떨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김 양을 성폭행한 뒤 소리치며 반항해 순간적으로 입을 막고 목 졸라 살해했다. 손발을 스타킹으로 묶고 가슴을 칼로 난자한 것은 평소 알고 있던 화성 연쇄살인사건들을 흉내 낸 것이다. 범행을 자백해서 후련하다. 피해 유족에게 대단히 죄송하다.” 이 내용은 언론에 대서특필됐다.

윤동일씨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과 학창 시절 받았던 상장·생활통지표. ⓒ시사IN 신선영

“형사님들이 무서워 거짓말했어요”

이때까지 경찰은 가족에게 윤씨의 소재를 알리지 않았다. 실종된 지 닷새 만에 언론을 통해 동생이 연쇄살인범이 된 것을 알게 된 형 윤동기씨는 화성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된 동생을 면회했다. “경찰에서 동생에게 고문한 티가 안 나게 하려고 안티푸라민을 잔뜩 발라 내보내 퉁퉁 부은 얼굴이 번들거렸다. 동생은 가족도 못 보고 이대로 죽을 것 같아서 자기가 범인이라고 거짓 자백했다고 하더라. 그 과정에서 경찰이 진술서를 27번이나 쓰게 만들어 범행을 철저히 암기시켰다며 울먹였다.” 윤동기씨는 동생에게 변호사를 선임했으니 용기를 잃지 말고 사실대로만 진술하라고 당부하고 나왔다.

이날 기자회견으로 윤동일씨는 전 국민에게 화성 9차 살인사건 범인이자 다른 연쇄살인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각인됐다. 경찰은 공개 현장검증을 추진했다. 이날 현장검증 장소에는 경찰이 통제를 해 취재진과 경찰 외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다행히 가까스로 변호사를 선임한 윤동일의 형은 현장검증 장소에 변호사와 함께 들어가 자포자기한 동생을 볼 수 있었다. 윤동일은 형을 보는 순간 비로소 기자들을 향해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형사들이 5일동안 잠을 안재우고 고문해 무서워서 허위자백을 했습니다”라고 외쳤다. 기자단을 상대로 이미 현장검증 도상연습까지 마친 경찰은 부랴부랴 현장검증을 취소했다.

현장검증 과정에서 윤씨가 살인 자백을 번복하자 검찰도 이 사건을 수상히 여겼다. 검찰은 초동수사 과정에서 경찰이 피해자 김 양의 몸에서 채취했다는 정액과 윤씨의 혈액 샘플을 일본 과학경찰연구소에 감식 의뢰했다. 이어 “피해자 김 양의 도시락에서는 윤씨의 지문이 채취되지 않았고, 확보한 신발과 옷에서는 혈흔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윤씨가 장갑을 끼지 않은 상태에서 맨손으로 범행했다고 자백했으나 김 양의 책가방 속 필통과 노트 등에서 윤씨의 지문이 전혀 검출되지 않았다”라는 이유를 들어 경찰에 보강수사를 지시했다. 1991년 2월8일 일본 과학경찰연구소는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체액이 윤씨 것이 아니라는 감정 결과를 보내왔다. 경찰이 가혹행위로 생사람을 잡은 것이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수사본부가 9차 사건 범인을 잡는답시고 엉터리 수사를 벌인 것은 윤동일씨가 처음은 아니었다. 윤씨가 붙잡히기 전 한 달여 동안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화성경찰서 수사본부에 끌려가 고문과 폭행을 당하고 그 후유증으로 자살한 사람까지 생겼다.

먼저 9차 사건 피해자 김 양이 사망한 당일인 1990년 11월15일, 김 양이 살던 마을 인근에 거주하던 언어장애인 박 아무개씨(49)가 최초 용의자로 경찰에 연행됐다. 언어장애인인 그는 범행을 자백하라고 강요당하며 며칠 동안 고초를 겪다가 국과수 혈흔 감정이 나오고 나서야 풀려났다. 11월17일에는 서울 구로공단에서 과도를 호주머니에 넣고 돌아다니던 17세 이 아무개 군이 경찰 불심검문에 걸려 강도예비 혐의로 유치장에 구금됐다. 경찰은 이 군의 주거지가 화성으로 나오자 그를 화성경찰서로 인계했다. 수사본부에서는 청바지 안에서 여자 머리카락 한 가닥과 솔잎 등이 나왔다는 이유로 이 군을 화성 연쇄살인사건 범인으로 몰아붙이며 강도 높게 조사했다.

11월20일에는 화성에 살던 강상규씨(19)가 경찰에 연행돼 9차 사건 범인으로 추궁당했다. 경찰은 강씨에게 ‘잠 안 재우기 고문’을 하면서 “피해자를 왜 죽였느냐. 네가 죽인 걸 본 사람이 많다. 순순히 불어라”라고 추궁했다. 강씨가 부인하자 경찰은 그의 얼굴을 주먹으로 마구 내리쳐 전치 3주의 부상을 입혔다. 11월27일에는 태안읍 능2리의 가구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차 아무개씨(38)가 화성 사건 수사본부에 연행돼 9차 사건 범행의 자백(?)을 강요당했다. 혹독한 고초를 당한 뒤 경찰에서 풀려난 차씨는 “누군가 나를 죽이려고 경찰에 고발했다. 나는 억울하다”라고 외치며 맨발로 동네를 뛰어다니기도 했다. 차씨는 결국 같은 해 12월18일 병점역 근처 철길에서 부산발 서울행 새마을호 열차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12월16일에는 태안읍 진안리 공장에서 일하던 박 아무개씨(33)가 수사본부에 연행돼 이틀 동안 폭행과 잠 안 재우기 고문에 시달리며 9차 사건에 대해 추궁을 받았다. 경찰은 “너는 여중생 살인범이다. 거짓말탐지기로 네가 범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라며 자백을 강요했다. 그 과정에서 두 눈을 테이프로 감은 뒤 젊은 여성을 동원해 “저 사람이 범인이다”라고 지적하게 한 뒤 자백을 강요하고 음모를 채취했다.

화성 경찰이 윤동일씨를 9차 사건 범인으로 발표하기 직전 마지막으로 붙잡은 용의자는 태안읍 병점에 살던 김 아무개 군(18, 당시 고3)이었다. 12월11일 태안지서로 연행된 김 군은 경찰의 가혹행위로 머리, 등, 손에 심한 타박상을 입고 온몸에 피멍이 들었다. 어머니의 항의로 풀려난 김 군은 병원 치료를 받았다. 이때 경찰에서 찾아와 치료비로 쓰라며 3만원을 주고 갔다. 어머니는 아들이 당한 고문 흔적을 사진으로 찍고 경기도경찰청(경기도경)에 진상조사를 요구했다. 경기도경은 고문을 받았다고 폭로한 김 군을 연행한 화성경찰서 김 아무개 경위, 유 아무개 경사, 유 아무개 경장을 불러 가혹행위 여부를 조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지만 경기도경은 조사 경찰관들이 김 군의 뺨을 서너 대 때린 것뿐이라며 고문과 가혹행위를 축소했다.

화성 사건 당시 수사를 담당했던 오산경찰서(옛 화성경찰서) 모습. ⓒ시사IN 신선영

그다음 차례가 윤동일씨였다. 그러나 경찰이 야심적으로 기자회견과 공개 현장검증까지 시도하며 범인으로 발표한 윤동일씨는 일본 과학경찰연구소의 체액 검사를 통해 무혐의로 드러났다. 정상적인 경찰이라면 윤씨를 즉각 석방하고 사과했어야 한다. 하지만 화성 경찰은 윤씨를 풀어주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사건으로 옭아매는 길을 선택했다.

9차 살인사건 발생 일주일 전 성추행당한 정 아무개 양 사건의 범인으로 윤씨를 옭아맨 것이다. 윤씨는 다시 시작된 폭행과 고문 위협에 못 이겨 정 양을 강제추행한 뒤 도망쳤노라고 허위 자백한 뒤 변호사 접견 과정에서 그 내용을 털어놓고 자기는 범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경찰은 변호인 접견 보고서를 사실과 달리 조작해 작성한 뒤 법정에 제출했다. 그뿐이 아니다. 피해자 정 양은 윤동일씨를 대면한 뒤 범인이 아니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경찰은 진술조서를 사실과 다르게 조작해 억지로 정 양의 지문을 찍게 해서 마치 피해자가 추행범을 윤씨라고 지목한 것처럼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별건 구속돼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3개월 만에 풀려났다. 형 윤동기씨는 그 억울한 사연을 이렇게 말한다. “구속 3개월 만에 동생이 석방되자 성추행 피해자의 부친이 찾아와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화성 경찰에서 매일같이 와서 윤동일을 딸 강제추행범으로 지목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마지못해 동의해주었다며 사실을 털어놓아 속이 후련하다고 했다“.

윤씨는 풀려난 뒤에도 그 억울함을 풀지 못했다. 서슬 퍼런 권위주의 독재 시절 경찰의 고문 폭행과 사건조작 등 비위를 고발한다는 것부터 언감생심이었다. 더욱이 고문 후유증을 치료하는 일만으로도 힘들었다. 얼마 뒤 직장에 복귀한 윤씨는 건강검진 과정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옆구리 갈비뼈 사이에 이상한 점이 발견되니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경찰에서 살인 누명을 쓸 당시 구타와 고문을 집중적으로 당한 부위였다. 수원의 대형 종합병원에서 정밀 진찰한 결과 ‘악성횡근육종’이라는 희귀암 판정이 나왔다. 형 윤동기씨는 담당 주치의에게 동생이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화성 사건 범인으로 몰려 모진 고문을 받았다고 전했다. “의사는 ‘심한 고문을 당했다면 암 발생과 연관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소견을 말해주었다. 하지만 무서운 시절이라 경찰을 상대로 어찌 해볼 엄두를 내지도 못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진범으로 밝혀진 이춘재의 군복무 시절 사진. ⓒSBS 〈그것이 알고싶다〉 화면 갈무리

영화 모티브로 이어진 누명의 굴레

갈비뼈를 4개나 잘라냈지만 암은 치유되지 않고 서서히 온몸으로 전이됐다. 그렇게 암이 전신으로 퍼지면서 시름시름 앓는 동안 온 가족이 가산을 탕진해가며 치료하려 애썼으나 윤씨는 7년 만인 1998년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을 다룬 영화 〈살인의 추억〉을 본 관객이라면 대부분은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 ‘손이 부드러운’ ‘박현규’가 범인이기를 바란다. 생존자인 언덕집 여자의 “여자처럼 보드라운 손”이라는 진술이 짙은 여운을 남기면서 자연스레 그렇게 연상하게 된다. 박현규의 실제 모델이, 바로 경찰이 초동수사에서 9차 사건 범인으로 몰았던 윤동일씨다. 이 영화를 만든 봉준호 감독도 영화의 모티브를 경찰이 화성 9차 사건 범인으로 지목했던 윤동일씨에서 따왔다고 털어놓은 바 있다.

화성 연쇄살인사건 10건이 30년 미제사건으로 남는 동안, 적어도 이춘재가 드러나기 전인 2019년까지는 많은 이들이 윤동일씨가 화성 사건의 진범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만큼 윤동일씨와 가족에게 국가가 저지른 억울한 누명의 굴레는 길고도 잔혹했다. 이춘재가 살던 진안2리 옆마을 진안3리에서 농업을 하던 윤동일씨의 부모는 모범생이고 자랑스러웠던 아들이 수사기관에 의해 살인 누명을 쓰고 고문 후유증을 겪으며, 뒤이은 암 발병과 긴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전답을 다 팔아넣느라 가산을 탕진했다. 아들이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은 뒤 아버지와 어머니도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

형 윤동기씨는 2019년 이춘재가 10차례 화성 연쇄살인사건 모두의 진범으로 드러나고 지난해 8차 사건 피해자 윤성여씨가 재심을 통해 억울함을 푸는 과정을 지켜본 뒤 진화위(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기로 결심했다. 사건을 진정하는 과정은 윤성여씨 재심 사건 변론을 맡았던 박준영 변호사가 도왔다. 고 윤동일씨의 형 윤동기씨는 6월4일 이춘재의 고향(화성시 태안읍 진안2리)이자 이춘재가 반경 5㎞ 이내에서 4건의 연쇄살인사건을 저지른 현장으로 〈시사IN〉 취재진을 안내하며 이렇게 말했다.

“이춘재는 물론이고 엉터리 수사로 가정을 파괴한 국가권력이 없었다면 우리 가족은 평화롭고 행복했을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년 세월을 고통 속에 죽지 못해 살고 있지만 가해 경찰과 국가는 아직까지 사과 한마디 없다. 수사 편의와 승진을 위해 그런 못된 짓을 저지른 경찰관들은 수사 피해자들이 억울하게 당한 고통의 절반만이라도 대가를 치러야 한다.”

기자명 정희상 기자 다른기사 보기 minju518@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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