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구치 나오미 씨는 의사들이 대외적인 발언을 할 때 환자들이 보고 듣는다는 걸 염두에 두어달라고 말했다. ⓒ히구치 나오미 제공

치매 환자가 책을 쓴다. 차분히 그리고 꼼꼼하게 자신의 삶과 발병 이후 마음과 몸의 상태를 직시하는 글을 쓴다. 치매를 앓는 사람이 책을 쓸 수 있을까 싶지만, 그 또한 치매에 대해 가진 무수한 편견 중 하나다. 일본인 히구치 나오미 씨가 쓴 〈오작동하는 뇌〉(다다서재 펴냄)에는 그런 편견에 맞서 살아온 한 사람의 생애가 흐르고 있다.

우리는 치매에 대해 ‘대충’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우선 치매(癡呆)라는 말부터 그렇다. ‘어리석고 어리석다’라는 뜻이다. 멸시의 뜻을 담고 있다. ‘문둥병’을 한센병으로 바꾼 것처럼 치매를 인지저하증 또는 인지장애증으로 바꿔야 한다는 요구가 오랫동안 나왔지만 법 개정을 통한 현실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일본에서는 2004년 행정 분야에서 치매라는 용어를 없앴고 의료 분야에서는 2007년 무렵부터 이 말을 쓰지 않고 있다.

히구치 나오미 씨가 앓는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은 뇌 신경세포에 특수한 단백질 덩어리가 축적되면서 뇌 기능이 ‘오작동’하는 증상을 말한다. 인지저하증에도 알츠하이머, 레비소체, 파킨슨 등 여러 종류가 있다. 알츠하이머가 약 50%를 차지하고 레비소체가 20%, 혈관성치매가 15% 정도다. 치매의 대부분이 알츠하이머라는 것 역시 오해다.

히구치 나오미 씨는 마흔한 살에 불면증으로 병원을 찾았다가 뜻밖에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극심한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항우울제 처방량을 늘렸지만 몸 상태는 악화했다. 헛것을 보고,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일이 반복되는 와중에 50세가 된 2013년에야 정확한 진단명을 얻었다. 자꾸 눈에 보이는 낯선 사람, 머릿속에 울려 퍼지는 노랫소리, 갑자기 찾아드는 악취…. 그가 겪은 ‘이상한 일’은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의 대표적인 증상이었다.

‘이 세상에서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 나는 이제 구별할 수 없다’라는 오랜 자책 끝에 그는 사람들에게 ‘인지저하증 환자로 살아가는 법’을 알리기로 마음먹었다. NHK 교양 프로그램 제작에 도움을 준 일을 계기로 사람들 앞에 나서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인지저하증이 병명이 아니라 때때로 닥치는 어떤 ‘상태’임을 말하고자 했다. “비가 오면 누구나 우산을 쓰듯, 상태가 나빠지면 나는 그냥 쉰다”라고 그는 말했다.

〈오작동하는 뇌〉의 국내 출간을 앞두고 히구치 나오미 씨와 서면으로 인터뷰했다. 그의 답변은 특정 병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사회를 아픈 몸으로 겪은 성찰에 가까웠다. 〈장애학의 도전〉 저자 김도현씨는 “환자란 의사의 판단을 일방적으로 참고 기다리는 자(patient)가 아님을 히구치 나오미의 글이 잘 보여준다”라는 추천사를 썼다. 히구치 나오미 씨는 “전에 서울로 여행을 갔을 때 지하철에서 여러 번 길을 잃었는데, 그때마다 말을 걸어 도와주시는 분들이 꼭 있었다. 당시의 기억이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에 대해 모르는 사람을 위해 본인이 겪는 ‘상태’를 설명해주신다면?

‘인지저하증(치매)’이라는 말에서 흔히 떠올리는 이미지와는 꽤 다릅니다. 저는 시간을 잘 모르거나, 계산을 하지 못하거나, 길을 잃거나, 환각(환시·환청·환후 등)을 느끼는 뇌기능 장애를 겪고 있지만 사고력은 유지하고 있습니다. 제가 당사자가 되어 알게 된 사실은 그런 증상들의 원인이 ‘지성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금 단계에서는 몇몇 뇌기능이 저하된 탓에 하지 못하는 일이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제 지성이나 인격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저처럼 사고력은 유지되기에 당사자가 스스로 대처법을 마련해 힘든 일을 줄일 수도 있지요. 건강한 사람도 스트레스와 피로가 쌓이면 뇌기능이 저하됩니다. 다만 우리 당사자들의 뇌는 더욱 섬세하고 연약한 것 같습니다.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과는 어떤 차이가 있나요?

미국 배우 로빈 윌리엄스는 생전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는데, 사후 부검에서 실은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은 알츠하이머와 달리 초기에 기억장애가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그 때문에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은 다른 병으로 오진되기 십상입니다. 또한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은 사람 중에 적지 않은 경우가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을 함께 겪었다는 사실이 연구(해부)를 통해 알려졌습니다.

진단을 받은 뒤 “젊어서 발병하는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은 빨리 진행된다. 예후가 나쁘며 여명이 짧다”라는 의학서 내용을 접하고 어떤 마음이었는지요?

책에 쓰인 대로라면 진단을 받은 시점에 제 여명은 정말 얼마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죠. 저는 손주를 안아볼 수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앞으로 급속히 병세가 악화되어 머지않은 미래에 누워만 있다 죽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죠. 당시에는 제가 희망을 품을 만한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접할 수 있는 정보라고는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은 환시 때문에 흥분해서 날뛰곤 한다. 폭력적으로 변하기에 돌보기가 매우 힘들다” 같은 것들뿐이었지요. 그렇게 가족을 괴롭히느니 차라리 그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게 낫겠다고 한때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제가 자살하면 가족이 평생 괴로워할 테니 사고사로 위장해서 죽을 방법을 찾아봤습니다. 하지만 설령 사고라도 가족들이 슬퍼하는 건 변함없을 듯해서 결국 살아야 한다고 마음먹었습니다.

가족과 함께 단풍놀이를 갔다가 장어구이 냄새를 맡지 못한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실제 일상생활에서 후각이나 시각을 잃어버린 충격이 아주 클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

무서웠습니다. 손가락이 하나하나 잘려나가는 듯했는데, ‘다음에는 뭘 잃을까?’ 하는 생각에 두려웠습니다. 그렇지만 후각의 문제는 매일 겪다 보니 이내 익숙해졌습니다. 어느새 후각이 없는 게 당연한 일이 되었습니다. 다만 금목서와 서향 같은 꽃을 볼 수만 있다는 건 매년 저를 쓸쓸하게 합니다. 그 꽃들의 향기를 어린 시절부터 무척 좋아했거든요.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서는 ‘○○가 있으면 좋을 텐데’ 하는 식으로 생각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런 생각 자체가 스트레스라서 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요?

‘이따금씩 뇌가 오작동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주면 무척 기쁠 것입니다. 오늘날 사회는 갈수록 배타적으로 변해가는 것 같습니다. 발달장애를 예로 들면, 제가 어렸을 적에는 발달장애 당사자들을 ‘조금 별난 사람’ 정도로 여기며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이 사회생활을 할 여지도 외려 지금보다 더 있었지요. 오늘날 사회는 예전에 비해 ‘평균에서 벗어난 사람’이 더욱 살아가기 어려운 곳이 되었습니다. 약자를 포용하지 못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람에게도 불안하고 답답하기 마련입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누구도 행복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맨 처음 환시나 환청을 경험해 당혹스러운 당사자나 가족에게 어떤 말을 해주고 싶은지요?

당사자에게:이 병의 환시는 당신의 지성, 정신, 인격 그 무엇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위험한 상황(조난 등)에 처하면 환각을 느낄 수 있습니다. 뇌의 구조가 그런 것입니다. 환시는 당신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괜찮아요. 환시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고 이해해주는 사람(가족, 같은 병에 걸린 사람 등)과 환시에 대해 이야기해보세요. 그러면 안심할 수 있고, 다시 환시가 보여도 더 이상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가족에게:환시를 이상하게 여기며 약으로 없애려 하지 마세요. 대부분 부작용으로 고통을 겪습니다. 당사자의 가족은 무엇보다 환시를 부정하거나 터부시하지 않길 바랍니다. “뭐가 보여?”라고 묻고,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세요. 그러고는 “와, 신기하네”라며 함께 흥미로워하면 좋겠습니다. 환시 중에는 웃긴 것, 아름다운 것, 귀여운 것도 많답니다. 함께 환시를 흥미롭게 여기는 가정에서 지내는 당사자는 병세도 느리게 진행되고 좋은 상태를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습니다.

2015년 일본에서 인지저하증 강의를 하고 있는 히구치 나오미 씨. ⓒ히구치 나오미 제공

인지저하증에 대한 오해와 편견 중 어떤 것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들었나요?

이런 말들이지요. “지성도 사고력도 잃어버렸으니까(멍청하니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이니까(미쳤으니까) 없는 걸 봤다고 하는 거야.”

‘환자가 직접 읽으리라 전혀 상상하지 않는 전문가가 쓴 해설은 환자에게 흉기나 다름없다’라는 말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흉기가 되지 않으려면 전문가는 어떤 자세로 해설을 쓰고 당사자를 배려해야 할까요?

의사들이 대외적인 발언을 할 때 ‘환자가 보고 듣는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었으면 합니다(젊은 인지저하증 당사자 중에는 책과 기사를 읽으며 자신의 병에 대해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답니다). 어떤 마음가짐으로 글을 썼느냐에 따라 비당사자가 인지저하증에 대해 품는 인상도 바뀔 수 있습니다. 예컨대, 처음 진단을 받았던 무렵에 어느 의사가 책에서 레비소체 인지저하증의 원인을 “뇌에 이상한 단백질이 쌓여서 신경세포가 사멸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진단 직후 불안에 떨고 있던 저는 ‘이상’과 ‘사멸’이라는 단어에서 공포와 절망밖에 느끼지 못했습니다. 만약 ‘이상’을 ‘특수’로, ‘사멸’을 ‘감소’로 썼다면 인상이 전혀 달랐을 것입니다. 그렇게 써도 잘못된 내용은 아니고요. 그런 사소한 배려만으로도 당사자에게 전혀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의사들이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선생님을 향해 ‘인지저하증답지 않다’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온라인 서점 아마존에서 제 책의 리뷰만 봐도 저에게 인지저하증답지 않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제가 겪는 수많은 장애가 보이지 않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왜 이해해주지 않는 걸까?’ 고민했는데, 그 자체가 나쁜 스트레스가 되어 상태를 악화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이제는 스트레스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저를 정확히 이해해주길 바라는 것은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병이 있나 봐’라고 한 사람이라도 더 알아준다면, 상황은 변할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제 병에 관한 정보를 끈질기게 계속 발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에서도 요즘 돌봄노동에 대한 논의가 활발합니다. 뇌기능 장애를 겪는 이들에게 필요한 사회적 지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사회에서 격리하여 가두자’ 이런 것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나아가길 바랍니다. 인지저하증 초기에는 고립되는 상황을 피하고 친구와 함께 그때껏 했던 취미와 자원봉사 같은 활동을 계속하는 것이 무척 중요합니다. 주위에서는 응원해주면 좋고요. 일본에서는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당사자끼리 하는 피어 서포트(peer support)가 좋은 효과를 거두고 있지요.

일본에서는 고령의 인지저하증 당사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곳이 전국 각지에 있습니다. 인지저하증 당사자 중에는 사회생활을 하며 제 몫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리고 주위에서 조금만 도와주면 인지저하증이라도 한참은 더 일할 수 있습니다. 일을 하면서 삶의 보람을 느끼는 인지저하증 당사자들은 눈빛도 반짝이고 얼핏 봐서는 환자 같지 않답니다. ‘삶의 보람’(생활의 활기, 즐거움, 좋은 인간관계 등)을 느끼는 인지저하증 당사자는 이른바 ‘문제 행동’을 일으키지 않고, 병세도 천천히 진행됩니다. 그렇게 되면 인지저하증 때문에 가족과 사회가 받는 부담도 훨씬 줄어들 것이라고 봅니다.

히구치 나오미 씨는 때때로 기억을 잊는다. 자신이 커피를 내려준 걸 잊고 배우자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자신이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내려간 이 인터뷰 답변지의 내용도 일부 잊을지 모른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시간은, 기억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며 수많은 실이 섬세하게 얽히고설킨 그물 같다고.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제 시간이 종료된다 해도 제 시간과 타인의 시간이 만들어낸 그물은 끊기지 않고 계속해서 넓어지리라 생각합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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