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이선호씨의 아버지 이재훈씨가 휴대전화에 저장해놓은 아들의 이름은 ‘삶의 희망’이다. ⓒ시사IN 이명익

4월22일 아침, 아버지 이재훈씨(60)와 아들 이선호씨(23)는 나란히 집을 나섰다. 오전 7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평택항 부두에서 8년째 작업반장으로 일하는 이재훈씨는 항상 일찍 출근했다. 원청업체 ‘동방’ 평택지사로부터 오늘 어떤 작업을 해야 하는지 지시받은 뒤 팀원들에게 일을 나눠주는 게 그의 아침 일과였다. 아버지도 아들도 하청업체인 ‘우리인력’ 소속의 일용직 노동자였다. 그러나 우리인력 노동자들은 모든 업무 지시를 원청업체인 동방 직원에게 직접 전달받았다.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현장에 나가기 시작한 건 지난해부터다. 2019년 12월에 제대한 뒤 복학을 기다리는 동안 아들은 “용돈벌이나 할 겸” 아버지를 따라나섰다. 아버지는 “강인하게 키우고 싶어서” 아들을 데리고 나갔다. 원래 복학하기 전까지 2~3개월만 하려던 일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문에 계획이 틀어졌다. 아들은 2학년으로 복학한 뒤에도 학교에 갈 수 없었다. 집에서 온라인 수업을 들으며 일손이 필요할 때마다 아버지를 따라 계속 현장에 나갔다.

아버지는 아들이 맡았던 일을 이렇게 설명했다. “동식물 검역이라는 일이 컨테이너에 들어 있는 물건을 꺼내서 신고된 물건이랑 똑같은지 검사하고, 원산지 표기 같은 걸 확인하는 일이지 위험한 일이 아닙니다. 어느 아버지가 위험한 일에 아들을 데리고 오겠습니까.”

사고 당일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4월22일 오후 3시30분, 아들 이선호씨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모두 마치고 현장 사무실로 돌아왔다. 3시41분, 원청업체인 동방 소속 직원이 작업반장인 아버지 이재훈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현장에서 뭐 하나 뽑을 게 있으니까 정을 가지고 와달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일을 잘하는, 같은 하청업체 직원 ㄱ씨한테 전화를 하려는데 ㄱ씨가 외국인 노동자라서 정이 뭔지 모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아버지는 마침 눈앞에서 쉬고 있던 아들더러 ‘ㄱ씨에게 직접 가서 용건을 전달하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내용을 전달받은 ㄱ씨는 혼자 하기 힘든 일이니 함께 가자고 했다.

현장에 도착한 이 둘에게 주어진 업무는 FR(Flat Rack) 컨테이너를 정리하는 작업이었다. FR 컨테이너는 천장이 없고 옆면을 두르는 4면 중 왼쪽과 오른쪽, 2면만 막혀 있는 컨테이너다. 주로 형태가 다양한 화물을 실을 때 사용한다. 평상시에는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접어 평평한 형태로 차곡차곡 쌓아 보관한다.

ㄱ씨가 왼쪽 벽과 오른쪽 벽을 고정하고 있던 안전핀을 각각 뽑아냈다. ㄱ씨를 따라온 이선호씨는 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이게 위험한 일인지 뭔지, 처음 간 애가 뭘 알았겠습니까.” 당시 상황을 설명하던 아버지 이재훈씨가 말했다.

현장에 있던 원청업체 직원은 그 둘에게 바닥 위에 널브러져 있는 나무 조각을 주우라고 지시했다. 이선호씨는 안전핀이 제거된 오른쪽 벽으로 다가가 나무 조각을 줍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그를 미처 보지 못한 지게차가 다가와 왼쪽 벽을 밀었다. 왼쪽 벽이 ‘꽝’ 접히면서 그 충격으로 오른쪽 벽도 접혔다. 300㎏에 달하는 철판이 이선호씨를 덮쳤다.

아버지는 ‘우연히’ 사고 현장을 목격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작업을 마칠 시간이 다 됐는데도 사람들이 안 돌아오는 거예요. 아까 심부름 나간 우리 아이도 돌아올 생각을 안 하고요. 속으로 ‘오늘 왜 이리 일을 빡세게 시키나’ 싶어서 자전거를 타고 현장을 한 바퀴 돌아보는데⋯.” 아들이 잠을 자듯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지게차가 비스듬히 들어올린 FR 컨테이너 벽 아래였다.

“법은 이미 있잖아요. 있는 법부터 지키고…”

“뭐야, 뭘 줍고 있노? 저래 주우라고 하면 안 되지.” 중얼거리며 컨테이너에 더 가까이 다가간 그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기 뭐고, 죽은 기가. 죽었나.” 그는 순간 자신이 ‘미쳐버렸다’고 생각했다. 사고 현장에 도착한 119 구급차에 아들을 실어 보낸 후 그도 직원 차를 타고 그 뒤를 따라갔다. 그사이에 아들은 흰 천 아래 덮여 있었다.

아버지는 돌아왔지만 아들은 돌아오지 못했다. 집에 들어간 그는 부자의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상을 차리고 있던 아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호가, 죽었다. 내 정말 미안하다.” 장례식장에서는 아들 영정 앞에 무릎을 꿇었다. “선호야, 아빠 절대 용서하지 말고 가래이.”

이재훈씨는 처음에 가능한 한 조용히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아들이 죽었는데 보상금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냐고 말 듣는 것도 싫었고요. 저도 그 회사에서 8년 동안 일했다 아입니까. 어쨌든 거기서 일해서 우리 가족도 밥을 먹고 살았고 아들도 가르쳤으니까. 시간을 줬어요. 사과하라고. 우리 아들한테 와서 미안하다고 빌어야 할 사람은 와서 빌라고.”

하루는 회사 관계자가 장례식장에 찾아와서 ‘왜 아드님이 작업 중에 안전모를 쓰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버지의 목청이 커졌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규칙을 따져볼까요? 아침마다 안전관리자들이 안전장비 하나라도 빠진 사람이 있으면 돌려보내야 되죠? 그런데 그거 체크하는 사람 있었습니까? 안전장비 없이 일해도 좋다고 들여보내놓고 이제 와서 작업자가 안전모를 썼네 안 썼네 따지자는 겁니까? 애한테 그렇게 위험한 작업을 시키면서 안전모가 필요하다고 말해준 사람이나 있습니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아들의 죽음이 ‘개죽음’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점점 짙어졌다.

사고가 난 지 8일이 지난 4월30일, 원청업체는 고용노동부에 부분작업중지 명령을 해제해달라고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고용노동부가 사고 직후 이틀 동안 현장을 감독한 뒤 작성한 ‘평택항 ㈜동방 사망사고 관련 상황 및 향후 조치계획’(더불어민주당 노웅래 의원실 제공)에 따르면, 해당 사업장에서 적발된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항은 12건이다.

우선 정상적인 FR 컨테이너에는 벽이 서서히 접히도록 하는 완충기가 장착되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선호씨를 덮친 컨테이너에는 완충기가 달려 있지 않았다. 또 규정대로라면 원래 한쪽 벽 작업을 마무리한 다음 반대쪽 벽 안전핀을 제거했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안전관리자가 없는 상황에서 작업 순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완충기가 작동하지 않는 컨테이너에서, 양쪽 안전핀을 모두 제거한 상태로 지게차가 한쪽 벽을 밀자, 그 충격으로 반대쪽 벽도 순식간에 접혔다.

이선호씨는 아무런 주의나 안전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날 갑작스럽게 처음 투입된 작업에서 목숨을 잃었다. 위험한 작업을 말렸어야 할 안전관리자도, 지게차에 신호를 보냈어야 할 신호수도 없었다. “두 명까지는 바라지도 않아요. 안전관리자든 신호수든 일당 10만원이면 됩니다. 거꾸로 말하면 그 10만원 때문에 우리 아들이 죽은 거 아닙니까. 그거 아껴서 얼마나 더 부자 되려고요?” 이재훈씨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5월12일 오후 2시, 원청업체 임직원들은 평택항 신컨테이너터미널 앞에서 카메라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원래 이날 오후 6시에 유가족을 만나 자체 진상조사 결과를 설명한 뒤 사과하기로 약속한 상태였다. 서울에서 언론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로부터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은 이재훈씨는 오히려 “동방이 사과를 했다니 그게 무슨 말이냐”라고 되물어야 했다. 유가족은 거세게 항의하며 진심을 담은 사과문을 가져오라고 요구했다.

5월13일 문재인 대통령이 장례식장을 찾아 조문했다. 문 대통령은 “노동자들이 안전에 대한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드렸는데 송구스럽다”라고 말했다. 이재훈씨는 “철저한 원인 규명과 책임자 처벌도 있어야겠지만, 제발 이제는 이런 사고를 끝내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는 사후 대책이 따로 필요 없다고 말했다. “법은 이미 있잖아요. 있는 법부터 잘 지키고, 지키지 않으면 법에 따라 그대로 처벌하면 됩니다. 이게 안 지켜지니까 오전에 죽고 또 오후에 죽고, 날마다 하루 두 명이 퇴근을 못하지 않습니까.” 지난 한 해 동안 산업재해 사고로 사망한 노동자는 882명, 하루 평균 2.42명이다.

장례식장을 지키고 있는 선호씨 친구들은 새벽 내내 30분 간격으로 알람을 맞춰놓는다. 스물세 살 동갑내기 친구의 영정 앞에 놓인 향을 꺼트리지 않기 위해서다. “어디서 봤는데 향이 이승과 저승을 이어주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친구 배민형씨가 말했다. “저희한테는 이게 나름대로 치열한 일이에요. 선호한테 잊지 않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일이잖아요.” 친구 김벼리씨가 말했다.

친구 김씨는 ‘일하다 죽지 않게’라는 말이 너무 흔해서 허망한 구호로만 남은 것 같다고 말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위험한 곳에서 일하고 있잖아요. 오늘 이렇게 아무것도 안 바뀐 채 지나가면 내일도 두 명, 세 명이 허망하게 죽어요. 정치권에서 부동산 이야기 많이 하고 이대남 이대녀 이야기도 하는데, 우선 일하다가 죽지만 않게 해달라고 말하고 싶어요.” 이선호씨가 세상을 떠난 4월22일 이후 현재(5월20일)까지 한 달여 사이, 알려진 산재 사망 사고만 20건이다(아래 〈표〉 참조).

아들의 친구들이 조문을 올 때마다 이재훈씨는 간곡하게 말한다. “너그들이 알아야 된다. 돈 얼마 벌자고 간 그 공간이 얼마나 위험한지, 다칠 수도 있고 죽을 수도 있다는 걸 항상 생각해야 된다. 누가 시켜도 좀 이상하면 ‘어 이거 왜 이래요, 저 이거 못하겠어요’ 말해야 된다. 위험한 일은 안 하겠다, 못하겠다, 이래 말할 권리가 있단 말이다. 알았나?”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몬 원청업체를 결국 이기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잘 안다고 말했다. “내가 이래 해봤자 저 회사 부도 안 납니다. 압니다. 내 자신이 일용직 노동자라서 그 누구보다 잘 압니다. 그래도 법에 적힌 대로 끝까지 가보겠다는 겁니다. 내 삶의 마지막 희망까지 강탈해 가놓고는 반성도 안 하잖아요. 용서가 안 됩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휴대전화에 저장해놓은 아들의 이름은 ‘삶의 희망’이었다.

기자명 평택·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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