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년 가드너가 베네치아 양식으로 지은 저택은 1903년 가드너 박물관으로 개방되었다. ⓒWikipedia

미국 보스턴에서 처음 나를 사로잡은 것은 빅토리안 고딕 양식의 건축물 사이에 단정하게 자리 잡은 르네상스풍 잿빛 저택이었다. 보스턴은 특유의 고풍스럽고 지적인 분위기로 ‘미국의 아테네’라고 불린다. 17세기 영국 식민지 시절의 건축양식이 향토화되어 있는 도시다. 앞서 말한 잿빛 저택은 이런 보스턴에서도 중세를 연상케 하는 이국적인 건물이다. 대부호의 아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가 1901년에 완공한 이 저택은 15세기 베네치아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지금은 ‘가드너 박물관’이다.

가드너는 1924년 84세로 사망할 때까지 저택의 맨 위 4층에 살았다. 나머지 층은 자신이 유럽, 중동 등에서 수집한 2500여 점의 개인 소장품을 전시하는 박물관으로 1903년에 개방되었다. 그는 자신의 소장품을 재배치하거나 제거해서는 안 되며 만약 이를 어길 경우 모든 미술품을 경매에 부쳐 수익금을 하버드 대학에 기증하고 박물관을 폐쇄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그 유언은 엄격하게 지켜져 내려왔다. 건물 2층 ‘네덜란드 방’의 비단 벽에 빈 액자가 걸려 있는 이유다.

가드너 박물관은 30년 전인 지난 1990년에 5억 달러 상당 규모인 13점의 작품을 도난당했다. 미국 역사상 최대 미술품 도난 사건 중 하나다. 가드너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사라진 작품의 자리에 다른 미술품을 걸지 않고 빈 액자로 남겨두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지금도 끈기 있게 도난당한 작품의 소재를 찾고 있다.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은 잊힌 옛이야기가 아니다. 여러 용의자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수사가 벌어졌다. 지금도 도난품을 반환받는 데 결정적 제보를 하면 보상금 1000만 달러를 받을 수 있다. 도난품 가운데 특히 나폴레옹 시대의 독수리 깃대에 대해서는 별도로 보상금 10만 달러가 추가 책정되어 있다. 최근 도난품을 쫓고 있는 핵심 인물들을 만나 저간의 사정과 최근 상황을 어렵게 들어볼 수 있었다.

 

가드너 박물관은 설립자의 유언에 따라 도난당한 미술품 자리에 다른 작품을 걸지 않고 빈 액자로 남겨두었다. ⓒ양수연 제공

1990년 3월18일 새벽 1시24분, 경찰관 두 명이 가드너 박물관의 후문 초인종을 눌렀다. 23세의 야간 경비 리처드 애버스는 의심 없이 문을 열었다. 경관들은 ‘소란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며 다른 경비원도 불러달라고 했다. 이윽고 “당신에게 체포영장이 발부된 걸 아느냐”라며 애버스를 벽에 붙여 세웠다. 이로 인해 애버스는 책상 밑에 숨겨진 보스턴 경찰서와 연결된 응급 벨을 누를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경관들은 다른 경비원이 도착하자 두 사람 모두에게 수갑을 채운 뒤 자신들의 정체를 밝혔다. “우리가 도둑이야.”

도둑들은 경비원들의 얼굴을 덕테이프로 가린 뒤 지하실에 가뒀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 걸작품들이 모인 2층 ‘네덜란드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렘브란트의 유일한 바다 풍경화인 ‘갈릴리 바다의 폭풍’(1633)과 ‘검은 옷을 입은 신사와 숙녀’(1633)를 벽에서 떼어냈다. 도둑은 액자의 작품을 칼로 도려냈다. 이 작품들은 캔버스 위에 물감으로 겹겹이 채색된 ‘레이어’이기 때문에 돌돌 말아 가져갈 수 없다. 도둑들은 작품을 썰어내는 과정에서 꽤 공을 들였을 터였다. 그들은 반대편의 벽에 걸린 또 다른 렘브란트 유화 작품인 ‘23세의 자화상’(1629)도 벽에서 내려놓았다. 그러나 이 작품을 가져가진 않았다. 대신 그 옆의 렘브란트 자화상(1934) 동판화에 손을 댔다. 이 동판화의 크기는 우표 정도다. 액자째 품에 넣어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작았다. 기이하게도 도둑은 시간과 공을 들여 액자를 해체한 다음 동판화만 가져갔다. 네덜란드 방에서 사라진 또 다른 값비싼 작품은 2억5000만 달러로 평가되는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얀 페르메이르의 ‘콘서트’(1663~1666)다. 페르메이르는 전 세계적으로 소장된 작품의 수가 35개 내외로 추산될 정도의 과작(寡作)이다. 그러니만큼 ‘콘서트’는 가드너 박물관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던 작품 중 하나였다. 이 밖에도 같은 방에서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호페르트 플링크의 ‘오벨리스크가 있는 풍경’(1638), 중국 고대 화병(기원전 1200~1100) 등이 사라졌다.

1990년 가드너 박물관에서 도난당한 얀 페르메이르의 ‘콘서트’(왼쪽)와 렘브란트의 ‘갈릴리 호수의 폭풍’. ⓒWikipedia

훔친 미술품은 마피아의 협상 도구

네덜란드 방에서 나온 도둑들은 복도를 건너 ‘쇼트 갤러리’ 방으로 들어갔다. 프랑스 화가인 에드가르 드가의 작품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드가가 1857~1888년 종이에 그린 ‘울 목장을 나서며’ ‘피렌체 근방 도로의 정경’ ‘세 명의 기수’ 등 세 점과 ‘예술을 위한 저녁 프로그램’ 같은 목탄 스케치 두 점을 골랐다. 이어서 드가 작품 옆에 걸린 나폴레옹 깃발이 표시된 액자의 나사를 풀었다가 도중에 포기한다. 그들은 깃발 작품은 포기하고 다만 깃발 위에 달린 작가 미상의 독수리 모양 청동 장식을 떼어갔다. 사방에 있는 걸작들을 가져가기도 바쁜 시간에 눈에 띄지 않는 청동 장식 액세서리를 훔쳐간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이었다. 이러한 박물관 내 도둑의 경로는 동작 감지기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도둑은 작품 근접 경보음이 찌를 듯이 울리고 있는데도 도망치지 않고 여유를 부렸다. 떠날 때는 감시카메라의 녹화 테이프와 경비의 책상에 있는 동작 탐지 인쇄물도 꼼꼼히 챙겨갔다.

야간 경비 규정상 경찰이든 그 누구든 해당 시간에 박물관으로 들어올 수 없는데도 도둑은 쉽게 침입했다. 무려 81분간 박물관에 머물렀으며 감시 녹화 테이프 위치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FBI는 박물관 내부인의 협력을 의심했다. 무엇보다 기이한 일은 1층의 ‘블루룸’에서 일어났다. 이 방에서는 마네의 ‘토르토니 카페에서’(1875)가 사라졌다. 그런데 동작 감지기는 도둑이 이 방에 들어가지 않은 것으로 기록했다. 블루룸에 마지막으로 들어간 사람은 사건 발생 23분 전, 도둑에게 문을 열어준 경비원 애버스였다. 따라서 수사 초기엔 경비원 애버스가 공범으로 강하게 의심되었다.

FBI는 사건 발생 직후 마피아의 소행임을 알아챘다. 훔친 명작을 시장에 내놓는 순간 도둑은 덜미가 잡히기 마련이다. FBI는 마피아가 훔친 작품을 협상 카드나 담보물로 사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떤 마피아 조직이 관여한 것인가가 관건이었다. 보스턴에서는 1990년대 말까지 아일랜드계와 이탈리아계 마피아 세력이 위세를 떨쳤다. 보스턴 마피아의 대부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아일랜드계 마피아인 화이트 버거였다. 그는 훔친 미술작품을 아일랜드공화국 군(IRA)의 무기 구입 담보로 사용하기 위해 밀반출하려 시도했던 혐의를 받은 적이 있었다.

반면 이탈리아계 마피아는 훔친 작품을 담보로 마약을 들여오곤 했다. 특히 ‘미술품 도둑의 전설’로 불린 마일스 코너는 도난 작품을 새로운 용도로 활용해서 많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게 했다. 감옥에서 나오기 위한 협상 카드로 미술품을 활용했던 것이다. 보스턴 외곽에 사는 마일스 코너는 경찰 집안에서 자랐고 동양철학에 능통했으며 멘사 회원이었을 만큼 두뇌가 비상했다. 그는 록 가수로 활동하며 여러 미술관을 털어오다 1975년 어느 대낮에 보스턴 미술관(MFA)으로 들어가 렘브란트의 작품을 유유히 들고 나오는 대담한 행각을 벌였다. 이때 코너의 패거리는 추격하는 경비원들에게 자동소총을 발사하며 그들을 따돌렸다.

그 후 코너는 메인주에서 훔친 앤드루 와이어스(사실주의적 작품으로 20세기를 풍미한 유명한 미국 작가)의 작품들을 판매하려다 구매자로 가장한 FBI에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보스턴 미술관에서 훔친 렘브란트 작품을 돌려주겠다고 흥정하여 징역 13년을 28개월로 줄이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그가 훔친 렘브란트의 초기 걸작 ‘금장식 망토를 입은 어린 소녀’(1632)는 무사히 반환됐다.

이 사건 이후 마피아 세계에서 ‘명작 한 점’은 ‘감옥 탈출 카드’와 동의어로 통하게 되었다.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 당시, 코너는 다른 범죄로 수감 중이었기 때문에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았다. 그러나 사건의 배후가 그일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는 FBI에 협조하며 가드너 박물관 사건이 자신의 친구인 이탈리아 마피아 바비 도나티의 소행일 것이라는 힌트를 흘렸다. 도나티는 코너와 함께 메인주에서 와이어스 작품을 함께 훔친 동업자였다. 도나티는 자신의 두목인 비니 페라라를 감옥에서 꺼내려는 협상 용도로 가드너 미술품을 훔쳤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에 따라 FBI가 도나티를 감시하던 중 의외의 사건이 발생한다. 1991년 9월, 도나티가 머리를 절단당한 참혹한 모습으로 자동차 트렁크에서 발견된 것이다. 도나티가 숨긴 가드너 미술품은 영워스(코너의 물건을 관리하기도 했다)라는 사람이 빼돌렸을 것으로 의심되었다. 마침 영워스는 〈보스턴헤럴드〉 기자 톰 매시버그와 접촉하고 있었다. 보상금과 협상 카드를 확보하려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먼저 자신이 해당 미술품을 갖고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영워스는 1997년 8월18일, 매시버그 기자를 뉴욕 외곽의 허름한 창고로 데려간다. 매시버그는 어둠 속에서 플래시 라이트에 의지한 채 원통 박스에 담긴 렘브란트의 걸작 ‘갈릴리 호수의 폭풍’과 마주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이튿날 〈보스턴헤럴드〉의 커버스토리를 장식했다. 그러나 FBI와 가드너 박물관은 그것이 진품이라는 보장이 없다며 다른 증거를 요구했다. 영워스는 해당 작품의 귀퉁이에서 물감을 긁어내 매시버그 기자에게 보낸다. 가드너 박물관과 FBI의 감정 결과 그 물감은 17세기 생산품이긴 하지만 ‘갈릴리 호수의 폭풍’에 사용된 재료는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수사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FBI는 최초의 용의자이자 살해된 도나티의 주변을 다시 뒤졌다. 도나티와 그의 친구인 바비 구아렌테(로제티 마피아의 조직원)가 가드너 박물관 도난을 기획한 것으로 수사망을 좁혔다. 그 밖에도 강력한 마피아 간부들이 사건과 촘촘히 얽혀 있는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FBI는 거국적인 마피아 소탕작전을 펼치고 있었다. 마피아 세계 내에서도 사업 영역이 축소되고 변절자가 속출하면서 피의 전쟁이 전개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의 용의자들 중에서 절반 이상이 살해되었다. 박물관 침입자로 마피아 조직원 조지 라이스펠더와 데이비드 터너가 지목되었으나 라이스펠더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가드너 미술품은 마피아의 세력 다툼 가운데 행방이 더욱 묘연해져갔다. 가드너 박물관은 2005년에 9·11 테러 사건 이후 최고의 보안 책임자로 명성을 얻은 앤서니 아모레를 미술품 회수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FBI 전담반과도 밀접한 협력 시스템을 꾸리고 있다.

도대체 도난당한 미술품은 어디 있는 것일까. 2013년 3월, FBI는 기자회견을 자청하여 가드너 미술품 도난 사건이 다른 국면에 접어들었음을 알렸다. FBI는 미국 중부와 보스턴에 기지를 둔 범죄조직이 가드너 박물관 도난을 주도했으며 도둑의 신원도 확실하게 파악했다고 발표했다. 또한 훔친 미술품은 여러 경로를 거쳐 코네티컷과 필라델피아 지역으로 옮겨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FBI는 용의자의 이름 그리고 미술품이 어떤 경로로 필라델피아로 이동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공개하지 않았다.

젠타일. ⓒAP Photo

이후 수사는 지지부진해 보였다. 그러나 2016년에 결정적 제보가 나온다. 도나티와 함께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을 기획한 것으로 추정되는 바비 구아렌테(2004년 복역 중 사망)의 아내 엘렌이 FBI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엘렌은 남편이 생전에 가드너의 도난 작품 2점을 로버트 젠타일이라는 마피아에게 줬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젠타일은 보스턴 시내 도체스터에서 정비소를 위장한 마피아 아지트를 운영했던 자다. 당시엔 연방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같은 해 5월2일, 미국의 다수 언론은 FBI가 젠타일 아내의 거주지인 코네티컷주 맨체스터의 한 주택을 급습하는 상황을 생중계했다. 100여 명에 달하는 FBI 요원과 경찰이 그의 집을 둘러싸고 도로를 막았으며, 금속탐지기와 개를 동원해서 거주지를 샅샅이 뒤졌다. FBI는 벽과 마루를 뜯어내고 땅까지 팠다. 수일간의 조사에도 불구하고 헛간 비밀 바닥에서 불법 무기만 수거했을 뿐 가드너의 미술품은 발견되지 않았다.

FBI 외에도 보스턴 지역 언론 기자들이 가드너 박물관 도난 사건을 집요하게 추적해왔다. 여러 가설도 나왔다. 2018년, 〈보스턴글로브〉의 스테판 커크지안 기자는 플로리다 올랜도에 가드너의 미술품이 묻혀 있다는 전 마피아 보스 루시시의 제보를 받아 발굴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미술품은 나오지 않았다. 익명을 요구한 이 수사 관계자는 나에게 “그 땅은 용의자 소유의 땅이 아니었고 어떤 용의자도 5억 달러의 가치를 가진 작품을 1500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사람의 소유지에 묻어두지 않을 것”이라고 일축했다. 이 수사 관계자는 최근에 나온 넷플릭스의 이 사건 관련 다큐멘터리에 대해서도 “가드너 박물관은 그 필름 제작에 협조하지 않았으며 수사 핵심 관계자들도 인터뷰를 거부했다. 가설을 바탕으로 제작한 할리우드 필름일 뿐이다”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앞으로의 수사는 어떻게 진행될까? 사건 당일 박물관에 침입한 것으로 추정되었던 용의자 둘 중 생존자인 데이비드 터너는 2019년 11월에 21년의 수감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다. 이 수감은 가드너 박물관 도난이 아니라 살인강도 등 다른 혐의 때문이었다. 터너는, FBI가 주요 용의자로 추적했던 바비 구아렌테가 자식처럼 아꼈던 조직원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지금의 FBI가 터너를 주목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결여’를 ‘환상’으로 충족하는 과정

오히려 FBI는 젠타일을 더욱 의심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젠타일 자택 수색에서 가드너 미술품이 나오진 않았으나 도난품의 목록과 암시장 가격을 적은 그의 메모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FBI는 도난 사건 기획자인 바비 구아렌테의 아내로 젠타일을 제보한 엘렌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다. 젠타일은 2019년 3월에 복역을 마쳤고 현재 자유의 몸이다.

2012년 5월10일 경찰이 마피아인 젠타일의 아내가 거주하는 미국 코네티컷주 맨체스터 소재 집 마당을 수색하고 있다. ⓒAP Photo

일각에서는 작품이 중동·중국·유럽 등 해외에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2013년에 필라델피아를 도

난 작품들의 소재지로 언급했던 FBI는 지금도 미국 내 어딘가를 염두에 두고 있는 듯하다. 수사 관계자들을 만나는 가운데, 머지않은 시점에 새로운 국면이 올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커크지안 기자는 나에게 “FBI가 ‘가드너 박물관의 도난 걸작들은 후손에게 물려줄 우리 모두의 작품’이라고 대중에게 적극 홍보해야 제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미국엔 가드너 박물관의 도난 작품을 강박적으로 추적하는 사람들이 있다. 매시버그 기자는 이를 ‘가드너 병(sickness)’이라고 부른다. 작품을 되찾고자 하는 욕망은 척박한 예술의 땅인 미국에 르네상스를 옮겨오려고 했던 20세기 초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의 욕망과도 닮았다.

유럽의 걸작을 동경해서 수년간 유럽을 돌며 작품을 수집했던 그는 보스턴에 가드너 박물관이라는 르네상스식 궁전을 창출했다. 프랑스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은 ‘르네상스식 궁정풍 사랑(귀부인에 대한 기사들의 이루어질 수 없는 연모를 그린 장르)’을 ‘승화’의 한 사례라고 언급한 바 있다. ‘가질 수 없는 대상’을 ‘숭고한 대상’으로 끌어올리는 방법으로 자신의 ‘결여’를 ‘환상’으로 충족시키는 과정이 바로 승화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라는 귀부인을 연모하며 마피아의 천박한 물신주의와 싸우는 ‘가드너의 기사’는 그 과정에서 승화를 경험하고 있는 것일까? 수사와 관련된 수많은 가설들이 환상으로 작동해온 가운데 가드너 박물관에 걸린 텅 빈 액자는 물음표를 담은 결여의 표지나 마찬가지다.

기자명 양수연 (해외 언론인·<뉴스엠> 편집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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