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원 그림

미식가 샤브랭은 뭘 먹는지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한때 나는 읽는 것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아니다. 무엇을 읽고 쓰고 말하는가로 어떤 사람을 알 수 있다면 삶은 쉬울 것이다. 내가 허방을 짚고 아득해질 일도 없을 테고. 그래도 배우는 건 있다. 사람은 오직 행위로만 판단할 수 있다는 자명한 사실. 그 사실을 잠시 잊었을 때, 그래서 다시 넘어져 깨진 무릎을 일으켜 세울 엄두조차 내지 못하고 있을 때, 서보 머그더의 〈도어〉를 만났다.

헝가리 출신의 서보 머그더는 처음 보는 작가였다. 나는 이름을 잊지 않으려 종이에 썼다. Szabo Magda라는 낯선 언어의 철자를 욀 때까지 썼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모든 문장을 외우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그가 보여준 사랑의 진상을, 삶의 양면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다시는 사랑의 이름으로 삶을 원망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의 문장이 잊고 있던 내 안의 간절함을 일깨웠다.

그러나 시작은 시큰둥했다. 사람만큼 책에도 싫증이 나던 참이었다. 특히 소설이 그랬다. 굉장한 작품이라는 찬사에 혹해 책장을 펼쳤다가 반도 못 읽고 덮곤 했다. 독자를 놀래주려는 야심이 빤히 보이는 문장들, 과장으로 가득한 장광설을 참아주기에 내 눈은 너무 소중하다. 〈도어〉의 도입부에서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10쪽)”라는 문장을 보았을 때, 책을 덮고 싶었다. 독자를 꾀는 전형적인 충격요법, 쯧. 바로 뒤에 에메렌츠가 나오지 않았다면 독서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에메렌츠가 나왔고 나는 사로잡혔다. 이처럼 강력한 여성 캐릭터는 본 적이 없었다. 나는 서보 머그더가 열어준 좁은 문으로 들어가 이 놀라운 사람을 만났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

유명 작가인 ‘나’는 집안일 해줄 사람을 찾다가 공동주택의 관리인인 에메렌츠와 인연을 맺는다. 통상적으로 보면 ‘나’는 고용인이고 에메렌츠는 피고용인이지만 정작 면접하는 것은 에메렌츠다. 그는 ‘나’와 남편의 평판을 듣고 일을 하겠노라 통고한 뒤 노동시간과 급료, 일하는 방식까지 전부 자신이 결정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선언한다. “누구의 것이든 더러운 속옷은 빨지 않아요.”

그렇다. 에메렌츠는 자기 기준에 철저하며 단호하다. 남의 시선이나 기분을 의식해 할 말을 못하거나 결정을 바꾸는 일은 없다. 남의 인정을 바라지도 않는다. 언제나 머릿수건을 쓰고 회색 옷을 입고 풀 먹인 아마포 수건을 사용하는 그만의 엄격함으로 사람들을 대한다. 늙었지만 튼튼한 몸으로 “자신이 맡은 모든 일을 흠결 없이 완수”하고, 아픈 이웃들에게 보양식을 제공하고, 갈 곳 없는 길고양이들에게 집을 내어주고, 겨울이면 밤이든 새벽이든 쉬지 않고 거리의 눈을 쓸었으나, 어떤 형태의 칭찬이나 사례도 거절한다. 그리고 남의 감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설을 퍼붓는다.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는 것이 중요”했던 ‘나’에게 에메렌츠는 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사람이다. 하지만 아픈 남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가 자신의 내밀한 고통을 보여주면서 둘 사이엔 깊은 우정이 자란다. 우정은 관계의 이상이다. 육체가 야기하는 맹목적인 끌림이나 핏줄이 주장하는 당위의 사랑이 아닌, 인간과 인간이 서로의 영혼에 감응할 때 피어나는 사랑이다. 종일 글쓰기에만 몰두하는 작가와 반인텔리주의자인 가사노동자는 서로 다른 가치관, 성격, 환경, 모녀지간 같은 나이 차를 뛰어넘어 우정을 나눈다. 그 모습에 나는 몇 번이나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나 즐겁고 신이 났다. 보는 것만으로도.

그러나 “에메렌츠를 죽인 것은 나였다”는 고백이 예고하듯 이야기는 비극으로 끝난다. 누구도 집 안으로 들이지 않던 에메렌츠가 ‘나’에게만 문을 열어주었을 때 비극은 시작되었으니, 그로 인해 에메렌츠의 삶도 우정도 파국을 맞는다.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문을 열어 자신의 속살을 보여준 사랑 때문에 그는 약해지고, 그를 걱정하고 구하려 한 사랑 때문에 ‘나’는 죽음을 부른다.

일찍이 에메렌츠는 말했다.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아요. 그러면 그 누군가를 도륙할 일도 없을 것이고, 그 대상 또한 열차에서 뛰쳐나갈 필요가 없겠지요(186쪽).” 자신 때문에 사랑하는 암소가 두 다리가 부러진 채 도륙당하는 것을 지켜본 어린 에메렌츠의 뼈아픈 깨달음이었다.

그래, 어쩌면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죄를 짓지도, 슬픔에 사무치지도 않도록. 그러나 사랑하지 않으려 문을 닫았던 에메렌츠가 ‘나’에게 문을 열었듯, 삶은 늘 다짐을 넘어 꿈꾸게 하고 그래서 사무치게 한다.

이 사무침을 〈도어〉는 통절한 참회의 기록으로 전한다. 자신이 부른 파국 앞에서 ‘나’는 비로소 자신이 사람의 일을 이야기하면서도 결국 자기 자신의 말에만 골몰한 지식인이었음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빗자루질을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있고 빗자루질을 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짓도 할 수 있다”라는 에메렌츠의 신념에 드리운 깊은 절망을 깨닫고, 거듭된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가 내어준 사랑이 있어 자신이 “자기 손으로 해야 할 일을 남에게 맡기고” 세상에서 빛나는 성취를 이루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사랑을 위해서는 죽일 수도 있어야 한다”는 에메렌츠의 가르침이 뜻하는 바를 뒤늦게 깨닫는다.

이 깨달음이 사무쳐서,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나는 책을 덮지 못했다. 나를 괴롭히던 분노와 원망, 탄식은 잊힌 지 오래였다. 비록 사람을 믿고 마음을 열고 다시 사랑할 용기를 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도어〉 덕분에 앞으론 절대 문을 열지 않겠다는 헛된 다짐은 버릴 수 있었으니, 이렇게 책에 기대어 또 한고비를 넘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씁쓸함은 남지만, 어쩌겠는가. 삶은 읽고 배우는 것으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제대로 살려면 제때 제대로 행동해야 한다. 생각이 아니라 행해야 한다. 온몸으로 온 마음을 다해.

기자명 김이경(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