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10일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접종받는 시민들. 3월 기준 중·저소득 국가들은 인구의 3분의 1에게 접종할 백신 물량밖에 구하지 못했다. ⓒEPA

코로나19 백신 완전접종률이 거의 60%에 도달한 이스라엘에서 방역 조치가 하나둘씩 완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코로나19 유행이 좀처럼 종식되지 않을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그중 하나가 바로 불평등한 백신 접근성이다.

‘부자 나라들(세계은행 분류에서 1인당 GNI가 1만2536달러 이상)’은 전 세계 성인 인구의 19%를 차지하지만 전 세계 백신 수량의 54%를 사들였다. 국제 비영리 보건기구 카이저패밀리재단(KFF)의 3월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부자 나라들은 자국 인구의 두 배를 접종시킬 만큼 물량을 확보한 반면(무려 245%) 중·저소득 국가들은 인구의 3분의 1에게 접종할 물량밖에 구하지 못했다. 특히 미국의 경우, 지난 4월 말 기준으로 약 7억명 분량의 백신을 확보했는데, 미국 인구는 모두 3억3000만여 명이다.

백신 불평등에는 대가가 따른다. 접종하지 못한 사람뿐 아니라 모두에게 말이다. 브라질 상파울루 대학 연구팀이 올해 1월 국제 과학 저널 〈사이언스〉에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지난해 6월 즈음 아마존 일대 마나우스 지역의 코로나19 감염률은 66%에 달했다. 이후 별다른 조치가 없이도 이 지역의 유행은 둔화되었다. 자연 감염에 의한 집단면역 효과로 추정되었다. 그런데 올해 1월 이 지역에서 다시금 유행이 일어났다. 대부분의 감염 사례들은 새로운 변이 바이러스에 의한 것이었다.

지구촌 어디에선가 유행이 지속되고 있는 한 변이 바이러스는 끊임없이 생겨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백신을 맞은 사람들도 결코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인권과 윤리 측면에서든 지극히 실용적인 측면에서든 가급적 많은 사람이, 빠르고 공평하게 백신을 접종할 수 있도록 만드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도 전 지구 차원에서.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을 위탁 생산하고 있는 경북 안동시 SK바이오사이언스 공장. ⓒ연합뉴스

백신 싹쓸이하는 부자 나라들

중·저소득 국가의 백신 공급을 늘리기 위해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안들이 논의되거나 시도되었다. 첫째, 백신을 빌려주거나 기부하는 방식이다. 실제로 미국은 캐나다와 멕시코에 나중에 갚을 것을 전제로 백신을 빌려주었고, 유행 상황이 심각한 인도에는 백신을 기부했다. 미국 바이든 대통령은 세계대전 당시 미국이 ‘민주주의의 무기고(arsenal)’라고 불렸던 것처럼 세계 ‘예방접종의 무기고’가 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이런 공여 행위는 미국인들이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은 다음의 일이다.

공동구매를 통해 물량을 사전 확보할 수도 있다. 지난해 4월,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백신연합(GAVI), 유행 대비 혁신연합(CEPI) 등이 주도해 백신의 공동조달과 공평한 분배를 위한 ‘코백스 퍼실리티(Covax Facility)’를 구축했다. 한국도 여기에 참여해서 일종의 ‘보증금’을 내고 백신 물량 일부를 확보했다. 코백스는 92개 중·저소득 국가 인구의 20%까지 접종할 수 있는 백신 물량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 이를 달성하려면 최소한 115억 달러가 필요한데 현재까지 85억 달러가 확보된 상황이다. 문제는 돈만이 아니다. “더 많은 펀딩이 필요하지만 그것은 해결책의 일부일 뿐, 살 수 있는 백신이 없다면 돈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의 지적이다. 부자 나라들은 국제사회와의 약속을 깨뜨리고 제약회사와 개별 계약해 백신을 싹쓸이하고 있다. 저소득 국가용으로 구입할 수 있는 백신의 절대 물량 자체가 부족한 상황이다. 코백스를 통한 백신 배분이나 개별 국가들의 자율 공여에만 맡겨둘 수 없음이 분명하다.

둘째, 생산에 필요한 물자 공급망의 개선이나 라이선스 계약, 기술이전, 생산 파트너십 등을 통해 공급을 늘리는 방법도 있다. 2021년 2월 현재 화이자와 노바티스, 아스트라제네카와 인도혈장연구소, 노바백스와 SK바이오사이언스 등 민간 부문에서 70건 이상의 라이선스 계약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렇게 개별 기업들의 재량에만 맡겨놓는다면, 이들이 의약품을 어디에서 얼마만큼, 어떤 가격에 공급할지 그저 관대한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백신 물량을 확보하기 위해 각국의 대통령들이 나서서 기업에 읍소하거나 압력을 넣는 상황이 이를 잘 보여준다.

사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19 유행 초기에 ‘코로나19 기술접근 풀(pool)’이라는 플랫폼을 구축했다. 제조업자들이 자발적으로 기술특허를 공유(pooling)해서, 보다 빠르게 그리고 널리 코로나19 관련 지식재산을 활용하자는 취지였다. 출범 당시 40개 이상 국가들이 지지를 표명했지만, 1년이 지나도록 이 플랫폼을 통해 자발적으로 특허를 공유한 기업은 하나도 없다. 이쯤 되면, 백신의 충분한 공급과 평등한 접근을 가로막는 결정적 걸림돌이 바로 지식재산권(intellectual property right)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지식재산기본법에 의하면 지식재산이란 “인간의 창조적 활동 또는 경험 등에 의하여 창출되거나 발견된 지식·정보·기술, 사상이나 감정의 표현, 영업이나 물건의 표시, 생물의 품종이나 유전자원(遺傳資源), 그 밖에 무형적인 것으로서 재산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는 것”을 지칭한다. 지식재산권은 “법령 또는 조약 등에 따라 인정되거나 보호되는 지식재산에 관한 권리”를 말한다. 예컨대 어떤 기업이 특정 의약품에 특허를 취득하게 되면 지식재산권 보호에 따라 20년 동안 독점적으로 이를 판매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의 판매를 승인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

국내에서 지식재산이나 지식재산권을 보호하는 개념과 체계가 만들어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지금 중장년 세대는 디즈니 사의 미키마우스 그림을 마음대로 옷에 새겨 넣거나 길거리 리어카에서 복제음반을 판매하던 시절을 기억할 것이다. 1995년 세계무역기구가 출범하고 한국도 가입하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외국인이 가진 지식재산을 함부로 활용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당시 체결된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에 관한 협정(TRIPS)’은 지식재산권에 관한 가장 포괄적이고 영향력 있는 국제협약이다. 이 협정과 관련된 가장 큰 우려는 의약품 접근권이었다. 지식재산권 보호가 값싼 복제(이른바 ‘제네릭’) 의약품 생산과 판매를 가로막아 저소득 국가 시민들의 건강권을 침해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단서 조건이 추가되었다. 저개발국가와 개발도상국가에는 TRIPS 적용에 차등적 유예기간을 부여하고,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는 ‘특허강제실시(compulsory licensing)’를 허용했다.

특허강제실시는 정부가 개입하여 특허권자의 허락을 구하지 않고 특허 내용을 제3자가 활용하도록 조치하는 것을 말한다. 특허를 빼앗거나 무효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다만 특허권자가 20년 동안 보유하는 독점적 생산·판매 권리를 축소하는 것이다. 긴급 상황인 만큼 다른 이도 그 특허를 활용해서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화를 생산할 수 있도록 허용하되 일정한 로열티를 특허권자에게 지불한다. 이는 비싼 ‘오리지널 의약품’을 구매하기 어려운 저소득 국가에서 의약품에 접근하는 유력한 대안이 될 수 있다. 실제로 HIV/에이즈 유행이 심각한 상황에서 브라질·인도·타이 등이 이를 활용했다. 캐나다와 프랑스·독일·이스라엘 역시 코로나 관련 의약품에 대해 특허강제실시를 용이하고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국내법을 개정해둔 상태다.

그런데 여기에 단서가 붙었다. 이렇게 생산한 복제 의약품을 수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의약품을 직접 생산할 역량이 없는 다수의 중·저소득 국가들은 특허강제실시를 발동해도 소용이 없다. 이런 비판 속에서 2001년 공중보건에 관한 도하(Doha) 선언이 나왔다. 자체 생산역량을 갖추지 못한 국가들도 다른 나라에서 특허강제실시로 생산한 복제의약품을 수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활용된 사례가 별로 없다. 2007년 르완다가 캐나다 제약사의 항바이러스 제제 복제약을 수입한 것이 지금까지 거의 유일한 사례다. 또한 특허강제실시를 발동한 국가들은 특허권을 보유한 국가의 보복 압력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그래서 실제 시행보다는 특허강제실시를 협상의 지렛대로 삼아 오리지널 의약품의 가격을 인하하는 데 활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4월29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국회 앞에서 코로나19 백신 특허권 유예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 ⓒ연합뉴스

기업 간 경쟁에서 인류와 바이러스의 경주로

상황이 이렇다 보니 코로나19 백신 공급을 확대하는 데 특허강제실시만으로는 효과를 발휘하기 어려워 보인다. 이에 따라 2020년 10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인도는 전 세계 다수 인구가 예방접종으로 충분한 면역을 획득할 때까지 코로나19 백신 관련 지식재산권을 ‘유예’하자고 세계무역기구에 제안했다. 지식재산권이 유예되면 다른 개발자들이 백신 기술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브라질·중국·인도·러시아·남아프리카공화국 등은 백신 제조 역량을 가졌지만 미국 등 특허 보유국 정부의 보복이 두려워 특허강제실시를 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과 인도 등은 독자적으로 mRNA 백신을 개발하고 있다. 기술이전이 좀 더 포괄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개발은 더욱 빨라질 것이다. 지난해 말까지 100개 넘는 국가들이 유예안에 지지를 표명했다. 세계무역기구 회원국 4분의 3 이상이 동의하거나 합의하면 유예안을 실행할 수 있다.

백신특허권을 보유한 소수의 선진국과 제약기업들은 유예안에 반대한다. ‘자발적 사용 허락이나 선진국들의 백신 공여면 충분하다’ ‘어차피 특허를 공유해도 중·저소득 국가에는 생산 역량이 없다’ ‘지식재산권 유예에 따른 국내법 개정 등 산적한 절차가 많기 때문에 오히려 시간이 더 걸리고 혼란만 초래된다’ 등이 이들의 주장이다.

지금의 현실은 이런 주장들이 타당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엄청난 액수의 공공자금과 수많은 과학자들의 협력이 없었다면 지금 같은 수준의 백신 개발은 불가능했을 터이다. 화이자, 모더나가 활용하고 있는 mRNA 백신의 핵심 기술은 1990~2000년대 초반 미국국립보건원 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펜실베이니아 대학 연구진에 의해 개발되었다. 그들의 작업 또한 공적 연구기금의 지원을 받은 학술 연구자 네트워크 덕분에 가능했다. 백신 개발기업들은 이미 충분한 보상을 받았다. 지식재산권 유예가 특허를 공짜로 사용한다는 이야기도 아니다. 개발 기업에 대한 합당한 수준의 보상은 지속될 예정이다.

저명한 개발경제학자 제프리 색스는 지난 4월 기고 전문매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칼럼에서 “지식재산권 유보와 관련한 찬반 주장에서 누가 옳은가에 대해 더 이상 의문의 여지가 없다”라고 결론 내리며 유예의 빠른 실행을 촉구했다. 그리고 지난 5월6일 지식재산권의 수호자로 자임해온 미국 정부가 유예안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백신 공여, 공급체계 개선을 통한 생산 증대, 특허의 자발적 사용허락과 기술이전, 특허강제실시, 지식재산권 유예 등은 동시에 상호보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지식재산권 유예가 실행된다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해결되지는 않는다. 기술이전은 물론 영업기밀과 노하우를 공유하고 물류체계, 제도적 기반 등도 마련해야 한다. 하지만 지식재산권 유예는, 인류가 직면한 공동의 위기 앞에서 건강과 생명을 이윤보다 우선시하겠다는 메시지를 던지는 상징적 사건이자, 다른 노력들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존 롤스는 정의의 원칙을 도출하는 과정에 ‘무지의 베일’이라는 가상적 상황을 설정했다. 아무도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계급상의 위치를 모르고, 어떤 소질·능력·지능·체력 등을 타고났는지 모르며, 심지어 가치관이나 심리적 성향까지도 모르는 ‘무지의 베일’에 갇혀 있을 때, 과연 어떤 정의의 원칙을 선택하게 될까? 백신이 남아도는 미국의 시민인지, 백신은 구경도 못해본 저소득국가의 보건의료 종사자인지, 중대한 기저질환이 있는지, 돈이 많은지 적은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나’는 어떤 백신 분배 정의를 선택할 것인가?

그 누구도 돈 있는 사람이 싹 쓸어가게 하자고 생각하진 않을 터이다. 롤스는 사람들이 이 상황에서 결국 두 가지 원칙을 채택하게 되리라 추정했다. 먼저 기본적인 권리와 의무의 할당에서 평등을 채택할 것이다. 그리고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허용하더라도, 그것이 모든 사람, 특히 사회에서 가장 혜택받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 불평등을 보상할 만한 이득을 가져오는 경우에만 정당하다고 결론내릴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조건에 처해 있는지 안다. 그래서 본인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 가끔씩은 자기 존재를 잊은 채 엉뚱한 선택을 하기도 한다. 예컨대 변변한 재산도 없는데 종부세 인상 소식에 화를 내고,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상속세 부담에 자신의 세금이 나가는 것처럼 노심초사한다. 실제로 지식재산권 유예와 관련된 인터넷 기사 아래에는 다국적 제약회사의 잠재적 손실에 대한 진심 어린 걱정, 국내 바이오산업의 백신시장 진출에 대한 기대, ‘이제 우리나라는 백신 걱정 안 해도 되느냐’는 댓글들이 달리고 있다. 이것이 과연 무지의 베일에서 우리가 선택하게 될 정의의 원칙에 합당한지 생각해볼 일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열린 제73차 세계보건총회 기조연설에서 백신과 치료제 개발에서의 국제협력을 강조했다. 백신과 치료제에 대해 ‘공공재’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지금도 지식재산권 유예에 대한 의견을 밝히지 않았다. 과학 학술지 〈네이처〉의 논설(2021년 4월1일, 제592호)은 “팬데믹은 지식재산권을 둘러싼 기업들 간의 경쟁이 아니라 인류와 바이러스의 경주다”라고 표현했다.

인류는 장애물달리기 단체전을 치르는 중이다. 지식재산권 유예가 실행에 옮겨진다면 겨우 하나지만, 그래도 커다란 장애물 하나를 넘은 것이 된다. 결승점은 아직 멀다. ‘끝까지 함께’ 가야 한다.

기자명 김명희 (시민건강연구소 상임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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