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반올림’에 합류한 초보 변호사 임자운(위)은 굵직한 산업재해 소송을 맡으며 깨달았다. 선례가 없어 누구에게도 조언을 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시사IN 신선영

임자운 변호사(41·법률사무소 지담)가 삼성과 5년 넘게 이어오던 소송전이 ‘일단락’되었다. 소송의 구체적 상대는 고용노동부 또는 중앙행정심판위원회였지만 실질적 상대는 삼성이었다. 지난 4월19일, 비슷비슷한 제목의 기사 20여 개가 쏟아졌다. ‘대법, “삼성전자 반도체 작업환경 보고서 일부만 추가공개”(〈연합뉴스〉).’ 그뿐이었다. 4월28일 이건희 회장 유족이 사재 출연 계획을 발표하면서, 세상의 시선은 온통 삼성 일가가 납부할 상속세와 ‘사회 환원’의 규모에 쏠렸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측정보고서(이하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소송’은 결론만 언급하고 넘어갈 종류의 사건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글쓰기를 좋아하던 법대생 임자운은 원래 기자를 동경했다.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대표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시민단체 ‘민주언론시민연합’에서 1년 동안 언론 감시 활동도 했다. 사법고시를 준비하며 슬럼프에 빠졌다가,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에서 일하면서 공익소송에 관여하는 일이 더없이 재미있다는 걸 알게 됐다. 2010년 서른 살에 사법고시에 합격하고 사법연수원 42기 인권법학회장을 맡았다. 사법연수생들이 비영리 변호사를 십시일반으로 지원하는 ‘낭만펀드’를 만들었고, 의도치 않게 자신이 수혜자 중 한 명이 되었다. 2007년부터 삼성 반도체 직업병을 공론화해온 시민단체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에 들어갔다.

2013년 3월 반올림에 합류한 ‘초보 변호사’는 같은 해 5월 굵직한 산업재해(산재) 소송 3건을 맡게 된다. 삼성 반도체 공장 또는 LCD 공장에서 일하다 희귀질환인 다발성경화증이나 난소암에 걸린 피해자들이었다. 이전까지 삼성 반도체 공장의 산재는 백혈병 등 혈액암과 유방암 정도만 인정되었는데, 병의 종류는 물론 사업장도 ‘반도체 공장’을 넘어 ‘LCD 공장’으로 넓히는 소송이었다. 막막하고 겁이 났다. 선배 변호사에게 조언을 구하고 자료를 보다가 깨달았다. ‘누구한테 배울 수 있는 게 아니구나. 선례가 없으니까.’

현행 산재보험 제도에서는 작업환경과 질병의 인과관계를 노동자 쪽이 입증해야 한다. 첨단산업의 희귀질환 산재 인정 싸움은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질병의 원인 자체가 의학적으로 명확히 규명되어 있지 않았다. 무엇보다 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작업환경 내에서 어떤 해로운 물질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를 증명해야 하는데, 이를 알 수가 없었다. 이 데이터를 직접 측정한 유일한 정보가 있기는 하다. 작업환경 보고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인체에 해로운 물질을 쓰는 사업주가 정기적으로 작업환경 측정 결과를 노동자에게 알리고, 노동부에도 보고해야 한다고 규정해놓았다.

그런데 산재 소송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일부 공정이나 유해물질이 누락된 ‘발췌·편집본’을 제출할 뿐, 작업환경 보고서 전문을 제출하지는 않았다. 삼성뿐 아니라 노동부도 보고서 제출을 거부하거나 발췌·편집본만 내놓았다. ‘삼성이 보고서가 영업비밀이라고 주장한다’는 이유였다. 임자운은 이렇게 말했다. “질병과 업무의 관련성을 입증할 책임은 노동자 쪽에 있는데, 입증할 수단은 없어요. 회사를 그만둔 피해자들에게 자료 요구권이 있나요, 현장 출입 권한이 있나요? 거의 유일한 수단이 작업환경 보고서인데 이건 공공기록입니다. 회사가 영업비밀이라 주장할 수는 있어도 그에 대한 판단은 노동부가 해야 하는데, 소송 과정에서 법원이 제출 명령을 내려도 노동부가 거부하는 상황이었어요. 법원 판결이 나오지 않고는 노동부의 태도가 바뀌기 어렵다고 봤습니다.”

영업비밀이라 경쟁력 약화된다?

2014년 10월,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사망한 이범우씨의 아내가, 남편이 근무한 기간의 온양공장 작업환경 보고서에 대해 정보공개를 청구했다. 대전지방고용청은 보고서가 영업비밀이라는 삼성 쪽 주장을 받아들여 전부 비공개하기로 결정했다. 2016년 1월 임자운 등은 유족을 대리해 정보공개거부처분 취소 소송을 제기했다. 2017년 3월 대전지방법원은 작업환경 보고서가 삼성전자의 영업비밀이 맞다며 피고 쪽 손을 들어주었다. 보고서가 공개되면 삼성전자의 반도체 생산방법에 관한 기술적 노하우가 유출돼 삼성전자의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고 했다.

경기도 화성에 위치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15라인의 내부 전경. ⓒ삼성전자 제공

2018년 2월 나온 대전고등법원의 결론은 달랐다. 작업환경 보고서만으로는 “피고(대전지방고용청)가 우려하는 정보까지 알려지게 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라고 판단했다. 영업비밀이 아니라는 얘기다. 재판부는 재판 과정에서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되면 영업비밀이 유출되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인 한국산업보건학회에 사실조회를 의뢰했다. 대전지방고용청(그리고 삼성)은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되면 각종 ‘정보’를 확인하거나 유추할 수 있어 영업비밀이 빠져나간다고 주장했다. 그 정보란 이런 것이다. ‘공정에 배치된 설비 기종·보유 대수·생산능력·설비 배치, 공정 자동화를 통한 인건비 절감 효과, 공정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사용량·구성 성분 등.’

한국산업보건학회는 작업환경 보고서에 위 정보가 기록되지 않는다고 답했다. 작업자 수는 기록되지만 인건비나 인력의 질은 보고서로는 알 수 없다. 화학물질의 경우 사업주가 영업비밀을 주장하려면 법적으로 보호받기 때문에, 보고서에 기록되지 않을 뿐 아니라 측정자도 알 수가 없다. 위 정보들이 적혀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보고서만으로 ‘유추’할 수도 없다고 산업보건학회는 회신했다. 예컨대 작업환경 측정은 단위 작업이 아니라 유사한 노출 환경을 중심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공정별 인원수 추정이 불가능하다.

보고서 공개 시 기업의 피해는 불확실한 반면, 비공개 시 노동자의 피해는 뚜렷하다고 대전고법은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렇게 쓴다. “측정 위치도가 있어야만 원고(유족)는 해당 사업장 내의 어느 곳에서 어떠한 유해 인자들이 노출 가능하고 실제로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알 수 있게 되는바, 이는 근로자의 생명·신체·보건과 직결된 정보로서 공개되어야 할 필요성이 매우 높다.” 재판부는 보고서에서 근무자 이름을 제외한 모든 정보를 공개하라고 판결했다.

임자운은 “기대 이상의 판결”이었다고 회상했다. 2심 재판 과정에서 노동부는 이미 작업환경 ‘측정 대상 유해 인자’와 그 측정치를 공개하겠다고 태도를 전향적으로 바꾸었다. 대전고법 판결 이후인 2018년 3월, 노동부는 작업환경 보고서를 적극 공개하도록 지침을 바꿨다. 반올림 측의 정보공개 청구를 받아들여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의 작업환경 보고서도 공개했다.

‘반격’이 시작된 건 그 직후였다. 삼성전자는 작업환경 보고서가 공개될 경우 반도체 생산의 핵심 노하우가 중국 등 해외 경쟁사로 유출된다고 주장했다. 대전고법이 받아들이지 않은 논리다.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산업통상자원부(산자부)를 끌어들일 줄은 몰랐어요.” 임자운이 말했다. 삼성전자는 산자부에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보고서가 ‘국가 핵심기술’을 포함하고 있는지 판정해달라고 요청했다. 2018년 4월 산자부 산하 산업기술보호위원회 반도체전문위원회는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작업환경 보고서 중 일부, 구체적으로는 ‘측정 위치도, 부서/공정명, 단위작업 장소, 화학물질명(상품명), 월 취급량’이 국가 핵심기술에 해당한다고 판정했다. ‘산업 전문가’들로 이뤄진 반도체전문위원회의 명단은 공개되지 않는다.

2018년 7월, 이 판정을 근거로 중앙행정심판위원회는 고용노동부 경기지청이 내린 삼성 기흥공장 작업환경 보고서 공개결정을 취소했다. 2018년 10월 반올림은 이 결정을 취소하라는 소송을 제기한다. 작업환경 보고서 싸움의 ‘2라운드’였다. 소송을 이어가던 임자운은 법정에서 삼성 쪽 변호사가 이런 말을 하는 걸 듣게 된다. “이 보고서의 공개 논란은 입법적으로 해결되었습니다.” 찾아보니 사실이었다. 2019년 8월, ‘산업기술보호법(산업기술의 유출 방지 및 보호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었다. “국가기관 등은 국가 핵심기술에 관한 정보를 공개해서는 안 된다”라는 조항이 새로 생겼다(제9조의 2). 법이 통과된 당시는 일본과의 무역분쟁이 고조되던 시기다. 법은 한 명의 반대표도 없이 국회를 통과했다.

“두 가지 예상이 다 빗나갔어요. 하나는 산자부가 국가 핵심기술이라고 판정하지 않을 거라고 봤는데 해버렸어요. 삼성이 보고서를 감추려는 의도가 뻔한 상황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이었죠. 다른 하나는 법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만약 보고서가 국가 핵심기술로 판정되더라도 정보공개법은 ‘생명·신체·건강 보호’를 더 중요한 가치로 두고 있고, ‘산업기술보호법’ 어디에도 ‘국가 핵심기술이면 비공개해야 한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에 싸울 수 있다고 봤는데 그사이에 법이 바뀌었어요. 삼성이 법을 이렇게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것도 아무도 모르게.” 2019년 11월, 임자운은 부랴부랴 규탄 기자회견을 열었다. 2020년 1월에는 토론회도 했다. 2020년 2월, 서울행정법원은 삼성 반도체 기흥공장 보고서는 영업비밀이 맞다고 피고(중앙행정심판위원회) 쪽 손을 들어주었다. 산자부의 국가 핵심기술 판정을 뒤집을 근거가 없다고 했다.

반올림은 항소했다. 작업환경 보고서만으로는 공정 배치를 유추할 수 없어 영업비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설령 다른 정보로 공정 배치 일부를 유추할 수 있더라도 ‘공정명’은 이미 널리 알려진 정보인 데다, 공정명만으로 공정 배치를 유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적어도 공정명만은 공개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소송 과정에서 정한 일종의 ‘마지노선’이었다.

예비 입사자에게도 중요한 ‘공정명’

2020년 12월, 서울고등법원은 작업환경 보고서 속 여러 정보 중에서 ‘공정명’은 영업비밀이라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반올림의 주장을 인정한 것이다. “라인, 층, 베이(Bay·작업공간) 정보를 제외한 공정명만을 공개할 경우 다른 정보와의 조합 가능성이 없고, 공정명만으로는 공정의 순서와 면적의 배치 등을 계산하기도 어려워, 경쟁 업체로서는 참가인(삼성)의 공정 배치 방식을 유추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은 이 정보 역시 영업비밀이라 주장했으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설령 라인, 층, 베이 정보를 제외한 공정명만으로 개략적인 공정 순서를 파악할 수 있더라도 그런 정도의 정보가 기술적 노하우는 아니라고 봤다. 반올림으로서는 가까스로 얻은 일부 승소였다. 양쪽이 모두 상고했으나 2021년 4월, 대법원이 상고를 모두 기각하면서 해당 판결이 확정되었다.

“더 다투지 못한 점은 아쉽지만 최악은 피했다 싶었어요. 적어도 공정명만은 국가 핵심기술 판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는 것, 그것이 이번 판결의 의의라고 생각해요.” 임자운은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백혈병으로 숨진 황유미씨는 식각·확산 공정에서, 난소암으로 사망한 이은주씨는 와이어 본딩이라는 공정에서 일했어요. 피해자마다 일한 공정이 다르고, 공정에 쓰이는 화학제품도 노출되는 유해물질도 달라요. 그런데 공정명을 감춰버리면 전체 공장에서 나오는 유해물질을 알 수 있을 뿐 재해를 입은 노동자가 자신이 일한 공정에서 어떤 물질에 얼마나 노출되었는지를 알 수 없게 되어버려요. 산재 입증 자료로 중요할 뿐 아니라 퇴직자나 예비 입사자의 산재 예방 차원에서도 공정명은 필요해요. 자신이 일했거나 일할 공정의 위험성을 알 수 있어야 하니까요. 마지막으로 사회적 감시를 위해서도 공정명은 공개되어야 해요. 삼성이 화학물질을 기준치 이내로 관리하고 있는지, 그 이전에 산안법상 작업환경 측정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요.”

2014년 3월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의 7주기를 맞아 ‘반올림’ 회원들이 서울 명동에서 플래시몹을 펼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임자운이 지난한 산재 소송 과정에서 벽에 부딪혔을 때, 사법연수원 교재의 문구가 구원처럼 눈에 들어왔다. ‘업무와 질병의 상당인과관계 입증을 위해서 반드시 의학적 감정을 요하는 것은 아니다.’ ‘업무상 재해 여부 판정의 본질은 해당 사안이 업무상 재해보상제도를 적용하여 구제할 만한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학 판정이 아니고 법률 판단이다.’ 병으로 시력을 잃어 앞이 보이지 않고, 지팡이 없이는 걸을 수도 없는 피해자가 참석한 법정에서 임자운은 이 내용으로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렇게 2017년 8월 삼성 LCD 공장 근무자의 다발성경화증을 산재로 인정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대법원은 첨단산업의 희귀질환 관련 연구 결과가 충분하지 않다고 해서 업무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쉽게 부정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뿐 아니라 사업주가 협조를 거부하거나 관련 행정청이 조사를 지연시켜 작업환경의 유해성을 입증하기 어려웠다면, 이는 노동자에게 유리한 간접사실로 고려할 수 있다고 했다.

임자운은 앞으로 반도체 공장의 자료 공개가 직업병 인정 차원을 넘어서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포토 공정에서 백혈병 피해자가 나오면 근로복지공단이 역학조사도 안 하고 바로 산재를 승인해요. 이전과 비교하면 큰 성과죠. 그런데 반도체 건강권 싸움은 산재 보상 이전에 예방이 핵심이에요. 소송 과정에서 확실히 안 게 있다면, 반도체 산업의 안전문제를 기업에 맡겨둬선 안 된다는 거예요. 저희가 2017년 소송을 통해 받아낸 ‘안전보건진단 보고서’를 보면 전문가들이 이렇게 판단해요. ‘삼성이 안전 투자를 많이 하긴 하는데, 엉뚱한 곳에 한다.’ 외부 전문가들이 삼성 작업장 안전에 관여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려면 자료 공개 범위를 넓혀서 알 권리를 보장해야 합니다. 본싸움은 이제 시작이에요.”

2021년 2월17일 현재까지 총 156명이 반올림을 통해 산재를 신청했다. 이 중 48명은 근로복지공단에서, 23명은 법원에서 산재를 인정받았다. 41명은 산재 신청을 진행 중이다. 반올림은 2020년 3월 개정 산업기술보호법이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알권리와 건강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영업비밀을 보호받을 기업의 권리와, 생명·신체·보건과 직결된 정보를 알아야 할 노동자의 권리를 어떻게 조화롭게 보장할 수 있을까. 소송이 던지는 질문은 가볍지 않다. 그래서 이 사건은 결론만 공유될 수 없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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