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9일 독일 녹색당 총리 후보로 지명된 아날레나 베르보크 공동대표. ⓒEPA

4월19일 독일 녹색당은 아날레나 베르보크를 총리 후보로 공식 발표했다. 녹색당의 역사에서도 독일 정치사에서도 의미 있는 한 걸음이다. 이번 총리 후보 지명은 오는 9월26일 실시되는 총선을 앞두고 이루어졌다. 내각제 국가인 독일에서는 새로운 정권을 창출할 가능성이 있는 정당이 총선 이전에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전통이 있다. 어떤 인물이 총리가 될 것인지도 선거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현실적으로 총리를 배출할 가능성이 있는 양대 정당인 기독민주당·기독사회당 연합(기민·기사당 연합)과 사회민주당(사민당)에서만 주로 총리 후보를 지명해왔다. 녹색당이 총리 후보를 지명한 것은 처음이다. 선거 이후 녹색당이 연정을 주도하고, 더 나아가 총리까지 배출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점점 무르익고 있다.

1980년 창당한 녹색당은 오랫동안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당으로 간주되었다. 지지층을 확대하는 데도 한계가 있어 보였다. 하지만 현재 녹색당은 기민·기사당 연합이나 사민당처럼 연령이나 사회계층과 상관없이 폭넓은 지지를 받는다. 녹색당은 2018년 10월 이래로 2021년 총선의 지지 정당을 묻는 설문조사에서 대부분 2위를 차지하고 있다. 2019년 중반에는 기민·기사당 연합을 누르고 1위에 오르기도 했다. 녹색당은 2019년 5월의 유럽의회 선거에서 득표율 20.5%를 기록하며 사민당을 밀어내고 2위를 기록했으며, 최근 주의회(지방의회) 선거에서도 연이어 좋은 결과를 거두었다.

기후변화 대응과 에너지 전환이 독일 사회의 핵심 가치로 자리 잡은 것이 녹색당 성장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독일의 탈핵 결정, 갈수록 뚜렷해지는 기후변화, 자동차 기업들의 디젤 스캔들, 젊은 층의 기후위기 대응 시위인 ‘프라이데이 포 퓨처(Friday for Future)’ 같은 경험이 이런 변화를 이끌어냈다. 2019년 6월 “어떤 정당이 미래를 위한 대안인가?”라는 질문의 여론조사에서 녹색당은 27%의 지지를 받으며 2위인 기민·기사당 연합(12%)을 멀찍이 따돌렸다. 같은 조사에서 사민당은 겨우 2% 지지를 받았을 뿐이다.

2018년 1월 아날레나 베르보크와 로베르트 하베크가 공동 당대표가 되면서 외연을 확장한 점 또한 지지도를 높인 요인으로 평가받는다. 두 사람이 녹색당 대표로 있는 동안 당원 수가 70% 증가했으며, 지금까지 당이 거리를 두었던 경제단체나 노동조합 같은 사회 단위와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또한 두 사람은 빈곤 문제나 경제성장, 안보같이 그동안 녹색당의 주요 의제가 아니었던 분야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있다. 지난해 11월20~22일, 대의원 800명이 참석한 전당대회를 통해 채택된 새로운 강령은 이러한 외연 확장 노력의 결정판이다.

새로운 강령의 제목은 ‘존중하고 보호한다’이다. 독일 헌법인 기본법 제1조 1항의 ‘인간의 존엄은 불가침하며 이를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은 국가 공권력 전체의 의무이다’에서 따왔다. 제목에서부터 독일 전체를 주도하는 정당으로 도약하려는 녹색당의 야심이 엿보인다. 부제는 ‘변화가 안정을 만든다’이다. 녹색당이 요구하는 변화가 지나치게 급진적이며 기후위기나 환경문제만 앞세운 채 인간의 욕구나 필요를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한 것이다. 내용 면에서도 새로운 강령의 특성을 살필 수 있다. 예를 들어 강령 1장에서는 ‘삶의 기반을 보호한다’라는 소제목으로 기후, 에너지 전환 같은 녹색당 고유의 의제에 주거(住居)나 사회정의 같은 현실적 필요를 함께 묶었다. 2장에서는 ‘미래를 경영한다’라는 소제목으로 사회적이고 생태적인 시장경제의 발전 가능성을 담았다.

녹색당 성장의 배경에는 탈핵, 기후변화 등의 요인이 있다. 오른쪽은 독일 복스베르크 석탄 화력발전소 풍경. ⓒEPA

녹색당은 새로운 강령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거대한 정치 이벤트로 삼았다. 새 강령에 대한 논의는 이미 2018년 4월에 시작했다. 2019년 3월까지 진행된 강령에 대한 인터넷 토론에는 1000명이 넘는 당원이 참여했다. 이를 바탕으로 강령의 초안을 마련했다. 2019년 4월부터 11월까지는 인터넷 참여 시스템을 통해 강령의 초안에 대한 청원 314개가 접수되었다. 또한 100곳 이상의 시민단체와 비영리 기구를 통해 중간 보고서에 관한 평가를 받았으며 가을에는 공동 토론회도 진행했다. 이 모든 과정은 언론을 통해 보도되었다.

경험 부족이 오히려 강점

올해 4월19일 녹색당의 총리 후보 발표 행사에서 베르보크는 “모두가 독일을 더 좋은 미래로 이끄는 데 함께하자”라며 자신을 독일 전체를 위한 총리 후보로 소개했다. 그는 기후위기 대응이 새로운 정부의 핵심 과제라는 점을 명확히 하며 다음과 같이 포부를 밝혔다. “독일이 향후 10년의 도전 앞에서 좋은 결과를 얻으려면 새로운 시작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지원하고 사람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사람을 신뢰하는 정치를 하겠다.” 베르보크가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확정되자 독일 언론은 그의 이력과 선거 경쟁력에 대해 자세히 다루었다.

1980년생인 아날레나 베르보크는 독일 함부르크 대학에서 정치학과 공법을, 영국 런던 정경대학에서는 국제법을 전공했다. 2005년 녹색당에 입당한 그는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같은 당의 엘리자베트 슈뢰터 유럽의회 의원의 사무실에서 정치 이력을 시작했다. 베르보크는 2009년부터 2013년까지 녹색당 브란덴부르크주 대표를 맡았고, 2013년부터 지금까지 연방의회 의원으로 활동 중이다.

베르보크는 2018년 1월 하베크와 함께 녹색당의 당대표가 되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그는 하베크에 비해 당 내부와 외부에서 인지도가 매우 낮았지만 남성 대표를 보조하는 여성 대표에 머물지는 않을 것이라며 권력에 대한 의지를 드러냈다. 비록 인지도는 낮았을지라도 그는 녹색당뿐만 아니라 다른 정당의 정치인들에게도 기후 전문가로서 실무 지식이 풍부하며 문제해결에 집중할 줄 알고 협상을 진행하는 능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베르보크의 이런 특징은 기민·기사당 연합의 메르켈 총리와 유사하다고 여겨진다.

베르보크는 당대표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는 데도 성공했다. 하베크보다 많이 뒤졌던 대중적 인지도를 끌어올렸고, 특히 총리 후보 결정 직전에는 녹색당 지지층에서 하베크보다 높은 지지를 받았다. 하베크는 결코 만만한 정치인이 아니다. 그는 2019년 메르켈 총리를 제치고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뽑히기도 했고, 모든 정당의 총리 후보군을 통틀어 가장 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적도 있다. 이런 점들을 고려한다면 베르보크의 성장은 매우 놀랍다. 결국 베르보크와 하베크는 합의를 거쳐 베르보크를 녹색당의 총리 후보로 결정했다.

언론은 베르보크가 40대 여성이며 두 딸의 엄마라는 사실 또한 강점으로 분석했다. 기민·기사당 연합의 총리 후보인 아르민 라셰트나 사민당의 올라프 숄츠는 60대 남성이다. 주간지 〈슈피겔〉은 베르보크가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두 후보는 낡은 이미지가 있다고 평가했다. 베르보크의 유일한 단점으로 꼽히는 것은 경험 부족이다. 다른 두 후보는 풍부한 내각 참여 경험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슈피겔〉은 경험 부족이 베르보크의 발목을 잡지는 않으리라고 분석했다. 앞으로 독일 사회가 마주할 도전이 지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라면 경험이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2019년 3월, 독일 뒤셀도르프 카니발 축제에 기후위기 대응 시위를 이끈 그레타 툰베리 모형이 등장했다. ⓒAP Photo

〈슈피겔〉이 의뢰해 4월20~21일 실시된 총리 선호 여론조사에서 베르보크는 30.2%를 얻어 각각 12.6%와 16.1%를 기록한 기민·기사당 연합의 라셰트, 사민당의 숄츠와 큰 격차를 보이며 1위를 차지했다. 베르보크는 경제지 〈비르트샤프츠 보헤〉의 의뢰로 실시된 총리 후보 지지 여론조사에서도 26.5%로 1위에 올랐다. 한편 베르보크가 총리 후보로 지명된 한 주 동안 녹색당의 당원 가입자가 2000명을 넘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동안 주당 150~300명이 당원 가입 신청을 했던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유럽중앙은행 총재도 지지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 총재가 금리 관련 공식 기자회견에서 베르보크의 총리 후보 지명을 환영하는 발언을 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라가르드는 베르보크가 기후위기와 환경오염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고 있으며, 자신도 이런 주제에 크게 공감한다고 밝혔다. 라가르드는 총재 취임 이후 유럽중앙은행을 기후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은행으로 만드는 것이 자신의 목표 중 하나라고 밝힌 바 있다. 그는 베르보크의 경험이 부족하다는 일반적 비판에 대해서도 백발에 고령이 정치를 위한 조건이나 능력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라며 베르보크에게 지지를 보냈다.

녹색당은 4월24일 발표된 연방의회 선거 지지 정당을 묻는 주간 여론조사에서 28%로 1위를 차지하며 첫 총리 탄생의 기대감을 높였다. 녹색당의 지지율은 그 전주보다 6%p 상승했다. 반면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은 각각 2%p의 지지율 하락을 보이며 27%와 13%로 2위, 3위를 기록했다.

설문조사를 의뢰한 일간지 〈빌트〉에 따르면 베르보크의 총리 후보 지명 이후 녹색당은 기민·기사당 연합과 사민당뿐 아니라 좌파당과 무당층 지지자들의 표까지 흡수한 것으로 보인다. 〈빌트〉는 녹색당이 현재 중요 정치 의제들을 선도하고 있으며, 베르보크가 다른 경쟁 후보들보다 강하다는 점을 녹색당 선전의 원인으로 분석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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