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이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을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여성가족부가 4월27일 발표한 ‘제4차 건강가정기본계획’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96쪽짜리 문서에 ‘저출산’이라는 표현이 한 번도 쓰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저출산’은 최근 10년 동안 모든 정부 문서에서 가장 많이 쓰인 표현 중 하나다. 재정정책, 노동정책, 주거정책 무엇이든 공무원들은 일단 ‘저출산 대책’이라는 표현을 습관처럼 사용해왔다. 이번 건강가정기본계획에서도 물론 출산율 제고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다. 하지만 향후 5년 가족정책 총론을 이야기하면서 ‘저출산’을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가족계획의 방향을 크게 전환하려는 정부의 노력이 담겼다고 볼 수 있다.

건강가정기본계획(이하 기본계획)은 ‘건강가정기본법’에 따라 여성가족부 장관이 정부의 의견을 모아 수립하는 5년 단위 가족정책 계획이다. 2006년도 1차 계획을 시작으로 이번에 제4차 계획을 발표했다. 초기 기본계획은 ‘정상가족’ 내에서의 가족구성원 사이 평등과 행복에 초점을 맞췄으나, 회차를 거듭하며 점차 ‘다양한 가족구성권’ 담론을 수용하는 형태로 발전했다.

2006년 1차 계획의 핵심 비전은 ‘가족 모두 평등하고 행복한 사회’였다. 특정한 모습의 ‘정상가족’이 정책에 전제된 채로, 그 정상가족 내에서 어떻게 평등을 이룰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다. 2011년 2차 계획에서도 방향을 유지한 채, 남녀 간 육아·가사 분담과 사회적 지원에 초점을 모았다.

2016년 제3차 기본계획은 ‘모든 가족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가족 형태에 따른 차별 해소와 위기 가족 지원을 강조했다. ‘한부모가족’ ‘조손가족’ ‘다문화가족’ 등 유형별로 ‘취약 가족’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여기서 ‘다양한 가족’은 여전히 혼인·혈연 가족 내에서의 다양성을 넘지 못했다. 3차 기본계획에서 ‘동거 가족에 대한 차별 해소’가 아주 짧게 언급되었으나, 모두 알다시피 이렇다 할 정책적 실천은 뒤따르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 취임 후 2018년 ‘3차 기본계획 보완’에서는 가족 다양성이 좀 더 강조되었다. 동거·비혼 가구 등에 정책 구체화를 느린 속도라도 진행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일환으로 여성가족부는 2019년부터 매해 ‘가족 다양성에 대한 인식 조사’를 진행했다.

2020년 조사에 따르면 ‘혼인·혈연관계가 아니어도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면 가족’이라는 항목에 국민 69.7%가 동의했다. 비혼 동거에 대해서도 67.0%가 동의했고, 50대 이하 모든 세대에서 과반이 동의했다. 혼인과 혈연관계가 아닌데 생계와 주거를 공유하는 사이에 대한 권리보호는커녕 관계를 지칭할 만한 법적 정의조차 없었으니 국민의 가족 인식과 법·제도 간 괴리가 이리 컸던 것이다.

제4차 기본계획은 드디어 ‘가족 다양성 포용’을 1순위 과제로 올렸다. 3차까지 기본계획은 ‘정상가족’이라는 전제를 숨긴 채 ‘다양한 가족’을 부수적 과제 정도로 다뤄왔다. 그러나 4차 기본계획에서는 1번 정책과제를 ‘세상 모든 가족을 포용하는 사회기반 구축’으로 정하고, 소과제 1-1은 ‘가족 다양성을 수용하는 법·제도 마련’, 1-2는 ‘가족 다양성 인식과 평등한 가족문화 확산’으로 정했다. 참고로 3차 기본계획의 1번 과제는 ‘가족관계 증진을 위한 서비스 기반 조성’이었다.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정부가 공식적으로 혈연·혼인으로 한정된 현행 민법상 가족의 한계를 인정했다는 것이다. 정부는 법률혼·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이 경직되고 협소해 다양한 가족을 포용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우리 법체계는 ‘민법’에서 혼인과 혈연으로만 가족의 범위를 정하고, ‘건강가정기본법’에서 이를 인용해 가족정책의 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

실현되면 가족법 역사 뒤집는 일

실제로 같이 생활하는 ‘가족생활’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혈연과 혼인으로만 가족을 보면서, 다양한 동거 가구들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한편, 부양의무제와 일명 ‘구하라법’처럼 핏줄만 가족일 때 생기는 권리와 책임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정부는 포용되지 못한 가족의 예시로 ‘아동학대 등으로 가족정책 차원에서 지원 필요성이 증대된 위탁가족, 동거·사실혼 부부, 특히 돌봄과 생활을 함께하는 노년의 동거 부부’ 등을 들었다.

비혼 출산으로 화제가 된 방송인 사유리 씨와 그의 아들. ⓒ사유리 인스타그램 갈무리

특히 3차 기본계획이 현행법의 틀을 유지한 채 소폭의 개정 또는 적극적 해석에 머물렀다면, 4차 기본계획에서는 현행법의 근본적 한계를 인정하고 적극적인 입법에 나서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정부는 가족 관련법에서 ‘가족의 정의’ 규정을 개정하고, 결혼제도 밖의 다양한 가족구성을 보장하면서 생활·재산 등 권리보호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민법상 가족의 범위 규정(법 제779조) 개정 필요성 검토’라고 짧게 언급된 한마디는, 정말로 실현된다면 한국 가족법의 역사를 아예 뒤집는 일이 될 것이다. 상속·친권 등을 모두 건드리기 때문이다. 다만 여성가족부가 담당하는 건강가정기본법상 가족의 정의는 확실히 개정하겠다고 선언한 반면, 법무부가 담당하는 민법에는 ‘필요성 검토’라는 단서를 남겨 민법 개정을 둘러싼 험난한 다툼을 예고하고 있다.

〈외롭지 않을 권리〉에서 주장한 ‘생활동반자법’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4차 기본계획에서는 ‘서로 돌보는 대안적 가족관계의 권리보호를 위한 제도 마련 검토 및 논의 추진’이 포함되었다. 구체적 내용으로 ‘가족관계의 정의 및 권리보호의 내용, 당사자 간 관계 성립과 해소, 인적·재산적 효력, 관계 등록과 증명에 관한 사항 등’을 규정하고, 유족급여·보상, 공공 주거지원 등에서도 언급한다. 별도로 가족폭력처벌법 등을 개정해 비혼 동거 등 친밀한 관계 사이의 범죄에 대해서도 확대할 필요성을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생활동반자법’이라는 표현을 정확히 사용하지는 않았으나, 이런 방향은 생활동반자법의 내용과 유사하다. 정부가 책을 읽고 아이디어를 얻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외롭지 않을 권리〉를 함께 읽고 소통해주신 많은 독자들 덕에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4차 기본계획에서는 이러한 제도에 대해 ‘검토 및 논의 추진’이라고 여지를 남겼다. 생활동반자법 입법이 중요한 한 발을 뗐지만 역시 어려운 과정이 남아 있음을 추측하게 한다.

제4차 기본계획은 혼인·혈연으로 한정한 기존 가족정책의 실패를 정부 스스로 인정한 것이다. 수조 원을 들여 질리도록 ‘결혼해라’ ‘애 낳아라’ 소리를 했지만 전혀 소용이 없었다. 한국인들은 부양·혼인·출산 등 어떤 방식으로든 가족과 함께 사는 삶을 점차 포기하고 있다. 출산율 0.8명대는 전쟁 등을 제외하면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을 통틀어 가장 낮은 수치다.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즐거움’을 잃었고, 국가는 공적 돌봄을 늘려도 도무지 채울 수 없는 커다란 돌봄 공백에 빠져 허우적댄다.

특히 코로나19는 ‘같이 사는 사람’ 수준에서의 돌봄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여실히 드러냈다. 정영애 여성가족부 장관은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가족의 개인화·다양화·계층화가 더욱 심화되리라 예상된다며 기본계획의 배경을 설명했다. 그간 각종 사회서비스, 종교단체, 떨어져 사는 가족, 시장 등에 의해서 겨우 버티던 돌봄의 공백이 앙상히 드러났다. 쉽게 말해 복지관도 교회도 못 가는 상황에서 독거노인들의 고독사가 느는 것이다. 청년들도 실직이 늘어나고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면서 심각한 위기상황에 빠지게 된다.

코로나19 사태는 우리 사회의 관례들을 흔들며 전례 없이 유동적인 사회를 만들고 있다. 가령 노동시장, 근로기준법의 전제가 되는 임금노동·대면노동의 틀이 통째로 흔들리며, 플랫폼·불완전 노동과 비대면 노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이런 유동성은 더 좁은 정규직·전문직 노동과 광범위한 불안정 노동으로 양극화를 부추기거나, 사회적 연대를 위한 새로운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가족생활과 관련해서도, 안정적 생계·주거·관계를 갖춘 사람들은 더 사적이고 비싼 경험을 누리며 ‘정상가족’의 장벽을 높이고 있다. 반면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더 잘게 쪼개져 고립되는 중이다. 우리는 ‘누구나 서로 함께 살 수 있는 사회’로 나아갈 사회적 합의를 이룰 수 있을까?

‘정상가족’과 주류 특권에 갇힌 국회의원

정부의 4차 기본계획은 진일보했지만, 사실 국회에서 관련 법이 통과되지 않으면 그저 공염불이다. 효율적인 정부 운영을 추구하는 행정부와 다수의 이익을 추구하는 입법부의 상호 견제는 민주주의의 기본원리다. 대중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입법부는 고도의 전문적 행정 능력이 필요한 현대 국가가 민주성을 잃지 않게 하는 힘이다. 특히 한국은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공무원 지위가 유지되는 ‘직업공무원제’를 취하고 있다. 이는 어려운 시험을 통과한 관료의 능력주의적 정당성과, 선거를 통해 뽑힌 선출직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이 서로 경쟁하며 정부를 운영하도록 만든다.

2019년 10월 부산에서 열린 ‘세상 모든 가족 함께-바다 나들이’ 행사에 참석한 김정숙 여사가 참가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연합뉴스

재난지원금 지급을 둘러싼 기획재정부와 민주당의 논쟁에서 볼 수 있듯이, 행정부와 입법부의 경쟁에서 통상 입법부가 더 진보적인 주장을 한다. 대중적 요구에 더 민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독 가족과 섹슈얼리티 문제에서만은 국회가 행정부와 사법부보다 훨씬 수구적이다.

가족정책의 기본법인 ‘건강가정기본법’에서 ‘건강가정’이라는 차별적인 언어를 바꾸려는 법 개정조차 국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또 헌법에 나와 있는 대로 차별을 하지 말자는 차별금지법이 14년간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4차 기본계획에서 논의를 하겠다고 한 민법 개정과 생활동반자법 등은 시작이나 할지 솔직히 자신할 수가 없다. 국회가 움직이려 하지 않는데, 행정부가 이렇게 한참 앞선 정책 방향을 제시하는 건 진짜 드문 일이다. 그만큼 한국의 가족 위기와 돌봄 공백은 심각한 상황이다.

4차 기본계획이 가족의 근간을 무너뜨릴 것이라는 극우세력의 비판과는 달리, 현행 한국 가족제도만큼 명백하게 가족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입증된 정책은 없다. 1인 가구의 폭증 및 세대원 수의 감소, 고립된 노인과 청년들, 방치되는 아이들, 역대 세계 최저의 출산율 등등. 어떤 정책이든 정책 결과 지표가 이 정도로 나오면 근본적으로 방향이 바뀔 수밖에 없다. ‘정상가족’과 ‘주류’의 특권에 갇힌 국회의원들만 현실을 보지 못한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과정에서 4차 기본계획의 실행 방안을 포함해 가족정책의 전환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만들어져야 한다. 대선 후보들은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질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핑계 대신, 적극적인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어떻게 사람들이 서로 돌보고 함께 살며, 한국에서 사라진 ‘함께 사는 즐거움’을 찾을 것인가는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온 대선 후보들의 문제의식은 4차 기본계획만큼에도 다다르지 못한 것 같다. 결국 민주주의 정치체제에서 정책의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국민의 목소리다. 우리 민주주의가 공무원들보다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고, 믿고 싶다.

기자명 황두영 (국회 보좌관·⟨외롭지 않을 권리⟩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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