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

저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병역의무를 수행했습니다. 이른바 ‘졸병(하급자)’ 생활을 할 때, 면회 온 가족과 상냥하게 대화하는 ‘고참(상급자)’들을 보며 굉장히 낯설었던 적이 있습니다. ‘저렇게 멀쩡한 녀석이 내무반에만 들어오면 왜 괴물이 되는 거지?’

저는 군대에서 만난 ‘고참’들만큼 이기적이고 몰염치하고 잔인하며 책임감 없는 집단을 입대 이전과 이후를 통틀어 접한 적이 없습니다. 하급자들은 일상적인 정신적·육체적 폭력에 노출되어 있었으며, 이런 분위기는 직업군인인 간부들에 의해 조장되었습니다. 그 고참들을 괴물로 만든 것은 군대라는 조직 그 자체입니다. 친지들을 만날 때는 정말 선량하고 다정한 젊은이였거든요. 어쩌면 병역이라는 고되고 위험한 ‘자유의 박탈’을 사실상 ‘공짜로’ 개인에게 강제하는 방법이 ‘폭력의 일상화’밖에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군대와 군인은 숭고한 존재입니다. 10여 년 전 교육방송의 한 강의에서 어떤 강사가 “군대는 살인을 배우는 곳”이라고 말해서 세상을 발칵 뒤집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언의 맥락을 빼면 그의 이야기가 틀린 것만은 아닙니다. 군인은 인간 사회에서 최대의 금기이며 반인륜적 행위인 살인을 유사시에 감행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병사들이 그렇게 하는 이유가 뭡니까? 국가 공동체와 그 구성원들을 외부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으로서 최악의 행위를 시민 동료들을 위해 감수해야 하는 가능성 자체가 비참한 동시에 숭고한 것 아닐까요? 이런 병사들을 때리고 모욕하고 스스로 인간 이하의 존재로 여기게 만들어 복종시켰던 과거(지금은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의 군사문화를 떠올리면 지금도 울화가 치밉니다.

병역은, 국가와 개인 사이의 가장 중요한 계약 중 하나입니다. 개인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반인륜적 행위를 각오하는 대신 국가는 개인의 정신적·물질적 존엄성을 보장해야 합니다. 〈시사IN〉이 제712호의 커버스토리로 병역 문제를 다룬 이유는 1970년대쯤 체결된 이 계약(18쪽 “여성 징병제는 왜 ‘재밌는’ 이슈가 아닌가” 기사 참조)의 만료 시점이 점점 더 다가오고 있다는 조짐 때문입니다. 지난 4·7 재보궐선거 이후 여당에서 환기한 병역 문제가 촉발시킨 사회적 파장을 보면 그렇습니다. 이오성 기자가 “다가온 미래”로 보이기까지 하는 ‘모병제 전환’ 논쟁을, 이상원 기자는 일부 남성 커뮤니티에서 나오는 여성 병역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다뤘습니다. 예민하기 그지없는 사안을 커버스토리로 펼쳐서 두렵기도 합니다만, 이 기획이 ‘병역이라는 계약’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갱신되는 데 조금이라도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기자명 이종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