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1일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1심 재판에 출석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아무도 입을 열지 않는 법정이 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 의혹 관련 재판(양승태 재판)이다. 법정이 열린 직후 재판장이 피고인과 변호인, 검사의 출석을 확인하는 통상의 절차 이후 모두가 온종일 입을 다문다. 문자 그대로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드라마처럼 증인을 둘러싸고 검사와 변호사가 치열하게 다투지는 않더라도, 보통 법정은 말의 향연장이다. 각자 증거를 가지고 말로 싸우는 공개된 자리다.

그렇다고 양승태 재판에 정적만 흐르는 건 아니다. 음성 파일이 스피커를 통해 출력된다. 내용은 지난해 진행된 양승태 재판의 녹음이다. 판사·검사·변호사·피고인은 각자 자리에 앉아 녹음 내용이 담긴 공판 조서를 보며 소리에 따라 종이를 넘기거나, 컴퓨터 모니터를 보거나, 가끔은 허공을 응시한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주로 눈을 감고 있다. 같이 피고인석에 앉아 있는 박병대·고영한 전 대법관이 메모하거나 서류를 보는 모습과 대조된다.

지난 2년 동안 양승태 재판을 진행했던 판사들이 2월 법원 정기인사로 바뀌면서 벌어진 일이다. 서울중앙지방법원 형사35부(재판장 박남천)가 맡았던 양승태 재판이 형사35-1부(재판장 이종민)로 옮겨졌다. 재판부가 바뀌면 ‘공판 절차를 갱신(공판 갱신 절차)’해야 한다. 대법원 형사소송규칙 제144조 1항 5호에 따르면, 갱신 전의 공판기일에서 증거조사를 한 서류 또는 물건 등에 대해 다시 증거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다만 이 공판 갱신 절차는 피고인과 변호인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면 생략 가능하다. 실제로 대다수의 재판은 그렇게 진행된다.

즉 앞선 재판에 문제가 없었으면 통상 넘어가는 이 절차에 양승태 재판의 피고인들이 제동을 걸었다. 120회 넘게 진행한 재판의 증거조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바뀐 재판부가 이미 진행된 증인신문을, 조서 형식의 글로 읽을 게 아니라 공개된 재판에서 직접 들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쪽은 “시나리오만 보는 거랑 영화로 보는 거랑 차이라고 생각하면 된다”라며 녹음 파일 재생이 필요한 이유를 〈시사IN〉에 설명했다.

당연히 검찰은 난색을 보였다. 그렇게 하면 ‘녹음 재생에만 1년 넘게 걸릴 수 있다’고 밝혔다. 피고인들은 ‘법대로’를 요구하며 맞섰다. 바뀐 재판부는 핵심 증인 4명의 증언 녹음을 법정에서 청취하기로 결정했다. 지난 4월 내내 양승태 재판에서 온종일 녹음된 목소리만 울려 퍼진 이유다. 채택된 증인 네 명의 녹음을 모두 듣는 시간만 두 달 넘게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일주일에 세 번씩 재판을 진행하며 녹음을 틀고 있지만, 네 사람의 녹음본만 해도 양이 많다.

가장 먼저 재생한 이규진 전 대법원 양형위원회 상임위원의 증인신문(모두 6회)을 전부 듣는 데만 3주가 걸려 4월28일 마무리되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이민걸 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5회), 강형주 전 법원행정처 차장(3회), 한승 전 법원행정처 사법정책실장(2회) 등에 대한 이전 재판의 증인신문 녹음본도 모두 바뀐 재판부의 법정에서 재생될 예정이다.

ⓒ정다은 그림

법관 사회의 ‘내로남불’ 원칙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증언이 재생된 4월16일, 법정 바깥 복도에서 소란이 일었다. 다른 재판 민원인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양승태 재판의 법정 안까지 새어 들어왔다. 종종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녹음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큰 소리가 울려 펴졌다. 정작 법정 내에서 녹음본의 볼륨을 키워달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이어 4월19일에 재생된 이규진 전 상임위원의 증인신문 녹음은 상태가 좋지 않을 때가 있었다. 스피커가 ‘웅웅’대며 울렸고 때론 소리가 지나치게 작아졌다. 별 이의 없이 지나갔다. 녹음 재생 시간이 길어지면서, 판사·검사·변호인·피고인 등이 앉은 재판정에서 간혹 눈을 감는 이들이 보였다.

〈시사IN〉이 접촉한 전현직 판사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판사 인생에서 겪어보지 못한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변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낯설거나 전무(全無)하더라도 피고인의 권리는 형사재판에서 담보되어야 하는 원칙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변호인은 “처음에는 (녹음을 듣는 것이) 지루한 절차, 무익한 절차가 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있었다. 따분하고 누가 짜증 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해보니 효용이 굉장히 컸다. 더 잘 이해가 되었다. 실체적 진실을 찾기 위해서 욕먹을 각오하고 FM대로(철저하게 원칙을 지키며 한다는 의미) 가는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문제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에게만 원칙이 적용되는 현실’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일반 피고인은 양 전 대법원장과 같은 권리를 주장하기 어렵다. 2년에 한 번씩 재판부가 바뀌는 상황에서, 비효율적으로 보이는 재판 절차(양승태 재판에서는 공판 갱신 절차 등)를 요청할 ‘간 큰 피고인’은 찾기 힘들다.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판사의 눈 밖에 나고 싶은 피고인은 드물다. 법조인들도 이 사실을 경험적으로 안다. 한 판사는 “양승태 전 원장처럼 일반 피고인이 재판 진행을 요청하면, 재판장 10명 중 5명은 불허하고 나머지 5명은 화를 낼 거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현실이 그렇기에, 양승태 전 대법원장부터 원칙을 지키도록 해서 다른 재판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모든 피고인의 권리 확대를 위해서라도 양승태 재판을 ‘전범(典範)’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양 전 대법원장 변호인 측에서 나온다. “대법원장의 재판이 선례가 되기에 욕먹어도 권리 주장을 해야 한다고 변호인들이 원장님께(양승태) 말했다. 원장님도 법이 뭐냐 원칙이 뭐냐 생각한다.”

하지만 한 현직 판사는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라’고 지적했다. 지금까지 2년 동안 진행된 사법농단 의혹 재판에서 지켜진 원칙이 이후 다른 재판에서 실현되었느냐고 꼬집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으로‘부터’ 시작해 차츰 확대된 피고인의 권리였는지, 양승태 전 대법원장‘만’의 권리였는지를 살펴야 한다는 뜻이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기소된 박병대 전 대법관. ⓒ연합뉴스

‘함초롬바탕체’ 논란이 대표적이다. 재판 초반이던 2019년 6월, 양승태 전 대법원장 쪽에서는 검찰이 제출한 핵심 증거물 조사에도 원칙을 들이댔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USB에서 나온 파일 1142개와 검찰이 재판부에 해당 파일을 출력해 제출한 문서가 동일한지 하나하나 검증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검찰의 증거 조작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였다. 변호인 쪽에서는 원본 파일은 함초롬바탕체인데 출력물의 글씨체는 왜 다르냐고 따져 물었다. 검찰은 인쇄를 한 컴퓨터에 함초롬바탕체가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라고 설명했다. 증거 조작은 딱히 드러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엄격한 증거조사는 당시 화제가 되었지만, 이후 다른 법정으로까지 널리 확대되지는 못했다.

압수수색 영장 발부도 마찬가지다. 피의자를 상대로 무차별적이고 무제한적으로 이뤄지는 검경의 수사를 견제하기 위해, 법원은 압수수색 영장도 실질 심사를 한다. 그러나 엄격하게 요건을 심사해 영장 발부를 해야 한다는 이 원칙이 법관을 대상으로 한 수사와 재판에만 적용된다는 비판이 숱하게 나왔다. 2018년 법원은 사법농단의 핵심 인물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잇달아 기각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집에 대한 압수수색은 ‘주거 안정의 가치가 중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검찰은 양 전 대법원장이 지인의 집에 머문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다시 영장을 청구했지만, 법원은 같은 이유로 또 기각했다.

법원의 태도는 다른 고위 법관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임의제출 가능성 있다(법원행정처 국제심의관실에 대한 영장 기각 사유)” “법익 침해가 큰 사무실·주거지 압수수색을 허용할 만큼 필요성 등이 인정되지 않는다(법원행정처 양형위 자료 등에 대한 영장 기각 사유)” “기본권 제한의 정도 등을 고려하면 현 단계에서 압수수색 필요성을 인정하기 어렵다(임종헌 전 차장 ‘대포폰’에 대한 영장 기각 사유)”. 이후 3년이 지났지만 ‘주거 안정’을 비롯한 위와 비슷한 사유로 압수수색 영장이 기각된 또 다른 사례는 알려진 바 없다.

결국 전직 대법원장으로 대표되는 ‘판사’라는 키워드를 넣어야만 가능해지는 장면이다. 사법농단 사건에 자성의 목소리를 높여온 한 판사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원칙은 피고인의 권리가 아니라 특권’이라고 일갈했다. “형사소송법 발전을 위해 지금부터 그렇게 하자고 하는 건 좋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렇게 되지 않았고, 법관 사회가 제대로 그 방법도 논의하지 못했다. 선례를 쌓아 일반 피고인에게도 적용하지 못했다면 ‘내로남불’이다.” 법관 사회가 일반 피고인의 권리 확대에 눈감으면서 자신들을 위해서만 원칙을 내세우는 건 부끄러운 일이라는 고백도 덧붙였다.

고영한 전 대법관. ⓒ시사IN 조남진

4월29일 현재까지 양승태 1심은 증인 87명의 신문을 마쳤다. 지난 2년 동안 재판을 진행한 결과다. 아직 증인 24명의 신문이 기다리고 있다. 반나절이면 신문이 끝나는 증인도 있지만,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는 임종헌 전 차장 같은 핵심 증인도 남아 있다. 재판 상황에 따라 증인 5~6명이 추가될 가능성이 있어, 올해 안에 1심 선고가 나올지는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도 처음 재판을 시작할 때 신청된 증인 216명에 비하면 절반 가까이 줄었다.

같은 건으로 기소된 임종헌 전 차장의 재판(임종헌 재판) 진행은 훨씬 더디다. 신청된 증인 257명 중 164명에 대한 신문은 아직 이뤄지지 못했다. 임종헌 재판은 개시 직후인 2019년 1월 변호인 11명이 집단 사임하면서 한 달 이상 중단된 바 있다. 같은 해 5월에는 임 전 차장이 재판부(형사36부 재판장 윤종섭) 기피 신청을 했다. 1심, 2심, 대법원 모두 임 전 차장의 기피 신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2020년 1월에야 최종 기각돼 그해 3월부터 임종헌 재판이 다시 열렸다. 이조차도 현재 임 전 차장은 사실조회 신청 등을 해 재판 절차가 지연되고 있다.

한 번 더 무너지는 사법부 신뢰

‘피고인들이 시간 끌기를 한다’는 지적은 사법농단 재판에서 거듭 제기되는 의심이다. 앞서 양승태 재판 증인으로 채택된 정다주·시진국·박상언·김민수 판사 등은 제때 재판에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재판 일정과 겹쳐 증인으로 출석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임종헌 재판에 증인으로 소환되었으나 ‘법원 체육대회’ 때문에 출석하지 않은 법관도 있다. 전지원 판사(전 법원행정처 사법지원총괄심의관)는 소속 법원의 체육행사에 참석해야 한다며 증인신문에 나오지 않았다. 재판부가 과태료 100만원을 부과하자, 이에 불복해 과태료 재판까지 열렸다. 이후 전 판사가 법정에 출석한 점 등이 고려돼 과태료는 부과되지 않았다. 법과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 행해진 일이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사건의 연속이었다.

‘재판 지연 의혹’에 대해 양승태 전 대법원장 쪽은 손사래를 친다. “사건 초기에는 증거 부동의를 많이 해서 시간 끌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비난을 받은 바는 있다. 사건 볼륨이 커서 FM대로 하는 거지, 피고인이 방어권 행사하지 말라는 거냐고 반박했다. 이후에 증거 ‘부동의’를 ‘동의’로 바꿔서 증인 숫자도 많이 줄였다. 이후에는 오히려 검찰이 시간을 끌었다. 하루면 끝낼 수 있는 증인을 2~3일씩 나오게 해서 우리가 항의했다. 그리고 법관들이 증인으로 안 나온 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연합뉴스

하지만 한 전직 판사는 사법농단 재판 피고인들의 속내를 이렇게 해석했다. “양승태 등 피고인들에게 사법농단 재판은 장기 프로젝트다. 단기 목표는 1심. 장기 목표는 대법원. 1심에서 무죄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혹시 거기서 일부 유죄가 나더라도 대법원에서만은 확실하게 무죄를 받으려고 할 것이다. 그러려면 대법원 구성이 중요하다. 2017년 임명된 김명수 대법원장의 임기는 6년인데, 그 이후를 바라보고 재판에 임한다고 봐야 한다.” 한 현직 판사의 시각도 비슷했다. “지금 대법원 구성이 자기들에게 불리하다고 생각하니, 사법농단을 정쟁이라고 우기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며 관심이 줄어들게 만들고 있다.”

이례적인 상황이 유독 사법농단 재판에서만 잦다 보니, 원칙은 빛이 바랜다. ‘신성 가족’에게만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원칙은 보통의 시민에게 허탈함을 넘어 사법 불신을 가져올 수도 있다는 경고가 나온다. 참여연대 정책자문위원장인 한상희 건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말이다.

“일반 피고인이 아무리 주장해도 거들떠보지 않는 판사들이 양승태 전 대법원장 같은 전관 피고인이 하는 주장은 과하다 싶은 것까지 다 받아준다. 이게 문제가 뭐냐면, 그 자체가 나쁘다기보다는, 그런 행위를 보는 시민들은 사법 행위를 신뢰하지 않게 된다. 어느 정도 신분이 되지 않으면, 법정에서 내 이야기 한번 제대로 못하고 몰릴 수 있겠구나 하는 불신을 야기한다.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 규칙이 법관 출신들에게만 유독 적용된다면 누가 법을 신뢰하겠나.”

사법농단 의혹으로 무너진 사법부의 신뢰가, 사법농단 의혹 재판으로 한 번 더 무너지고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는 형국이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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