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13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서울 삼성미술관 ‘리움’ 개관식에서 축하 연설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이건희 컬렉션’이 세상에 나온다. 지난해 10월 사망한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소장 미술품이다. 이 전 회장 상속세 신고·납부 기일(4월30일)이 다가오면서 미술품의 면면과 향방에 관심이 모인다. 삼성이 국내 감정기관에 감정을 의뢰한 미술품은 1만3000여 점. 평가 가액은 2조~3조원께로 알려져 있다. 작품의 기증 여부가 화제다. 미술품으로 상속세를 대납하는 제도인 미술품 물납제도 함께 주목받고 있다.

이건희 컬렉션에는 국보 30점, 보물 82점이 포함되어 있다. 국보 219호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가 대표적이다. 고미술 분야 컬렉션 가운데에는 정선의 ‘금강전도’(1734), ‘인왕제색도’(1751)가 핵심으로 꼽힌다. 이중섭, 박수근, 김환기, 파블로 피카소, 앤디 워홀, 알베르토 자코메티 등 국내외 근현대 미술 거장들의 작품도 컬렉션의 한 축이다. 다만 이건희 컬렉션으로 거론되어온 작품들이 정말로 모두 이 전 회장 개인 소유인지는 불명확하다. 개중에는 삼성미술관 리움을 운영하는 삼성문화재단 소유인 작품도 있다.

삼성 의뢰로 컬렉션을 들여다본 감정기관은 컬렉션 내용에 대해 말을 아낀다. 한국화랑협회의 미술품 감정위원회,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 한국미술품감정센터 3곳 모두 사안과 관련해 “할 수 있는 말이 없다”며 취재를 거부했다. 한 감정기관 관계자는 “‘이건희 컬렉션’이 민감한 이슈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뢰에 대해서도 감정 내용을 외부에 알리지는 않는다”라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이 채 베일을 벗기도 전에 ‘기증론’부터 대두된 배경에는 우선 미술계의 희망이 있다. 이건희 회장의 수집 미술품 규모가 어마어마하다는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파다했다. 2017년까지 리움 관장을 지낸 부인 홍라희씨도 국내외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이는 ‘큰손’으로 꼽힌다. 삼성가가 모아온 미술품의 양과 질은 개인의 수집품 차원을 넘어섰다. 국가적으로 주목해야 할 이 ‘문화 자산’을 공공의 차원에서 향유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미술계에 퍼져 있다.

미술품 기증론에는 현실적 근거도 있다. 미술품도 상속세를 낸다. 유족이 이건희 컬렉션을 상속받을 경우 합계 12조~13조원으로 추산되는 상속세에 더해 미술품에 대한 세금도 물어야 한다. 세법상 국유기관, 공공재단에 미술품을 기증하면 미술품 상속세를 면할 수 있다. 주된 기증처로 거론되는 국립현대미술관과 국립중앙박물관 등은 “협의가 진행 중”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4월 말 삼성 측의 세부 내용 발표를 기다리는 것일 뿐, 기증 자체는 기정사실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근현대 미술품들은 국립현대미술관에, 고미술품과 유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다는 설이 유력하다.

‘절세 전략’으로 봐야 할까? 기증이 세제 혜택을 보는 길인 것은 맞지만 그림을 팔아 벌어들인 수익으로 상속세를 납부하는 편이 낫다. 대개의 상속인이 물려받은 미술품을 팔지 않고 기증하는 데에는 보통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미술품이 (너무 비싸거나 거래가 활발하지 않은 작가 작품이어서) 판매될 때까지 기다리지 못할 정도로 당장 세금을 낼 여윳돈이 없거나, 창작자의 유족이 고인의 작품을 한데 모아놓으려 하는 경우다. 둘 다 삼성가 유족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다. 기증이란 선택을 두고 여러 추측이 나오는 배경이다. ‘이건희 회장의 유지를 이으려는 삼성 일가의 통 큰 기부’라고 상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사면을 위한 여론전의 일환’이라고 의구심을 품는 이들도 나온다.

이건희 컬렉션 중 대표 작품으로 꼽히는 정선의 ‘인왕제색도’. ⓒ문화재청 제공

‘혜택 볼 사람이 정해져 있는 법’

이건희 컬렉션과 미술품 물납제를 연결하는 목소리는 이건희 컬렉션의 기증이 (어떤 의도에서든) 예외적 결정이라는 데서 출발한다. 고가 미술품을 상속받은 이들 처지에서는 기증보다 판매의 유인이 더 크다. 고가 미술품은 주로 해외로 팔려간다. 국내 미술시장이 워낙 미미해 구매자를 찾기 어려워서다. 국가 차원에서 본다면 상속인들의 그림 판매는 문화 자산의 해외 반출로 이어진다. 물납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래서 상속자의 기증 의사에 기댈 게 아니라, 미술품으로 세금을 대납할 수 있게 해 판매의 유인을 줄이자고 말한다. 지난해 11월 말 이광재 의원이 관련 내용을 담은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시사IN〉 제688호 ‘미술품 물납제, 복지와 투자 사이’ 참조).

국보 219호 백자 청화매죽문 항아리. ⓒ리움 제공

물납제는 미술계의 숙원 사업이지만 좀처럼 여론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취미로서든 재테크로서든 미술품 수집은 대중과 밀접한 영역이 아니다. 일부 언론은 미술계 인사들의 입을 빌려 이건희 전 회장의 ‘안목’이나 ‘열정’을 논하지만 그것은 이 컬렉션의 핵심이 아니다. 클로드 모네나 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을 사는 데 필요한 것은 재력이다. 숙명여대 김현화 교수(미술사)는 이렇게 말했다. “미술사에 남는 불멸의 작가는 극소수이고, 그들의 작품은 가격이 계속 오른다. 사두면 시간이 갈수록 확실히 (경제적 이익이) 남지만 살 수가 없다. 이건희 회장처럼 돈이 많지 않은 이상 개인이 구매할 수 있는 가격이 아니다.” 그래서 물납제는 ‘혜택 볼 사람이 정해져 있는 법’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세금 200억원을 현금으로 납부받는 것보다 200억원짜리 그림을 받는 쪽이 국가에 이익인지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더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문제도 있다. 그림 값을 가늠하기가 어렵다. 시가 감정뿐만 아니라 진위 감정부터 논란이 많다. 공산품과 달리 예술품 특성상 위작 여부를 가늠하기 어렵다. 감정단체들은 물납제 도입을 희망하며 전문 인력 양성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다. 문체부 역시 감정 체계에 대한 연구용역을 발주했다. 하지만 한 전직 화랑 대표는 “몰라서 틀리게 감정하는 것보다 감정사 개개인의 양심 문제가 더 크다”라고 말했다. 가치평가의 특성상 시가 감정은 차후 문제가 생기더라도 빠져나갈 구멍이 많다는 것. 그는 “감정 수수료는 감정가액에 비례한다. 50만원짜리 그림을 10억원으로 감정해달라고 하는 일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 ‘몰랐다’ ‘생각이 다르다’고 빠져나가면 그만이다”라고 말했다. 서구권에 비해 규모가 작고 음성화된 한국의 미술시장에는 ‘시장가격’을 비교하기 어렵다.

이건희 컬렉션은 2008년 삼성 특검이 용인 에버랜드의 미술품 수장고를 압수수색하면서 실체가 드러났다. 2007년 김용철 변호사는 기자회견에서 삼성 비자금 일부가 미술품 구입에 사용됐다고 주장했지만, 특검은 이건희 회장 개인 돈이라고 결론 내렸다. 미술품 물납제는 은닉되어 있는 미술품을 밖으로 나오게 하고 해외로 나갈 미술품을 나라 안에 붙들어둘 수 있다. 하지만 물납제 도입을 주장하는 이들도, 수십 년째 개선되지 않는 불투명한 미술시장을 두고서는 한숨만 쉴 뿐 뚜렷한 방책을 내놓지 못한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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