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정효주 양을 유괴한 매석환(오른쪽)과 그가 범행에 사용한 자동차 트렁크. ⓒ연합뉴스

〈캐치 미 이프 유 캔〉이라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가 있어. 한국말로 옮기면 ‘잡을 수 있으면 잡아봐’ 정도가 되겠지. 주인공은 프랭크 애버그네일 주니어라는 실존 인물이야. 그는 기발한 사기 행각과 대담한 수표 위조로 연방수사국(FBI)을 비롯해 미국 수사기관으로부터 ‘공공의 적’으로 찍혔지. 끝내 체포됐지만 그 재능을 살려 위조수표를 적발하는 시스템을 개발해 인생 역전을 이뤄내기도 했어.

그는 미국의 주 변호사 시험을 단 2주 만에 붙어버릴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런데 오늘 소개할 한국의 범죄자는 애버그네일과는 반대로 80% 정도 모자란, 오랫동안 범죄에 물들어 지냈지만 이를 갈며 미워하기는 어려운, 기이한 사람이야. 이 사람의 일대기를 영화로 찍으면 이런 제목이 될지도 모르겠다. ‘미스 미 이프 유 캔’ 즉 ‘놓칠 수 있으면 놓쳐봐.’ 그의 이름은 매석환.

1939년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일찌감치 모범 생활 사나이와는 거리가 멀었어. 공교롭게도 그의 매형은 순경이었는데 처남에 대한 평가는 이러했다. “저놈이 자라면 큰사람이 되든지 아니면 빈 깡통이 될 거라고 말해왔다(〈경향신문〉 1961년 1월7일).” 이 될성부른 떡잎은 10대 시절에 벌써 신문지상을 장식했다. 1955년 2월12일 〈경향신문〉에 “시내 각 극장의 입장권을 위조 암매한 범인 매석환 검거”라는 소식이 보도됐으니까 말이다. 인기 있는 영화의 경우 400환을 호가하던 즈음에 매석환은 100환이나 50환에 가짜 표를 신나게 팔아치웠다고 해. 그가 위조한 영화표는 1000장. 그의 나이는 열여섯.

어린 나이에 전과자가 되었지만 그도 대학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매석환은 공부보다는 다른 특출한 재능을 이용(?)해 부정 입학을 시도하다가 돈만 날리게 되지. 이때 40만~50만 환을 잃었다니 적잖은 타격이었을 거야. 끙끙 앓던 이 엉성한 위조범은 크게 한탕을 기획하게 된다. 한때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세도를 자랑했다가 4·19 혁명 이후 감옥에 들어가 있던 전 청와대 경무관 곽영주가 타깃이었어. 곽영주의 아들 곽승근을 유괴한 거지. 아이를 꼬드긴 거짓말은 꽤 그럴듯했단다.

“오늘 네 아버지가 감옥에서 나오셔. 그래서 성난 데모대가 너희 집을 둘러싸고 있어! 데모대에 잡힐 수 있으니 어서 아버지 만나러 구치소 앞으로 가자.” 4·19를 경험했던 곽영주의 아들이 속아 넘어가기 딱 좋은 거짓말이었지. 그는 곽승근을 집으로 끌고 가 자기가 직접 판 땅굴 속에 가둔 후 줄기차게 곽영주를 협박했어. 나름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돈을 주고 길 가는 소녀를 메신저로 활용하기도 하고, 지게꾼을 피해자 가족에게 접근시키는 등 꽤 지능적으로 굴었지. 하지만 수고가 헛되게도 범행 9일 만에 체포되고 만다.

경찰에서 범행 동기를 묻자 이 유괴범은 엉뚱한 이유를 댄다. “돈도 돈이지만 원한도 있단 말입니다.” 경찰 귀가 번쩍했으리라. “4·19 때 바리케이드 앞에서 오줌을 누다가 곽영주한테 걸려서 경찰봉으로 열나게 맞았단 말입니다. 내 그래서 저 사람 괴롭혀주리라 마음을 먹었다고요.”

재미있는 것은 유괴당했던 소년 곽승근의 태도였어. 지옥에서 살아 돌아온 듯 대하는 어른들 앞에서 곽승근 군은 태연했고 현장검증할 때는 웃기까지 했다. “때리지도 않고 울리지도 않고 동생같이 잘 대해줬는데요. 오히려 정들었어요(〈경향신문〉 1961년 1월11일).” 식사도 매일 중국집에서 시켜줬다고 했다. 유괴 자체가 용서 못할 범죄임은 분명한데 뭔가 묘했다. 법원도 기가 막혀서 그런지 1년 징역이라는 상당히 가벼운 형벌을 내렸지.

1979년 4월 납치에서 풀려난 정효주 양(왼쪽)과 어머니. ⓒ연합뉴스

아이들의 마음을 얻은 유괴범

하지만 매석환은 제 버릇을 개 주지 못했어. 군에 입대했는데 넉 달도 안 돼 탈영하고 숨어 지내는 신세가 된 거야. 세 들어 살던 집의 딸과 연애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어두운 그림자가 돋아난다. 원래 그림에 비상한 재주가 있던 전직 영화표 위조범은 대담하게도 위조화폐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그 집안의 식구들에게 “공부하겠다”라고 선언한 뒤 물감과 고무도장, 동판 등 위조지폐 제작에 필요한 물건들을 들여놓고 쑹덩쑹덩 위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목표는 1964년 도쿄 올림픽 구경 가기.

그렇게 근 1년 동안 방 안에서 위조지폐를 만든 그는 82만7700원에 달하는 100원짜리 지폐 뭉치를 들고 달러상을 찾는다(〈경향신문〉 1964년 10월8일). 미화로 치면 2500달러 상당이었지. 그런데 그가 들고 온 위폐는 너무나 엉성했어. 달러상은 대번에 눈치를 채고는 가정부를 시켜 경찰에 신고했지. 이를 까맣게 모르고 있던 매석환은 경찰이 들이닥칠 때까지도 달러상이 속아 넘어갔다고 철석같이 믿으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또 쇠고랑을 찼어.

탈영병 신분이기에 매석환은 헌병대로 넘겨졌는데 경비병이 조는 틈을 타서 또다시 탈출에 성공하지. 현상금 2만원이 내걸렸고, 수천 병력이 서울 바닥을 헤맸지만 그를 찾을 수 없었어. 그런데 그는 곧 엉뚱한 곳에서 체포된다. 발동기 기술자이기도 했던 매석환은 서울 상도동의 어느 공장 앞에서 발동기 소리를 듣고 공장을 기웃거렸어. 그 모습을 도둑으로 오인한 공장장이 매석환을 붙잡았다. 소란에 뛰쳐나온 공장장의 동생 육군 중령이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지.

권력자(곽영주)에게 두들겨 맞았던 기억이 떠올랐던 걸까. 분을 못 이긴 매석환은 이렇게 외치기에 이른다. “왜 군인이 민간인을 쳐? 경찰서로 가자!” 그래서 간 파출소. 그런데 경찰이 보기에 이 청년 어딘가 많이 수상했다. 군인 내복을 입고 있었고 머리도 짧았다. 어럽쇼? 찬찬히 뜯어보니 현상금 붙은 매석환과 찍어놓은 듯 닮았던 거야. 파출소장은 돌직구로 물었다. “너 매석환이지?” “예, 제가 매석환이에요.” 다시 그의 손목에는 수갑이 채워졌지.

매석환의 이름을 전국적으로 드날린 건 바로 1978년 부산에서 일어난 정효주양 유괴사건 때였어. 당시 그의 형은 간암 투병 중이었고 그 치료비를 마련하고자 매석환은 범행을 저지른다. 협박은 협박대로 했지만 그는 효주 양에게 옷도 사주고 불고기도 먹이고 “네 아버지가 부도나서 빚쟁이들로부터 널 보호해야 한다”는 거짓말로 철석같이 자신을 믿게 만들었어. 경찰에 체포된 뒤 효주 양이 “우리 아저씨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잡아가느냐”라며 거세게 항의할 만큼.

유괴범치고는 가벼운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매석환은 이후 수감 생활을 하며 유괴사건이 생길 때마다 범인에게 편지를 쓰고 자수를 호소하는 역할로 신문에 등장했다. 그는 출소 후 자신의 장기를 살려 카메라 수리점을 차리는 게 소원이라고 했지. 용서하기 어려운 범죄를 여러 번 저질렀지만 또 아슬아슬하게 ‘인간’의 경계를 넘어서지는 않았던 범죄자 매석환은 나에게 매우 독특한, 하지만 뭔가 낯설지 않은 캐릭터다.

4·19 때 경찰 바리케이드 앞에서 오줌을 누며 객기 부리다가 열나게 얻어터진 청년, 대학에 가고 싶어 부정 입학을 시도하다가 되레 사기를 당하는 엉성한 영화표 위조범, 달러상을 속일 수 있다고 믿은 얼치기 위폐범, 아이를 두 번이나 유괴했지만 그들을 철석같이 믿게 만든 ‘착한 형’ 혹은 ‘착한 아저씨’. “이런 나쁜 놈!”이라고만 하기엔 뭔가 가슴속에서 아련하게 측은지심이 돋지 않느냔 말이지. 꽤 비상한 것 같으면서도 “놓칠 수 있으면 나 한번 놓쳐봐요”라는 듯 증거를 죄다 흘리고 다닌 이 범죄자를 아빠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구나. “뭐 이런 희한한 사람이 있나 싶은데 또 한편으로는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 살아 있다면 여든셋 정도가 되었겠구나. 1989년 출소 후 역사와 일상의 인파 속으로 사라진 그의 삶이 범죄로부터 자유로웠기를 바란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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