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재·보궐 선거에서 당선된 국민의힘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가 당사 개표상황실에서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연합뉴스

더불어민주당이 2020년 총선 압승 이후 불과 1년 만에 4·7 보궐선거에서 참패했다. 민주당 후보들은 2020년 서울 지역구 49곳을 합쳐 305만 표를 얻었다. 1년 만에 민주당 박영선 후보가 얻은 표는 190만 표로 떨어졌다. 이 정도면 대붕괴다. 집권세력은 어디서 어떻게 무너졌나.

널리 퍼진 오해부터 보자. 2020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뒀으므로 총선 이전에 제시된 문제들, 그러니까 최저임금 정책이나 조국 사태 등에서는 국민들이 민주당 노선을 승인했다는 분석이 있다. 그러므로 이번 보궐선거의 심판은 2020년 4월 총선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서 찾아야 한다는 논리다. 그래서 주로 지목된 게 부동산 정책이다. 부동산 정책 때문에 패배했다는 분석은 다시 한 층 내려가면, ‘사람들의 욕망’ 때문에 졌다는 함의를 깔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여론의 미묘한 장기 추이를 놓치고 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전국선거는 두 차례 있었다.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이다. 둘 다 집권 여당이 압승했다. 그런데 두 압승 직후에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도는 임기 전체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대하강기’를 기록했다. 2018년 지방선거 이후에는 79%로 정점을 찍은 국정수행 지지도가 12주에 걸쳐 49%까지, 무려 30%포인트가 훅 빠진다(〈그림 1〉 참조). 2020년 총선 직후에도 쌍둥이 같은 추세가 나타난다. 총선 3주 후에 71%로 정점을 찍은 국정수행 지지도는 이후 10주에 걸쳐 46%로 미끄러진다(〈그림 2〉 참조). 낙폭은 25%포인트다.

매우 이례적이다. 전국선거에서 압승한 정권은 여론의 ‘승자 편승 효과’ 덕분에 강한 지지층 결집을 한동안 유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놀라운 압승 직후에 어김없이 놀라운 대하강기를 겪었다. 2018년 1차 대하강기는 최저임금 논란이, 2020년 2차 대하강기는 부동산 논란이 원인으로 지목되곤 했다. 그러나 이런 이례적인 구조는 개별 이슈를 넘어서는 어떤 징후다.

4월7일 박형준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가 당선이 확실시되자 배우자와 환호하고 있다. ⓒ연합뉴스

중도적인 유권자들에게 두 차례 전국선거는 야당 심판 선거 속성이 강했다. 여당에 불만이 있어도 보수 야당은 도저히 찍기 어렵다는 기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결과를 정부·여당이 ‘압도적 지지와 전면적 승인’으로 해석해버리면 어떻게 될까. 중도층이 크게 관심을 갖지 않거나 이념적 이슈로 간주하는 의제들(검찰개혁 이슈가 대체로 그런 평가를 받아왔다)까지 승인받은 듯이 굴면, 이들 유권자는 지지 철회로 경고신호를 보낸다.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 이후 이런 상황이 되풀이해 일어났다. 최저임금과 부동산은 그 자체로 민심 이반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경고신호를 내기 위해 불려 나온 이슈라는 속성도 동시에 갖고 있다. 이렇게 관점을 바꿔보면, 2020년 4월 총선 이전의 통치가 총선으로 면죄부를 받았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불만스러운 지지자’는 두 차례나 회신을 받지 못했다. 불만이 해소되지 않으면 그대로 누적된다.

그렇다면 어떤 불만인가? 문재인 정부의 기본 성격은 ‘촛불정부’였다. 2016년 촛불집회는 대단히 폭발적인 정치행동이었고, 국민의 80%에 해당하는 이례적인 규모가 동의했다. 이 80%는 고스란히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 지지율로 이어졌다. 여기서 문재인 정부의 중요한 본질이 나온다. 국민 80%의 지지율로 출범한 정부는 속성상 연합정부일 수밖에 없다. ‘80%가 동의하는 단일노선’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꼭 야당과의 연합을 뜻하지는 않는다. 계층과 처지가 서로 다른 ‘80%’가 공유할 만한 ‘연합 의제’를 어떻게 만들어내고 유지할 수 있느냐. 이것이 문재인 정부가 출발부터 받아든 숙제였다.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을 선택했다. 어떤 의미로는 납득이 가는 노선이었다. 광활한 80%를 묶어주는 끈은 촛불집회 지지 하나밖에 없어 보였고, 박근혜 정부 적폐 청산은 ‘연합 의제’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곧 용어의 인플레이션이 일어났다. 야당 전체를 적폐 세력으로 몰아갔고, ‘검찰 적폐’ ‘언론 적폐’ 등 대상이 전방위로 확장됐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내부정보 투기 사건이 불거지자 문재인 대통령은 “부동산 적폐 청산”을 외쳤다. 이 장면은 ‘적폐 청산’이 사실상 모든 통치행위를 대체하는 용어로 올라섰다는 걸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종북의 길 따라간 적폐

문재인 정부 들어서 ‘적폐’는 박근혜 정부 시절 ‘종북’이 갔던 길을 따라갔다. 둘 다 최초에는 통치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키워드였고, 둘 다 점차 의미의 인플레이션을 겪었으며, 둘 다 결국에는 지나치게 의미가 확장된 나머지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렸다. 문재인 정부의 적폐 인플레이션은 적폐 청산을 ‘연합 의제’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종북’이 그랬던 것처럼, ‘적폐’도 좁은 범위에서 제한적으로 휘두를 때만 다수가 동의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다. 전방위 적폐 청산은 강성 지지층만 남기고 촛불연합 구성원 대다수를 소외시켰다.

‘80% 촛불연합’의 일원이지만 강성 지지층은 아닌 온건·중도층 여론은 정권 중반기부터 피로감을 호소했다. 적폐 청산 자체에 동의하지 않는다기보다는, 민생과 사회경제 이슈의 우선순위가 계속 밀린다는 데 불만을 표했다. 2020년 총선을 앞두고도 여러 여론조사에서, 적폐 청산 이슈를 앞세우면 총선이 위태롭다는 경고등이 켜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2020년 총선은 정부·여당에 놀라운 기회를 열어줬다. 유권자들은 총선 성적 기준 180석(민주당+비례위성정당)을 집권세력에 몰아줬다.

적폐 인플레이션이 촛불연합을 흔들고 있었으되, 한동안 촛불연합 붕괴를 막아준 요소는 두 가지였다. 첫째, 선거를 앞두고 정부가 통치 성과로 시의적절하게 국민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2018년 지방선거를 앞두고는 남북관계의 극적인 개선이 있었고, 2020년 총선을 앞두고는 코로나19 대응 성공이 있었다. 둘째, 보수 지지 블록이 구조적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40~50% 선의 투표연합을 꾸준히 유지하던 한국 보수는 2016년 4월 총선(촛불집회 이전이다)부터 네 차례 전국선거에서 30%대 득표력으로 내려앉았다. 이 두 요인 덕분에, 정부·여당은 임기 중 두 차례 전국선거에서 압승했다. 그리고 이 두 요인에도 불구하고, 압승 직후 ‘불만스러운 지지자’의 급격한 지지 철회를 두 차례 모두 겪었다. 그리고 이 불만을 억누르는 중요한 뚜껑이었던 통치 성과가 뒷걸음질 치자, 누적된 불만은 촛불연합을 해체해버릴 파괴력으로 폭발했다. 그게 2021년 보궐선거였다.

적폐 청산이냐 여야 협치냐. 돌파냐 통합이냐. 이 양자택일의 질문이 집권세력의 노선을 크게 제약했다. 탄핵된 정부를 만들었던 보수 야당을 협치 대상으로 곧바로 받아들이는 건 촛불정부를 내건 문재인 정부에게 쉬운 선택이 아니었다. 여야 협치가 아니라면 적폐 청산 노선 말고는 없어 보였다. 돌파는 촛불정부의 숙명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 양자택일을 벗어나는 제3의 길은 임기 초부터 꾸준히 논의됐다. 국민 다수에게 도움이 되는 사회경제 개혁 프로그램을 가동하여, 한시적 촛불연합을 안정적 다수파 연합으로 전환하는 길이었다.

3월29일 청와대에서 열린 제7차 공정사회 반부패정책협의회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사실 이 노선은 제3의 길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으로 다수파를 엮어내는 길은 가장 고전적인 의미에서 ‘정치’라고 불리는 일 그 자체다. 20세기 미국의 정치학자 E. E. 샤츠슈나이더가 “정치란 사회갈등을 폭 넓게 조직하고 동원하고 통합하는 일”이라고 썼을 때, 그가 의도한 게 바로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으로 다수파를 엮어내는 일’이다. 그러니 ‘적폐 청산이냐 여야 협치냐’라는 양자택일이 있는 게 아니었다. 적폐 청산이냐, 여야 협치냐, 정치냐. 이 삼자택일이 있었다. 그리고 고전적인 의미에서 정치가 마치 선택지에 없었던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대표적 사회경제 프로그램인 최저임금 인상이 좌초한 후로, 문재인 정부는 ‘1번 갈등’ 자리에 먹고사는 문제를 배치할 역량을 소진한 모습을 보여줬다.

이런 맥락에서 2020년 봄은 문재인 정부에게 주어진 두 번째 기회이자, 2017년 집권 초기보다도 더 활짝 열린 기회의 창이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공동체가 재난에 직면했다. 재난기는 대단히 압축적인 정치의 공간이기도 하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한다는 압력이 평시와 비교도 되지 않게 강하다. 그래서 평시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새로운 사회계약이 재난기에는 가능할 수 있다. 집권 4년 차에 이런 기회를 받는 정권은 여간해서는 없다.

정치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작동할 때, 재난은 불평등을 줄이고 공동체를 복원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19 위기에 등장한 ‘한국판 뉴딜’의 취지도 이것이었다. 지난해 6월9일 국무회의 모두 발언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위기가 불평등을 키운다는 공식을 반드시 깨겠습니다. 위기를 불평등을 줄이는 기회로 삼겠습니다. 한국판 뉴딜의 궁극적인 목표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말은 정확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었으나, 이후 현실은 반대 방향으로 전개됐다. 지난해 연말 한국은행은 코로나19 이후 소득격차 확대와 대·중소기업 생산성 격차 확대가 동시에 일어났다고 분석했다. 부동산과 주식시장이 폭등하면서 자산 보유 계층은 재난기에 오히려 부를 불렸다. 영세 자영업자와 불안정노동자는 영업제한 조치와 경기후퇴의 직격탄을 맞았다. 이 대비가 하도 선명하고 인상적이어서, 재난기의 시민들은 격차 확대를 사실상 실시간으로 체감했다.

반년이 지나서 대통령은 “뼈아프다”는 반성을 내놓았다. 지난해 12월14일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런 말을 했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따라 영업이 제한 또는 금지되는 경우 매출 급감에 임대료 부담까지 짊어지는 것이 공정한지에 대한 물음이 매우 뼈아프게 들립니다. 모두가 고통을 분담해야 하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약자에게만 희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고통의 무게를 함께 나누고 정부의 책임과 역할을 높여나갈 방안에 지혜를 모아야 할 것입니다.” 6월의 정확한 문제의식은 반년 동안 여전히 문제의식에 머물렀다. 정치를 어느 방향으로 작동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려면 사회경제적 프로그램이 있어야 한다. 코로나19 재난기는 그 프로그램의 부재를 극적으로 드러냈다.

3월31일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상임선대위원장이 국회에서 연 대국민 호소 기자회견 뒤에 인사하고 있다. ⓒ연합뉴스

희소한 자원을 낭비한 사건

보통의 유권자들이 보기에 정부·여당에 우선순위 높은 과제는 따로 있었다. 통치는 엘리트 내부의 관심사로 비치는 검찰 이슈에 집중됐다. 추미애 당시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당시 검찰총장과의 대립을 극한으로 끌고 갔고, 문재인 대통령도 이 흐름에 사실상 동조했다. 문 대통령은 추미애 장관이 올린 윤석열 총장 징계안을 재가했다가, 법원이 징계 효력을 정지하면서 사과 메시지를 내야 했다. 적폐 청산 노선은 거의 희극적인 변형을 거쳐 고립됐고, 이 시간 동안 작동했어야 할 재난기 정치는 실종됐다. 촛불연합에서 강성 지지층을 제외한 광범위한 이탈층이 발생했다. 이는 ‘윤석열 현상’의 토양이 됐다.

이것은 정치인들이 보통 “이슈 관리에 실패했다”라는 식으로 표현하는 문제이지만, 실제 벌어진 일은 그보다 훨씬 심대하다. 앞서 만난 샤츠슈나이더로 돌아가보자. 빠르게 고전이 된 그의 책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가장 유명한 표현이 ‘갈등의 전국화’다. 정치란 인간 사회의 숱한 갈등 중에 무엇이 핵심 갈등인지를 결정하는 게임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인종 갈등을 ‘1번 갈등’으로 끌어올려 정권을 잡았다. 그러니까 ‘갈등의 전국화’란 어떤 갈등을 ‘1번 갈등’으로 만들 수 있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1번 갈등’은 엄청나게 희소한 자원이다.

어려운 사람들은 행정부나 입법부의 결정에 직접 개입할 통로가 부족하지만, 대신 머릿수가 아주 많다. 그렇기 때문에 먹고사는 문제가 시끌시끌해지고 전국적인 관심사가 되면(‘1번 갈등’이 되면) 어려운 사람들이 크게 유리해진다. 이것이 민주주의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유리한 체제가 되는 경로다. 반면 인권·시민권 문제는 어려운 사람들의 견해나 이해관계가 동질적이지 않다. 그래서 검찰개혁이나 법원개혁 이슈는 구조적으로 ‘1번 갈등’이 되기 어렵다. 2020년 총선 이후 1년 동안 벌어진 일은, ‘1번 갈등’ 자리에 엉뚱한 이슈를 줄기차게 가져다 앉히며 정치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을 낭비한 사건이었다. 집권세력이 검찰개혁의 우선순위를 높게 잡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먹고사는 문제를 ‘1번 갈등’으로 만들 프로그램의 부재 때문이기도 했다.

최저임금 정책, 조국 사태, 윤미향 파동, 추·윤(추미애·윤석열) 갈등, 부동산 정책에서 정부·여당의 참패 원인을 찾는 분석이 많다.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국면마다의 실패는 줄기에 해당한다. 진짜 문제는 뿌리에 해당하는 세계관이었다. 촛불정부는 헌법에 반하는 통치가 반복되지 않게 하라는 명령과, 80%에 달하는 촛불연합을 꾸려나가라는 명령, 두 요구를 동시에 받았다. 전자는 적폐 인플레이션으로 과잉 수신됐다. 후자는 사실상 인식되지도 않았다. 윤건영 의원은 문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통한다. 그는 청와대 국정기획상황실장 근무를 마친 2020년 1월에 〈시사IN〉과 인터뷰했다. 국정수행 지지도가 2018년 1차 대하강기 때 크게 하락했다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분명한 건 임기 3년 차에 이 정도 지지율은 전례가 없다.”

사실이다. 문재인 정부는 전임 정부와 같은 시점끼리 비교했을 때, 4년 내내 역대 최고 지지율을 놓친 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이는 문재인 정부가 촛불연합이라는 대단히 이례적인 토양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청와대 인사들은 대체로 이를 ‘곧 사라질 보너스’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원래 우리 지지층이 아닌 유권자가 많이 들어와 있다는 이유였다. 한시적 촛불연합을 안정적 다수파 연합으로 전환한다는 정치가의 비전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원상복귀를 당연시하는 방어적 태도가 주류였다. 촛불연합은 이렇게 해서 ‘원래 해체될 운명’ 취급을 받았다. 정치가 실패했으나, 실패 자체를 인식하지 않아버리는(“원래 우리 지지층이 아니었다”) 기묘한 해법이 등장했다. 문재인 정부에서 가장 심대한 실패는 이렇게 해서 집권세력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촛불정부는 본질상 연합정부일 수밖에 없다는 조건은 현 집권세력의 세계관과 궁합이 좋지 않았다. 민주화운동에 뿌리를 둔 집권세력은 선명한 선악구도, 도덕과 명분의 우위, 정치를 거악(巨惡)에 맞서는 성전(聖戰)으로 보는 태도 등을 공유한다. 어느 하나 연합정부의 원리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촛불정부를 ‘80% 연합정부’로 인식하지 않았던 이유 중 일부는 이것으로 설명된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집권세력의 노선과 세계관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총선 압승을 이끌고 당 대표 직무를 끝낸 2020년 9월에 〈시사IN〉과 인터뷰했다. 여기서 그는 이런 말을 한다. “사회 제반 영역이 다 민주화되어야 한다. 그래서 노동조합이 강하고, 시민사회가 강하고, 언론이 강해져야 한다. 지금은 제도정치 한 곳에서 정당만 섬처럼 있으니까, 노조·시민사회·언론이 다 취약하니까, 정당이 밀려나면 다 밀려나는 것이다. 민주화는 투표나 직선제 같은 형식의 문제가 아니라 투명성이 높아야 하고, 참여의 공간이 있어야 하고, 균형이 있어야 한다. 이런 게 총체적으로 달성되는 게 민주화인데, 지금은 사회 각 영역이 불투명하고 참여가 제약되어 있고, 그 결과로 균형이 무너져 있다.”

2016년 11월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제4차 범국민 촛불문화제가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이 말은 이중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사회 각 영역마다 운영원리가 민주화되어야 한다. 이것은 정론이다. 의사결정의 독점과 권위주의 문제는 정치적 민주화 이후에도 해결되지 않았다. 둘째, 정치권을 넘어 사회 각 영역에서도 민주화 세력이 적폐 세력을 몰아내야 민주화가 완성된다. 이것은 ‘거악에 맞서는 성전’의 세계관이다. 그리고 이 두 해석의 갈래 중에 집권세력과 지지층이 어느 길을 택하느냐에 따라서, 정치를 다루는 방식은 극적으로 갈리게 된다. 후자의 길로 접어들 때, 집권세력은 ‘무오류의 태도’로 빠져들어 간다. 노영민 전 대통령 비서실장은 3월22일 〈한겨레〉와 인터뷰를 했다. ‘무오류의 태도’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박영선 서울시장 후보나 김영춘 부산시장 후보나 도덕성이 야당 후보를 압도한다.” “지금 부동산 공급 문제는 5년 전 정책의 결과다.” ‘오만’이 이번 보궐선거의 키워드가 되었던 이유 중 일부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정치는 총칼로 하던 전쟁을 말로 하는 싸움으로 순치하는 행위다. 민주주의 역사에서 의회는 내전을 대체하는 기구였다. 정치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규칙 있고 결과에 서로 승복하는 질서 있는 투쟁으로 바꾸는 것이다. 정치를 긍정한다는 것은, 인간이 불완전하고, 더불어 사는 세상에서 의견 차이는 불가피하며, 우리 편이 반대하는 공적 결정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민주주의자에게 통합이란 의견의 통일을 뜻하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자에게 통합이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존중한다는 공통의 합의’를 뜻한다.

상대의 승리가 악의 승리이고, 우리 편의 승리가 선의 승리라고 믿는 사람은 이런 ‘정치’를 받아들이기 어렵다. ‘거악에 맞서는 성전’의 세계관은 그래서 원리상 정치혐오에 속한다. 정치란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과를 존중한다는 공통의 합의’ 위에서 작동하는데, 성전(聖戰)의 세계관은 바로 이 공통의 합의로부터 이탈한다. 집권세력이 정치를 작동시키는 데 실패한 이유 중 일부는 이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성전의 세계관에 뿌리를 둔 무오류의 태도는 참패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수 있다. 무오류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참패를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이번 선거 결과를 부동산 자산 증식을 원하는 ‘욕망의 투표’로 규정한다. 이러면 ‘정의 대 욕망’의 구도를 짤 수 있으므로 참패를 오류로 해석할 필요가 없다. “국민의 욕망을 인정하자”라고 점잖은 결론을 내리고 부동산 정책을 바꾼다 해도, 무오류의 태도는 손상 없이 지킬 수 있다. 둘째, 집권세력에 오류가 없었는데도 주권자가 심판 투표를 했다면, 집권세력과 주권자 사이를 연결하는 경로 어딘가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언론이다. 무오류의 태도에서는, 참패 이후의 대책은 언론개혁이라는 결론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참패 이후의 해석투쟁은 곧 있을 대선 경선 구도에도 영향을 주는 급박하고 중대한 전장이다. 무오류의 태도를 유지하면서 참패를 설명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욕망’보다는 ‘불안’

언론을 문제로 지목하는 논리는 2018년 지방선거와 2020년 총선의 압승 앞에 궁색해진다. 언론 환경이 1년 전과 크게 달라진 징후는 없다. ‘욕망의 투표’는 부동산 이슈와 맞물려서 좀 더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번에 유권자들이 보여준 결집력과 특히 민주당 지지 블록의 붕괴는 욕망보다는 더 부정적인 에너지, 분노와 심판으로 더 잘 설명된다. 왜 분노하고 왜 심판했는가라는 질문에 “욕망 때문에”라는 답은 잘 어울리지 않는다.

‘욕망’보다 주권자들의 정서를 더 잘 포괄하는 키워드는 ‘불안’이다. 불안정노동자와 자영업자는 소득 안정성이 낮아서 불안하다. 중장년은 노후가 불안하다. 무주택자와 1주택자는 널뛰는 부동산시장에서 주거가 불안하다. 급격하게 벌어지는 자산 격차를 보고 있으면 자산 증식의 막차를 놓치는 게 아닐까 불안하다. 저성장 시대에 청년은 기회 자체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 불안하다. 저출생 고령화 시대의 청년은, 윗세대의 노후를 자신이 부양하고 자기 노후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 같아 불안하다. 불안의 종류는 처한 상황마다 다양하기 때문에 요구하는 해법도 다양하다. 하지만 저성장·저출산·고령화로 사회가 수축하고 쪼그라든다는 감각, 기회와 미래와 안전망이 사라져간다는 감각은 공동체 구성원 대부분이 공유한다. 주권자들은 실제 피부로 느끼는 불안을 정치의 ‘1번 의제’로 올려달라고 요구하는데 정치가 딴짓을 할 때, 내 불안과 무관해 보이는 의제를 ‘1번 갈등’으로 밀어붙이려 들 때, 집권세력이 내 불안을 알고 해결하려 노력한다는 믿음은 사라진다. 이럴 때 불안은 분노가 된다. 분노는 투표율을 끌어올린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율은 58.2%로, 보궐선거 사상 최고치다.

성전의 세계관과 사회경제 프로그램의 부재가 만나면, 이중의 의미로 정치가 작동을 멈춘다. 정치의 작동을 멈춘 정치가들은 정치의 가장 큰 이벤트인 투표로 심판받는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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