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여성을 향한 백인 남성의 시선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 오페라 〈나비 부인〉에 나오는 초초상(맨 위)과 뮤지컬 〈미스 사이공〉의 킴(가운데), 영화 〈킬 빌〉의 오렌 이시(위)다.

이것은 하나의 현상이다. 백인 남성과 아시아 여성의 조합. 스페인 남성과 결혼해 스위스에 정착한 나는 그 현상의 일부다. 거리에서 우리 같은 조합을 보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남편 직장에서도 그의 팀원 중 약 절반이 백인 남성-아시아 여성 커플이다.

페이스북에 ‘관심 있나요(Are you interested, AYI)’라는 데이팅 앱이 있다. 사용자가 다른 사용자의 프로필을 보고 마음에 들면 ‘yes’를 눌러 상대에게 알람이 가도록 하고, 관심이 없으면 ‘skip’을 눌러 다음 사람 프로필로 넘어가는 방식이다. ‘yes’를 받은 상대방이 응답을 하면 대개 만남이 이뤄진다. AYI 측에서 2013년에 앱 사용자 약 240만명(이성애자)의 반응을 인종(백인·흑인·아시안·히스패닉)과 성별에 따라 분석했다. 여성 중에서 ‘yes’를 보낸 뒤 남성의 응답을 가장 많이 받은 인종은 아시안이었다. 반대로 남성 중 여성의 응답을 가장 많이 받은 인종은 백인이었다. 아시아 여성과 백인 남성이 데이팅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많다는 뜻이다.

실제로 만난 적 없이 온라인 프로필만 보고 관심을 표시한 결과라는 점에서 이 조사는 의미가 있다. 성격이나 취미, 직업 등 다른 변수를 최대한 제외하고 외적인 요인(인종)이 이성 선호도에 얼마나 힘을 발휘하는지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별로 놀라운 결과도 아니다. 현실에 존재하는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선호를 그대로 반영했을 뿐이다. 문제는 이 선호가 편견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은 대체로 ‘얌전하다, 순종적이다, 날씬하다, 피부가 좋다, 똑똑하지만 잘난 체하지 않는다, 한 남자만 사랑하고 가족 중심적이다’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은 비아시아 남성만 가진 게 아니다. 미국 코미디언인 백인 여성 에이미 슈머가 2012년 자신의 스탠드업 코미디쇼에서 “나는 아시아 여자의 경쟁 상대가 못 된다”라면서 말한 이유를 들어보자. “아시아 여자들은 수학을 잘해. 부드러운 머릿결을 타고났지. 웃을 때 입을 가려서, 여자들이 말하는 걸 싫어하는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에이미 슈머가 늘어놓는 편파적 근거들의 정점은 이것이다. “아시아 여자들은 질이 가장 좁아. 아무도 상대가 안 돼.”

진짜 희극은 에이미 슈머가 페미니스트 코미디언으로 알려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진짜 비극은 이런 편견을 아시아 여성 스스로 내면화한다는 점이다. 나는 일본인 여성이 이렇게 말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질이 좁아서 남자들이 좋아하잖아.” 타이 여성에게선 이런 말을 들었다. “우리 피부가 일부러 태닝한 것처럼 매끈한 갈색이라 남자들이 좋아하잖아.” 어쩌다가 ‘우리’는 제 발로 편견의 구덩이에 들어가게 됐을까. 이 여성들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나 스스로가 그 편견에 일조하지 않았다고 장담하기 어렵다. 이 편견은 최소 한 세기 넘는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고, 너무나 광범위하게 퍼져서 벗어날 방법이 막막한 시선이기도 하다.

성적 편견 강화한 전쟁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에서 비롯된 선호를 나는 앞에서 ‘현상’이라고 했다. 실은 현상을 벗어나 ‘증상’ 취급을 받는다. 이 증상에는 이름도 있다. ‘옐로 피버(yellow fever)’가 그것이다. 원래 ‘황열병’을 뜻하지만, 비아시아 남성(특히 백인)이 아시아 여성(옐로)에 대해 느끼는 통제 불가능한 이끌림을 가리키는 속어로 쓰인다. 다른 이름도 있다. ‘아시안 페티시(Asian fetish)’ ‘아시안 성애(Asiaphile)’ 등이다. ‘사랑의 열병을 앓는다’는 건 진부한 수식이지만, ‘옐로 피버’는 그보다 복잡한 함의를 갖고 있다. 낯설고 미스터리한 감정이며 동시에 정복해야 할 대상임을 암시한다. 현대적 의미의 연애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자. ‘옐로 피버’의 근원으로 언급되는 건 19세기 제국주의 시절 일본 항구에 발을 들인 뒤 게이샤를 처음 만난 유럽 백인 남성이 받은 인상이다. 잠재적 식민지, 개척과 정복의 대상이던 땅에서 만난 여성을, 제아무리 매혹적이라 해도 동등한 인간으로 대했을 리 없다. 미국에서도 최초의 아시아 여성에 대한 이미지는 성매매 여성과 연결된다. 19세기 중반부터 서부 개척과 금광 채굴 때문에 중국인 저임금 노동자가 미국으로 많이 몰려들었다. 대부분 중국에 아내와 가족을 두고 혼자 온 남성이었고, 이들을 상대로 일하는 중국인 성매매 여성들이 있었다. 미국인들 사이에 ‘일자리를 빼앗는 중국인 남성과 비도덕적인 중국인 여성’이라는 반감이 퍼졌고, 그래서 나온 게 1875년 페이지법(Page Act)이다. 법의 내용은 ‘자유롭고 자발적인 동의 없이 미국으로 노동자를 데리고 오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에게 징역 최대 1년이나 벌금 2000달러를 부과한다’는 것인데, 실질적으로 중국인 여성의 미국 입국을 막는 데 이용됐다.

20세기 중반 아시아에서 일어난 전쟁은 아시아 여성에 대한 성적 편견을 강화하는 데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한국의 미군 주둔지 근처 성매매 업소를 떠올리면 된다. 아시아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던 미국의 젊은 남성 군인들이 성매매를 통해 ‘아시아 여성=성적 대상’이라는 편견을 길렀다. 베트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쟁 상황에서 성매매는 일부 여성들에게 유일한 생계 수단이었다. 베트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영화 〈풀 메탈 자켓〉(1987)에는 이런 상황이 잘 묘사돼 있다. 베트남 성매매 여성이 미군 병사들에게 다가가 “Me love you long time. Me sucky sucky”라고 하는 (성적 비속어가 들어간) 대사는 너무나 생생하고 사실적이다.

〈풀 메탈 자켓〉에는 중요한 인물이 하나 더 나온다. 숨어서 총을 쏴 소대원들을 줄줄이 쓰러뜨리는 베트콩 스나이퍼로, 잡고 보니 어린 10대 여성이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주요 베트남 여성이 하나는 성매매 여성이고 하나는 스나이퍼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게 바로 서구 백인 남성들이 아시아 여성을 보는 시선의 양대 축을 이루기 때문이다. 외국에서 아시아 여성을 일컫는 속어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로터스 블라섬(lotus blossom, 연꽃처럼 아름답고 연약한 여성)’이고, 다른 하나는 ‘드래곤 레이디(dragon lady, 용처럼 위험하고 두려운 여성)’이다.

‘로터스 블라섬’의 계보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 부인〉(1904)에 나오는 일본 여성 ‘초초상’과 뮤지컬 〈미스 사이공〉 (1989)의 베트남 여성 ‘킴’으로 이어진다. 초초상은 미국 해군 대위 핀커턴의 일본 현지처였다가 핀커턴이 미국에서 백인 여성과 또 결혼했다는 걸 알고 아이를 남겨둔 채 자살한다. 킴은 전쟁고아로 술집에서 일하다가 미군 병사 크리스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지만 크리스가 미국 여성과 결혼했다는 걸 알고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기 위해 자살한다. 반대편의 ‘드래곤 레이디’에도 계보가 있다. 최초의 중국계 미국인 할리우드 스타 배우 애나 메이 웡이 ‘링 모이 공주’ 역을 맡은 〈용의 딸〉(1931)부터,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킬 빌〉(2003)에서 중국계 배우 루시 리우가 맡은 역 ‘오렌 이시’ 등이 있다.

편견의 양대 축이라고는 했으나, 드래곤 레이디 역시 결국 정복해서 로터스 블라섬으로 만들어야 할 대상이다. 〈풀 메탈 자켓〉의 베트콩 여성은 결국 백인 남성에게 사살당한다. 〈킬 빌〉의 ‘오렌 이시’도 백인 여성 때문에 죽는다. 〈나비 부인〉과 〈미스 사이공〉에서 아시아 여성은 백인 여성에게 아내 자리를 빼앗기고 자살한다. 짚어야 할 부분은, 백인 남성과 아시아 여성 사이에 다른 권력관계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다. 백인 남성〉백인 여성〉아시아 남성〉아시아 여성 순서다. 백인 남성은 아시아 남성과 싸워 그 땅과 소유물을 1차로 정복하고, 이어 아시아 여성을 2차로 정복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아시아 남성이 교묘하게 여성적으로 묘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식민화’한다는 전쟁터의 은유가 성 역할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앞서 언급한 페이스북 데이팅 앱 조사에서, 전 인종 중 가장 인기가 없는 건 아시아 남성이었다. 그게 전적으로 아시아 남성의 특성 때문일까. 규칙을 잘 지키고 성실하며 조용하다는 긍정적 성향이, 순종적이고 싸움을 피하며 여성적이라는 의미로 해석되는 데에는 제국주의 역사가 배경으로 작용한다.

예일-NUS 대학의 로빈 정 교수는 이 과정에서 아시아 여성이 ‘이중 여성화(double feminization)’한다고 설명한다(2016년 논문 〈왜 옐로 피버는 칭찬이 아닌가〉). 먼저 아시아 남성이 여성화(식민지화)하고, 아시아 여성이 거기서 한 번 더 여성화한다는 거다. 아시아 여성에게 ‘가족을 최우선시하고 수줍음이 많으며 부드럽게 말하고 순종적’이라는 극도로 여성적인 편견이 고착된 건 그 때문일 수 있다. 로빈 정 교수에 따르면 흥미롭게도 흑인에 대한 편견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는 이와 정확히 반대작용이 일어난다. 흑인 여성이 먼저 남성화하고, 이어 ‘이중 남성화’한 흑인 남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지닌, 그래서 ‘우리 여자들’을 그것으로부터 막아내야 할 존재로 대상화된다.

한국 여성 4명을 포함해 8명이 사망한 연쇄 총격 사건이 벌어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추모소 풍경. ⓒUPI

이중 여성화와 이중 남성화

아시아 여성에 대한 편견의 역사를 길게 쓴 것은 얼마 전 미국 애틀랜타에서 일어난 총기 사건 때문이다. 전체 희생자 8명 중 6명이 아시아 여성, 그중 4명이 한국 출신인 이 사건을 두고 미국 경찰로부터 가해자에게 ‘나쁜 날(bad day)’이었다느니 그가 성 중독을 앓고 있었다느니 하는 말이 나왔다. 이것이 혐오범죄인지 아닌지 따지는 건 중요하다. 단, 아시아 여성이 인종과 성, 두 가지 면에서 역사적으로 어떤 대우를 받아왔는지 알고 따져야 한다.

사실 더 허탈했던 건 같은 한국인의 반응이었다. 해외 한인 중에서도 희생자들이 마사지 업소에서 일했다는 점을 들어 ‘감정이입이 되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고, 한국 언론도 이 일을 크게 다루지 않았다. ‘재외 한국인’ ‘여성’ ‘마사지 업소 근무’ 같은 조건 때문에 피해자들이 미국과 한국 양쪽에서 소외됐다고 본다. 다들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차별은 대상을 그리 세세히 구분하지 않는다. 2021년을 사는 모든 아시아 여성은 ‘나비 부인’과 ‘미스 사이공’과 ‘오렌 이시’의 유산을 안고 있다. 어디서 살건, 무슨 일을 하건, ‘아시아 여성’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 일반화는 차별의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뭉뚱그려 공격하는 차별 앞에서 ‘우리는 다 다르다’고 주장하는 건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똑같이 뭉뚱그려, 연대로 저항해야 한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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